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의 전당 (1)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가는 화면 위로 사이먼 베일리의 붉어진 눈동자가 비친다.
사이먼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까 <대한의 검성>을 처음 재생했을 때가 어둠이 깊어질 무렵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사이먼은 목이 타서 탁자 위에 놓인 맥주를 집어 들었다.
드라마를 보며 마시려던 시원한 맥주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이렇게 몰입해 본 것은 오랜만인데?"
직업이 영화감독이고 취미는 평론이다 보니 항상 뭔가를 볼 때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항상 머릿속에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제 3자의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없이 완벽하게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배경, 아무런 역사적 지식이 없어 보는 데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건 기우일 뿐이었다.
"좋은 작품을 봤군."
사이먼은 기지개를 켰다.
어쩌다보니 밤을 새워버렸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에는 묘한 포만감이 들고 있었다.
마치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을 때와 비슷한 여운.
든든한 게 몸속에 에너지가 가득 찬 기분이다.
사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속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어졌다.
좋은 작품을 보면 늘 그렇듯 창작 의욕이 들끓는 법이니까.
드라마를 다 본 후 머릿속에 맴도는 건 하나.
눈길을 사로잡는 액션씬도, 맛깔나는 연출도, 시원한 전개도 아닌,
음악.
그것도 단 하나의 음악.
"주인공의 테마곡. 이건 진짜 물건이군."
하나의 노래가 중심적인 장치가 되어 극을 이끌어 가는 모양새였다.
마치 뮤지컬 영화 같았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음악이 이렇게 머릿속으로 남을 정도로 강렬한데 그게 또 잘 어우러진다.
사이먼은 대체 이 음악을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가 뮤지컬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서 더 관심이 가는 걸지도 모른다.
올 가을에 들어갈 뮤지컬 영화.
대본도 다 나왔고, 유명 제작사에서 대본을 좋게 봐줘서 투자도 잘 받았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스태프 구성부터 캐스팅,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음악감독과 안무가 섭외까지!
할 일이 태산으로 남았다.
음악감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안무가 쪽은 마침 사이먼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안토니오 로시. 그만한 사람이 없지."
안토니오 로시. 미국에서 손꼽히는 안무가이다.
그는 몇 달 전에 K-POP에 꽂혀서 둠 챌린지를 유행시켰었다.
K-POP이라는 마이너한 장르를 가지고도 유행을 선도하는 걸 보면, 뛰어난 안무 역량이 한몫한 게 틀림없다.
물론 사이먼 감독이 안토니오 로시를 데리고 올만한 커리어는 쌓지 못했지만, 제작사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보겠다고 하니 희망을 품고 있었다.
"문제라면 음악인데."
뮤지컬 영화의 삼박자.
서사와 음악, 그리고 안무의 완벽한 결합.
그중 음악만 남았다.
여러 후보가 스쳐 지나가지만, 방금 들은 OST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드라마 OST와 뮤지컬 넘버는 다르긴 한데···.’
그래도 음악감독이 관련 경력이 있으면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만큼 그 노래는 매력적이었으니 말이다.
"한번 찾아나보지."
검색하니 기사가 주르륵 나왔다.
<대한의 검성>이 한국 드라마이긴 하지만, K-드라마 마니아층 사이에서 유행했다 보니 관련 기사가 많았던 것이다.
조금 찾아보자, 최기훈이라는 음악감독이 총괄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OST 리스트를 훑던 사이먼은 이내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메인 테마곡인 ‘눈물겨워 하노라’
“이건 다른 사람이 했군.”
작곡, 편곡, 작사, 프로듀싱까지.
최기훈 음악감독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곡이었다.
사이먼은 어렵게 배치되어 있는 철자를 소리내어 보았다.
"처, 천마? 미스터 천?"
이 사람이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은 음악감독이 아니라 천마라는 다른 작곡가였다.
궁금함의 연속이다.
‘누구길래 음악감독이 메인 테마곡을 온전히 맡긴 거지?’
사이먼의 손이 키보드 위를 타다다닥 움직였다.
최기훈을 찾을 때보다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작곡가이자 가수.
