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가 왜 거기서 나와 (2) >
천마의 첫번째 팬사인회는 높은 경쟁률을 자랑했다.
먼저 기존 뉴튜브 시청자들.
그들은 지금까지 화면으로만 접했던 천마를 실물로 영접하고 싶어 했다.
또한 팬사인회 무대에서 전설의 Time Lapse 엔딩 무대를 다시 보여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콘서트에 가지 못한 수많은 팬들은 아쉬운 대로 팬사인회에 응모했다.
그래서 팬사인회에 당첨된 사람들은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첨됐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여기 기뻐하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아싸 나도 당첨이다!"
강여름의 남동생이자 길성진의 친구인 ‘남고생’
그도 천마의 팬사인회에 당첨된 것이다.
아, 이제 남고생은 아니다.
극적으로 H 대학교 예비 번호를 받아 추가 합격에 성공한 그는, 입학식을 기다리는 예비 대학생으로 승격했다.
대학에 합격한 예비 대학생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입학 전 알찬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했으나,
- PT 받아서 식스팩 만들기
- 기차 타고 배낭여행하기
- 한라산 정상에서 인증샷 남기기
···2월이 끝나가는 지금, 이 중 단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예비 대학생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게 하나 있으니,
"천마 영상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니까."
본격적으로 천마의 영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에는 찍먹하기만 했던 천마의 영상도 정주행을 마쳤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손에는 천마의 2집 앨범이 들려있었다.
20살 인생 처음으로 구매한 실물 앨범.
거기서 팬사인회 응모권이 튀어나오길래 별생각 없이 응모를 했는데, 팬사인회에 당첨됐네···?
운 좋게 한 장의 응모권으로 팬사인회에 올 수 있었던 그는 굉장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재미있네. 팬사인회라서 그냥 사인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구성이 알차잖아?'
팬사인회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었다.
1부에서는 간단한 질의응답을 시작으로 밸런스 게임을 몇 개 해주었다.
진행자가 천마의 컨셉에 맞춰 질문을 던졌다.
'이틀을 꼬박 굶은 상황. 그때 두 사람이 도시락을 가지고 왔는데요. 천마님은 누구랑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사황성주 아니면 무림맹주?'
그리고 천마도 그 장단에 맞춰주듯 정색했다.
'둘 다 죽이고 도시락만 먹을게요.'
이어 천마가 1일 1닭을 하고, 찍먹파에, 딱복을 좋아한다는 소소한 TMI까지 나왔다.
거기에 1부 마지막쯤에 주간곡소리 오프라인 버전도 해주고, 마지막으로 대망의 Time Lapse 공연까지!
혜자스러운 구성에 예비 대학생의 머릿속에는 팬사인회에 오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어느덧 하이라이트인 대면 팬사인회가 시작됐다. 예비 대학생은 부푼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톡톡-
누군가 뒤에서 예비 대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마스크에 모자, 커다란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여자가 쳐다보고 있다.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보이는 복장이다.
'요즘 연예인도 저렇게는 안 다니겠다.'
황당하게 쳐다보던 예비 대학생은 그 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세요?"
"야 니가 왜 여기있어?"
익숙한 목소리다.
오늘 아침에 연차를 썼다면서 신나게 집안을 뛰어다니던 생물학적 여자 혈육.
"...강여름?"
바로 누나였다.
강여름은 마스크를 턱에 걸친 채 비뚜름하게 웃었다.
"너도 여기 왔냐?"
"엉?"
뇌정지가 온 남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고, 강여름은 그런 남동생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너 천마 님 안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맨날 내가 얘기할 때마다 역정을 내더니?"
"아, 아니 뭐. 그냥 집에 응모권이 있길래 넣어본거지."
"아 그래? 그런 거였어?"
강여름은 위아래로 남동생을 한번 훑더니 피식 웃었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가라."
그러더니 강여름은 뒤에 있던 친구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에게는 더이상 관심도 없다는 듯이.
남동생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
내 첫 팬사인회는 순항중이었다.
이번에 모이는 팬들은 100명.
최대한 많은 팬을 만나고 싶었지만, 인원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한명 한명에게 신경을 못 써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온 사람들을 확실하게 챙겨줘야지.'
그렇게 2부가 시작되고, 나는 본격적으로 팬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
나를 보며 진심으로 반가워해주는 모습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할 수 있었다.
팬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웠다.
"교주님. 저 오늘 여기 오다가 넘어졌어요."
"엥? 어쩌다가요?"
"교주님 빨리 보려고 뛰어오다가 빙판에 미끄러졌어요."
"어디 한번 봐요."
팬이 내민 손바닥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내공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으잉? 이제 안아프네요?"
팬은 신기해하며 내려갔고 그 모습을 본 뒷사람은,
"저는 요즘 어깨가 결리는데···."
하며 어깨를 내밀었다. 나는 내공으로 뭉친 어깨를 풀어주며 생각했다.
'팬사인회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안마를 받는 팬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그 뒤로도 세 명쯤 마사지를 해준 후, 남학생 한명이 나타났다.
고등학생, 아니면 이제 갓 성인이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강한솔입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죠?"
"...네? 저는 건강한데요?"
그럼 내공 마사지는 건너뛰고.
나는 강한솔이 내미는 앨범을 받아서 싸인을 해주었다.
