< 천마의 세계로 (3) >
결국 대학원생은 직장인 친구와 함께 천마의 첫 콘서트에 왔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 예고편 티저를 보는 순간, 천마에게 홀라당 넘어간 대학원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마치 세이렌에 홀린 것처럼.
지금 정신이 돌아온 대학원생은 조금 후회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친구가 티켓도 사준다고 했으니까 오랜만에 문화생활 좀 할까?’라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직장인 친구가 오전 11시 30분부터 대기를 서자고 할 때는 그냥 몸이 아프다고 할까 고민도 들었다.
‘쉬는 날에 남의 새끼 보러온다고 뭐하는 거냐.’
날도 추운데 줄은 또 어찌나 길던지. 심지어 티켓팅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천마의 출근길이나 퇴근길 얼굴을 보겠다고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진저리를 치던 대학생은, 입장하고 좌석에 앉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공연 시작도 얼마 안 남았겠다, 이왕 온 김에 즐기자고 마음을 먹었다.
‘소중한 내 휴일··· 그래도 분위기는 좋네.’
마음을 바꿔먹으니 시야가 넓어진다.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대부분 손에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벌써 응원봉도 나왔구나.’
옆에 앉은 직장인 친구도 응원봉을 소중하게 꺼냈는데, 신기하게 생긴 게 괜히 시선이 간다.
대학원생은 힐끔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슨 횃불같이 생겼네.’
갈색의 손잡이에 헤드 부분은 불길이 선모양으로 촘촘히 양각되어 화려해 보였다.
헤드는 투명했는데, 주황색 라이트가 켜지면 횃불처럼 보였다.
그러고보니 헤드가 보통 응원봉치고는 꽤 컸는데, 자세히 보니 안쪽에 검은색 왕관이 있었다.
왕관에만 불이 들어오는 모드와 횃불 전체에 불이 들어오는 모드로 번갈아서 쓸 수 있게 만든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와···이쁘다. 이거 디자인 누가 한거야?’
진짜 화려한데 멋있다···! 우리 재하 꺼는 그냥 데이지꽃인데.
디자인한 사람이 신경을 쓴 게 눈에 보인다.
대학원생이 속으로 부러움을 삭히는 사이, 사람들이 들고 있던 응원봉의 불빛이 꺼졌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걸 중앙에서 원격제어로 끈 것이다.
“어?”
"뭐야뭐야?"
사위는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무대에도 주위 조명도, 응원봉조차 불빛이 없는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가운데서 소리가 울려온다.
- 둠둠둠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맥동.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콘서트용으로 인트로를 길게 편곡해서 그런 건가?
대학원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두 번째 소리가 덮쳐온다.
- 둠둠둠
그리고 두 번째 소리가 들렸을 때, 대학원생은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거 설마 목소리야?'
그녀가 악기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목소리였다.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는, 거대한 심장 소리 같은 진동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하나의 목소리가 얽히고설켜 거대한 고동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내자, 뒤이어 소름이 올라왔다.
어쩌면 그건 전율이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불가사의한 것을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을 만난 놀라움.
대학원생의 심장 박동이 둥둥거리는 울림과 함께 방망이질 쳤다.
- 둠둠둠
세 번째 고동을 들었을 때, 대학원생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천마는 어디에 있지?’
“위다!”
“천마다, 천마! 위에 있어!”
그녀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누군가 소리쳤다.
대학원생을 비롯한 콘서트장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한 줄기 빛이 은하수처럼 흩뿌려지고, 천마가 내려오고 있었다.
왕좌처럼 화려한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천마는 친구가 반쯤 장난삼아 말하던 ‘교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 또 한번 시작해볼까
짜릿한 느낌 스치는 thrilling
스릴링- 깊고 낮은 목소리로 긁듯이 뱉는다.
고막에 소름이 돋는 것같아 대학원생은 저도 모르게 귓바퀴를 매만졌다.
마침내 화려한 왕좌는 돌출무대 앞에 내려앉았다. 본무대까지 길게 이어진 돌출무대는 모델이 걷는 런웨이같기도 했다.
천마가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뻗는다.
어쩐지 개선식을 거행하는 왕 같기도 했다.
천마!
천마!
천마!
그리고 마침 천마가 무대로 가는 경로에 대학원생의 좌석이 위치해 있었다.