데뷔한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써낸 히트곡만 10개가 넘고, 그의 앨범 타이틀곡은 한국 차트에서 1위를 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쌓아 올린 커리어가 화려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뮤지컬의 '뮤'자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사이먼은 김이 팍 샜다.
"좋다 말았군."
방금 전까지 가득 차있던 충만함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드라마는 재미있었으니 평론은 제대로 적어 줘야지."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팬사인회가 끝나고, 강여름은 한참을 툴툴거렸다.
“수진이··· 아니, 수진 님이 가지고온 갓은 써줬으면서, 내 천사는 왜 뺏어간 거예요?”
갓은 그래도 좀 쓸 만한데, 천사는···음.
"여름 님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그걸 쓰고 싶겠어요?"
"아뇨?"
"...?"
이 여자가?
그래도 강여름이 앨범을 30장이나 사면서 팬사인회를 온 정성이 갸륵했기 때문에, 강여름의 소원이었던 '점심 같이 먹기'는 들어주기로 했다.
"대신 점심 콜? 맛있는 걸로 쏠게요."
심술이 가득하던 강여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소고기도 가능한가요?"
그래서 우리는 점심부터 소고기를 먹고 왔다.
배가 불러진 강여름은 더이상 투덜거리지 않았고, 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오늘 오후에는 전체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으면 재택을 하는 김영훈도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김영훈뿐만이 아니었다.
"아이고 천마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능글맞은 녀석. 이승호가 응접실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나왔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뺀질거림은 여전하지만, 이승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 담배는 확실히 끊은 모양이었고 연습도 꾸준히 하는지 목소리에서 나오는 울림이 달랐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이승호는 오래전, 그러니까 젤리크러쉬의 첫 음방 1등이 있었을 무렵.
나에게서 어려운 곡을 받아 간 후 더이상 곡 달라고 징징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종종 인사를 한다며 우리 사무실에 놀러 오곤 했는데, 내 1집 앨범 이후에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거의 4개월 만인가?
"우리가 뭐 퍽퍽하게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인가요. 겸사겸사 안부도 물을 겸, 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이승호는 강여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강여름은 이미 이승호를 보고 놀란 상태였다.
"혹시 제 팬분 아니신가요? 이름이··· 강여름 씨?"
"헐 맞아요! 저 기억 하시네요?"
“에이, 당연하죠. 제 레전드 직캠도 찍어주신 분인데.”
아, 강여름이 이승호 팬이었지.
전에 ‘이승호마누라’라는 해괴망측한 아이디를 썼다는 걸 떠올렸다.
요즘은 그 닉네임을 폐기한 후 다른 닉네임으로 갈아탔다고 했는데, 나한테는 절대로 알려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강여름은 회의를 준비하러 갔다.
그리고 회의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어서 나는 이승호와 함께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캔 음료 하나를 건네며 물었다.
"팬 이름까지 다 기억해?"
나도 최근에 팬사인회를 했지만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승호는 약간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저도 뭐 모든 팬분들을 기억하지는 못하죠. 근데 저분이 보통 팬이 아니거든요."
···강여름.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뭘 하고 다닌거야?
“회사 사람들도 아는 유명한 홈마인데, 제가 안 유명할 때 강여름 씨가 레전드 직캠을 터뜨려서 띄워줬거든요. 또 팬사인회에서도 대단했죠.”
“어땠길래?”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으로 짤을 생산해냈거든요."
이승호는 약간 해탈한 듯한 얼굴로 일화를 말했다.
"한번은 천사링이랑 날개를 직접 만들어 오셨는데."
잠시만··· 천사?
내 시선이 사장실 구석에 박혀있는 종이봉투로 향했다.
깃털이 수북한 날갯죽지가 비죽 솟아있었다.
"제가 그거 썼다가 엔젤승호로 박제된 적이 있었죠."
"......."
강여름의 마수를 가까스로 피해낸 내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무튼 본론으로.
"근데 갑자기 왜 온거야?"
이승호가 단순히 내 얼굴을 보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이승호는 내가 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속한 그룹 아시죠? 트릭커라고."
뭐, 옛날에 듣기는 한 것 같은데.
"트릭커가 곧 해체될 것 같아요."