天魔
붓펜으로 멋들어지게 쓰는 것과 동시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솔 씨는 요즘 뭐 하면서 지내요?"
“큼. 제가 H 대학교에 합격해서 일주일 뒤에 OT 가거든요.”
"H 대학교?"
내 주변에 H 대학교가 왜이렇게 많냐.
일단 옥수진과 강여름이 여기 출신이고, 얼마전에 내 여동생도 H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하던데.
"좋은 학교에 붙었네요."
내 칭찬을 들은 강한솔이 뿌듯한 표정으로 앨범을 들고 내려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줄이 많이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열댓 명 정도.
이제 다음으로 사인을 받으러 온 사람을 본 순간,
"...?"
"헤헿"
방정맞은 웃음.
마스크와 모자, 커다란 안경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천마님?"
강여름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어쩌다보니 됐더라고요!"
"......"
오늘 연차를 쓸 때부터 알아봤었어야 했거늘.
깜짝 놀랐지만 여기서 대놓고 아는 척할 수는 없다.
강여름은 직원이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관계자'가 '편법을 써서' 온 거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본인도 그걸 알고는 있으니 저렇게 싸매고 왔겠지.
나는 일단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오늘 돌아가면 뭐할거에요?"
"팬사인회 사진 보정해서 업로드 하려구요. 지금 많이 찍어 놨거든요."
강여름이 옆구리에 찬 대포 카메라를 툭툭 치며 말하는데,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두렵다.
"...저랑 하고싶은 거 있나요?"
"천마님과 매일 점심을 함께 먹고 싶습니다!"
···상사랑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직원이라니.
보통 그 반대 아닌가?
다행히 강여름은 더이상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나는 이 맑은 눈의 광인을 얕보고 있었다.
대화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때쯤, 강여름은 아까부터 소중하게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무언가 빼냈다.
하얀 깃털이 붙어있는 원형의 천사링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내 그와 쌍을 이루는 앙증맞은 날개가 봉투에서 나왔다.
동시에 그걸 본 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이건 안돼.'
저편에서는 카메라를 든 팬들이 현장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무조건 박제 각이다.
'이건 막아야 한다.'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금나수를 펼쳐 강여름의 손에서 종이봉투를 가져온다.
"이건 제 선물인가요?"
"엇? 선물인데 지금 착ㅇ···."
그렇게는 안되지.
나는 이어서 비어있는 손에 내가 준비한 선물 봉투를 쥐여 주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인데 받으세요."
이번 팬사인회에 온 팬들에게 주는 선물인데, 내가 아침마다 먹는 홍삼청이다.
"여름님이 주신 선물을 제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금나수의 수법을 응용한 그 고절한 한 수에 강여름은 영문도 모른 채 봉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버버거리던 강여름은 시간이 끝났다는 스탭의 말에, 대놓고 아쉬워하며 떠나갔다.
강여름을 보낸 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히 큰 위기는 넘겼다.
이제는 별문제 없겠지?
하지만, 그 다음으로 올라온 사람을 보고 나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자와 마스크, 안경까지.
방금 전 강여름과 똑같은 패션을 한 사람이 커다란 갓을 들고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천마님."
'옥수진 너마저···.'
*
한편 천마가 팬싸인회를 하는 동안, 해외에서도 천마에 대한 반응이 오고 있었다.
시작은 <대한의 검성>이었다.
천마의 2집 앨범과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대한의 검성>은 국내 넷플렉스에서는 1위를 석권했다.
또한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은 분명 마이너한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액션신이 워낙 뛰어나서 눈이 즐거웠고,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시원시원한 전개를 가미했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대한의 검성>은, 최근 미국 마니아층에도 입소문이 퍼져 결국 북미 넷플렉스에서 9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여기, <대한의 검성>을 뒤늦게 보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다.
영화감독 사이먼 베일리.
그는 영화감독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딱히 히트했다고 할만한 작품은 없다.
대신 그는 평론가로서 유명했다.
보통 '사이먼 베일리' 하면 영화감독보다는 평론가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사이먼은 촬영이 없는 동안 취미로 블로그에 영화나 드라마의 평론을 올리곤 하는데, 자주 올리지는 않지만 그의 평론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냉철했다.
그래서 대중들 사이에는 사이먼이 추천하는 작품은 믿고 본다는 말이 돌 정도이다.
주말을 맞이해 넷플렉스에 들어간 사이먼은 상위권에 있는 작품들을 위주로 쭉 둘러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게 없을까 탐색하며 예고편을 훑어보던 사이먼의 눈길은 어느새 9위까지 내려갔고, 거기서 한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sword master? 무협인가?"
동양 시대극은 관심 밖의 장르라 넘어가려고 했지만,
- 험한 길에 올라서
눈물겨워 하노라
자동 재생되는 예고편 OST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뜻은 잘 모르지만 언어와 관계없이 마음을 두드리는 특별함이 있었다.
확인해보니 6부작의 한국 드라마였다.
"호오, 한국의 작품이었나?"
넷플렉스에 한국의 작품이 종종 올라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는 사이먼의 취향이 맞는 작품도 있었고.
사이먼은 흥미가 돋았다.
마침 뮤지컬 영화를 준비하고 있던지라, 시선을 잡아끄는 OST를 가진 작품을 보기로 했다.
바로 <대한의 검성>을.
< 너가 왜 거기서 나와 (2) > 끝
ⓒ 연태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