대학원생은 걸음을 옮기는 천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천마가 씩 웃는 모습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얄미울 정도로.
‘이래도 안 좋아할 거야?’
그 순간, 대학원생은 친구가 왜 천마에 치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러면 반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천마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천마가 무대에 도착하니 빵빵한 코러스가 나오기 시작한다.
- 둠둠둠둠둠둠둠둠둠
이번 연말을 장식한 둠둠둠의 후렴구.
대학원생은 그 후렴구를 따라 정신없이 외쳤다.
“둠둠둠둠둠!”
“replay replay I play once again”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콘서트는 이런 맛이지!’
신나게 둠둠둠을 외치던 대학원생은 슬슬 노래가 끝나가자 불안해졌다.
천마의 노래 중에서 따라부를 수 있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씨, 콘서트 오기 전에 천마 님 노래 더 듣고 올걸.'
대충 눈치껏 따라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지금처럼 흥이 오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두 번째도 그녀가 아는 노래가 나왔다.
happily ever after.
‘숨은 고수를 찾아라’에 나오면서부터 유명해진 이 노래는, 1집 보너스 트랙에 수록된 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천마에 관심이 없던 대학원생도 알 만큼. 다만,
‘여기서 이걸 부른다고? 갑자기 잔잔한 노래가 나오면 분위기가 식을텐데···.’
하지만 대학원생의 걱정은 전혀 쓸데없었다.
옅게 흔들리는 미풍 같은 멜로디지만, 천마가 부르니 가슴 깊이 들어와 생동한다.
조금 전의 긴장감을 부드럽게 씻어주는 선율에 대학원생은 걱정도 잊고 무대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콘서트를 꽤 많이 다녀봤다고 자부하지만, 천마의 콘서트는 몰입도 자체가 달랐다.
곡 하나가, 완성된 하나의 세계였다.
그 안에서 푹 잠겨서 놀다 보면 어느새 다른 맛이 나는 노래가 다가온다.
행복한 탐닉의 시간.
그러나 이윽고 happily ever after도 끝났고, 대학원생은 이전보다 더욱 아쉬워했다.
‘이제 진짜 내가 아는 노래는 다 나왔네.’
그때 그녀의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뭐야? 이것도 천마의 노래였어?’
차트를 인기순으로 돌려 들을 때 항상 초반부에 나오던 노래이다.
가사는 완벽히 모르지만 후렴구는 따라부를 수 있었다.
다음 노래도, 그리고 다음 노래도.
대학원생이 아는 노래였다.
대학원생은 자신이 천마의 1집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며들었다니?
대체 언제부터지?
당황스러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덕분에 대학원생은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천마의 1부가 모두 끝나고 게스트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
길성진은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대 쪽을 힐끔 보니 천마가 1부 공연을 마무리하며 토크를 진행 중이었다.
길성진은 토크가 끝날 때쯤 올라가서, 소개와 함께 게스트 합동 무대를 펼칠 예정이었다.
길성진은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메이크업을 수정해주던 누나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긴장되세요?”
“네? 아니, 아니요.”
길성진은 아니라고 했지만, 피식 웃는 것은 보니 믿는 눈치는 아니다.
길성진은 속으로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이게 다 천마 님 때문이야.’
정말로 긴장한 건 아니었다.
길성진은 무대에서 긴장하는 타입은 아니다.
신인답지 않게 큰 무대에 여러 번 서보기도 했고, 이번 게스트 합동 무대도 <히트메이커> 결승에서 선보인 무대를 뮤지컬 버전으로 편곡한 노래라 이미 그에게 익숙했다.
다만 그를 초조하게 하는 건,
‘왜 아직까지도 말이 없는거지?’
천마가 지금까지 영입 제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천마가 영입 제안을 할 줄 알아서, 유명 기획사에서 연락 온 것도 모조리 거절했는데.
심지어 천마의 영입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건 자신의 착각만이 아니었다.
당장 인터넷만 봐도,
- 길성진? 걔 마교 가는 거 아님?
- 얼굴이 숭악한게 마교에서 좋아할 상이로고
- 당연히 천마랑 하겠지
- 지금 천마가 길성진 1집 프로듀싱 하고있다던데?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남의 속은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길성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천마 님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
특히 며칠 전에 그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미니롱이 천마한테 커스터마이징 마이크를 받았기 때문이다.