이승호의 말을 요약하지만 이렇다.
군대에 가 있는 메인 댄서가 다리를 다쳤다. 앞으로 활동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그 와중에 멤버 한명은 재계약을 거부했으며, 작년 이승호가 야심차게 낸 솔로 앨범은 대차게 말아먹었다.
다른 멤버의 솔로나 유닛 활동도 성적이 신통치 않다.
그래서 회사에서 더이상 푸시도 해주지 않고, 지금은 거의 방치 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지금 계약 얼마 남았는데?"
"저도 뭐 올해 말이면 끝나죠. 그래서 말인데요."
이승호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천마신교 레코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응, 안돼."
아직 내가 준 노래도 제대로 못 부르는 주제에 어딜 천마신교에 들어오려고.
이승호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대답과 함께 시무룩하게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안건은 많았다.
먼저, 소속 가수들의 케어.
천마신교에 2호 가수가 추가되었다.
바로 길성진.
김영훈이 물었다.
"길성진 씨 앨범은 언제쯤 내는 게 좋을까요?"
나는 길성진을 직접 트레이닝 하는 중이다. 보컬부터 작곡까지.
진행 상황을 고려했을 때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트레이닝이 조금 더 필요해요. 빨라도 4월 말, 늦으면 5월이 적당해 보입니다."
"마침 그때가 축제기간이니 활동하기는 좋을 것 같네요. 참, 미니롱 분들은 곡 얘기 없나요?"
"미니롱은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정비를 한다고 하네요. 올해에는 싱글 하나 정도 내거나 아니면 쭉 쉴 건가봐요."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적었다.
"그럼 길성진 씨 앨범 일정은 유통사랑 잘 맞춰 보겠습니다."
그렇게 첫번째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두번째로 내 SNS와 뉴튜브 채널을 관리하는 강여름이 말했다.
"뉴튜브에 새로운 코너를 하나 만들면 좋겠어요."
하긴, 옥수진이 처음 시스템을 정립한 이후 추가된 코너가 없다. 강여름이 어떤 걸 하고 싶냐고 묻길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콘서트, 팬사인회 같은 단발성 이벤트도 좋지만 끝나고 나면 항상 아쉽다.
좀 더 자주, 오랫동안 그 시간을 즐기고 싶다.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코너면 좋겠네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일단 그쪽으로 가닥을 잡고 구상해볼게요."
회의 내용을 노트에 쓰던 강여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천마 님. 요즘 SNS를 통해 안토니오 로시한테 계속 연락이 오네요."
지난번 둠챌린지 이후 자꾸 안무를 만들어주겠다며 협업하자는데, 나는 모조리 거절했다.
지금 내 곡에는 안무가 딱히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계속 거절하니, 이제는 미국에 놀러 오지 않겠냐며 꼬시는 모양이었다.
미국 투어를 해주겠다는 제안부터 유명한 가수 이름을 줄줄이 대며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갈 일이 있나?'
당장은 없을 것 같다.
"안토니오에게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먼저 연락하겠다고 해주세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넹 알겠습니다~"
이렇게 두번째 안건까지 끝났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내 2집 활동에 관한 사항이다.
이번 앨범은 홍보에 엄청 매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뉴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가수와 달리 대중 노출도가 높은 편이다.
그리고 1집과는 다르게 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회사로 라디오나 음악방송, 예능 섭외가 물 밀려오듯 들어와서, 내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만 골라서 나갔다.
그래서 2집 활동은 편하게 즐기면서 했다는 느낌이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활동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가 되어버렸다.
'마무리로 임팩트 있는 활동은 없으려나?'
콘서트의 엔딩 무대에서 2집 앨범의 시작을 강렬하게 알린 만큼, 마무리에도 힘을 줘보고 싶었다.
그때 옥수진이 섭외가 온 목록을 정리한 서류를 전달해주었다.
“여기 정리해놨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나는 서류를 쭉 훑어보다가 하나를 발견했다.
“음악의 전당?”
장수하는 음악 예능으로 500회를 맞아 특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서바이벌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특집을 꾸민다는데··· 이거 재미있겠는데?
< 음악의 전당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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