천마신교 레코즈 소속의 아티스트에게만 특별히 주는 선물이었다.
반짝거리는 큐빅들과 왕리본 모형이 달린 핑크 마이크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청 비싸 보이고 엄청 화려했다.
미니롱이 마이크 테스트를 해본다며 연습실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어찌나 부럽던지!
숨소리 하나까지 잡아주는 섬세함과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전달력.
길성진은 자신도 천마의 회사에 들어가서 그런 선물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냥 천마 님한테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볼까?’
그렇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던 길성진은 스탭의 신호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에는 1부 공연을 마친 차선우가 있었다.
차선우는 검붉은 도복에 검은색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수실이 놓아져 무대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의상은 잘 어울렸다.
길성진은 그런 차선우가 멋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을 몰라줘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차선우는 길성진의 오묘한 눈빛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여간 투명한 녀석이라니까.’
길성진은 무대 준비를 하는 내내 그에게 티를 냈다.
- 아, 나도 1집 내고싶다!
- 천마 님 저 곡 써주실 거죠?
- 우와 나도 저런 마이크 받고싶어요.
눈치가 있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어필하기도 했다.
- 천마 님 그런데 2호 가수 영입 생각은 없으신가요?
물론 차선우도 길성진을 회사로 영입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바로 오늘, 콘서트가 끝나고 길성진을 따로 불러서 영입 제안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차선우는 길성진을 소개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사람이죠. <히트메이커>에서 우승하면서 핫한 아티스트로 떠오르고 있는 친구, 길성진입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차선우는 길성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길성진은 이번에는 제대로 연습을 해왔는지, 인터뷰 때처럼 횡설수설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합동 무대로 넘어가기 전, 차선우는 준비해둔 서프라이즈를 하기로 했다.
“참. 제가 길성진 씨한테 축하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이번에 또 우승을 하셨잖아요.”
정확히는 천마신교 소속 아티스트를 위한 선물이지만, 아직 길성진도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일단 히트메이커 우승 축하 같은 명목을 붙이기로 했다.
스탭이 상자를 들고왔다.
갑작스러운 서프라이즈였지만 관객들은 재밌어했다.
우오오오!
열어봐! 열어봐! 열어봐! 열어봐!
다들 선물이 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차선우의 예민한 귀는 수군거림을 모두 잡아챘다.
- 천마가 콘서트에서 선물을 준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건가?
- 그냥 둘이 친해서 그런 거 아니야?
- 길성진 이제 데뷔할 거니까 그거 축하해주는 건가?
- 아니면 히트메이커 우승 축하일 수도 있고.
- 궁금하다. 뭐를 준비했으려나?
스탭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어 있던 길성진에게 상자를 건넸다.
“어, 어어?”
길성진은 엉겁결에 상자를 받았다.
고급스러운 상자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길성진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포장을 한 겹 뜯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폭신한 완충재에 싸인 마이크가 나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을 메인 색상으로 커스텀한 마이크였다.
아래에는 자신의 영문 이름이 멋들어진 필기체로 양각되어있었다.
“형, 저, 이거···.”
미니롱 누나들이 받은 그거 아닌가?
그럼 이 선물을 준 것도 그럼 나를 영입하려고?
길성진이 영입하는 거 맞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선우는 쉿 하더니 눈을 찡긋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입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는 의미였는데···.
길성진은 제대로 감격해버렸다.
'뭐야? 나한테 이벤트 해주려고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한 거 였어?'
사람들 앞에서 이런 선물을 준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까지 노심초사하던 게 스르르 녹아내렸다.
“크흡.”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급히 닦아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으려고 애써봐도 오히려 표정만 이상하게 변할 뿐이다.
그때 함께 감동 받은 관객들이 외쳤다.
울지마! 울지마! 괜찮아!
성진아 화이팅!
그 소리를 듣자 길성진은 더 눈물이 나왔다.
“아씨 이러면 안 되는데···크흥.”
그리고 차선우는 그 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 콘서트 VOD로 낼 거라서 저거 그대로 박제될텐데···.’
이제 저 괴상한 표정은 영원히 역사에 남겠구나. 축하한다.
하지만 차선우는 자신이 길성진과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천마의 세계로 (3) > 끝
ⓒ 연태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