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의 전당 (3) >
<음악의 전당> 제작진들은 원하던 가수들을 모두 섭외했다.
중간에 천마에게서 답장이 늦게 올 때는 조금 긴장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천마도 수락 의사를 전해왔다.
드래곤볼을 모으는 데 성공한 제작진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면 우리 사전미팅 준비를 해볼까요?"
며칠 후에 있을 사전 미팅, 그날 팀을 짤 예정이었다.
메인 피디는 어떻게 팀 구성을 할지 고민하다가, 서로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매칭이 일어나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후배 가수가 편곡한 노래를 블라인드로 들려줄 예정이다.
보컬이 없는 인스트루먼트 트랙만 짧게.
곡이 어떤지 느낌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배 가수는 누가 어떤 곡을 만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곡만 듣고 듀오를 이룰 후배 가수를 골라야 한다.
메인 피디는 가수들이 보내온 선곡 리스트를 체크하며 사전 미팅의 방향성을 대략적으로 예측해보았다.
“그래도 선곡만 보면 누가 누구랑 짝지어질지 대충 예상이 가네요.”
그는 리스트 최상단에 있는 박희찬의 선곡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박희찬 씨는 역시 트로트 곡을 가지고 왔네요. 그냥 노래 제목만 봐도 트로트 하겠다는 거네.”
“그럼 트로트 가수인 김연준 씨랑 같이 하겠네요.”
괜찮은 조합이다.
트로트 중견 가수 김연준은 킹 오브 트롯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었다.
서로 안면이 있는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할 듯싶다.
다음으로는 <히트메이커>의 준우승자 서이안.
“서이안 씨도 누구랑 할지 알겠네요.”
서이안은 락 느낌이 물씬 나는 곡을 가지고 왔다.
히트메이커 1차 본선 무대.
매그넘의 칸과 락 무대를 보여주며 깊은 인상은 남긴 서이안은, 이후 밴드 보이그룹으로 데뷔했다.
“서이안 씨는 자동으로 락 보컬인 이재현 씨와 매칭이 되겠네요.”
마침 <히트메이커>에서 횃불 퍼포먼스를 했던 노래가 이재현 밴드의 노래다.
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하면 될 듯하다.
피디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주제로 특별편을 만들어야 하나 감도 안 왔었는데.
한번 일이 진행되니 섭외부터 구성까지, 일사천리였다.
선곡 리스트만 봐도 방송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딱 이대로만 가면 좋겠군.’
피디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선곡을 확인했다. 이번엔 천마가 고른 노래였다.
“...?”
그리고 메인 피디는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천마 - Old and the Beast
“...이거 디즈니(Dizny) 주제곡 맞죠?”
믿기지 않아 검색까지 해봤다.
제대로 본 게 맞다.
심지어 한 30년쯤 전에 나온 애니메이션의 OST이다.
“괜찮은 건가?”
아니, 유명한 곡이 맞기는 한데.
잘하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닌가?
남들은 신나는 트로트를 부르고 락 공연을 하겠다는데, 갑자기 애니메이션?
편곡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것보다 누구랑 하게 되려나?
피디는 혼란에 휩싸였다.
*
사전 미팅 날이 다가왔다.
전 소속사 사장의 협잡질로 최근 한가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라희는 오랜만의 스케줄에 들떴다.
‘이게 얼마만의 스케줄이야!’
기분이 좋아진 라희는 부지런하게 준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샵에서 메이크업도 받고, 친한 코디 언니에게 부탁해 옷도 신경 썼다.
전 사장 새끼 때문에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었으나, 방송국에는 보는 눈이 많다.
전혀 기죽지 않았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특별히 스타일링에 힘을 줬다.
오랜만에 방송국 공기도 맡을 겸, 약속 시각보다 일찍 촬영 장소로 향했다.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두 손을 꼭 쥐고 다짐했다.
‘이번에 진짜 레전드 찍고 간다.’
앞으로 방송국에서 본인을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 거라고.
전 소속사 사장의 압박 따위는 보란 듯이 이겨낼 거라고.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런 만큼 이번 방송은 그녀에게 중요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준비는 다 되어있다.
강제로 맞이한 휴식기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회가 온다면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
라희는 평소보다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았다.
‘연습생 시절에도 이정도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종종 있었던 행사 무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습실에서 살았다.
초심으로 돌아가 으쌰으쌰 하자면서도, 내가 지금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 현타가 올 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전 사장의 반짝거리던 대머리만 생각하면 오기가 올라왔다.
‘이번 특집은 내가 찢어놓는다.’
그러다 문득 이번 무대가 듀엣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가 아닌 둘이 만들어야 하는 무대.
라희의 바람대로 무대를 찢어놓으려면 파트너도 함께 찢어줘야 한다.
‘이번에 섭외했다던 후배님들도 다 괜찮기는 하던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실력을 증명한 박희찬과 서이안.
작년 아이돌 판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젤리크러쉬의 가은.
마지막으로, 천마.
‘네 명 중에서는 누가 뭐래도 천마가 최고지.’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라희는 천마가 나머지 세 명과는 다른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선배 라인업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데, 데뷔 연도를 따져 후배 라인을 정하다 보니 천마가 거기에 들어갔다.
천마 혼자만 기량이 남다른 만큼 분명 다른 가수들도 그를 탐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천마는 내꺼야.’
빼앗길 수 없다.
자신은 이번 무대에 사활을 걸었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마와 한 팀이 될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방송국에 도착했다.
미팅 장소로 올라가는 길에, 선배인 트로트 가수 김연준을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장르는 다르지만 워낙 오래 활동을 하다보니, 음악 프로그램에서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김연준은 오랜만에 본 라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라희 씨! 잘 지내셨어요?”
사실 잘 못 지냈다. 하지만 라희는 일부러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선배님. 엄청 오랜만이에요! 저야 잘 지내고 있죠. 스케줄이 없어서 맨날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거든요.”
“아이고,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얘기는 들었는데, 미안합니다.”
“에이, 선배님이 왜 미안해해요, 그 개샊··· 아니 대머리 새끼가 나쁜 놈이지.”
마음속에 있던 육두문자가 반쯤 나왔지만, 선배 앞이라는 생각에 나머지 반절은 다시 집어넣었다.
김연준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사실 원로 가수가 그러면 안되는 건데요. 자기가 선배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얼마나 해처먹은 건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죠. 못 받은 정산금은 다 받아낼 거에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앞으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훈훈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회의실 안에는 이미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라희와 김연준을 본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박았다.
박희찬과 서이안, 그리고 젤리크러쉬의 메인보컬 가은까지.
천마를 제외한 후배 가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반가워요.”
라희는 밝게 인사하면서도 천마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아쉬워했다.
‘천마는 아직 안왔나보네.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후배 가수들이 다 보고 있는데 그런 속마음을 티 낼 수는 없지.
라희는 일부러 더욱 밝은 표정을 지어주었다.
모인 사람 중 김연준이 가장 연배가 높았기의 그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먼저 그와 인연이 있는 박희찬에게 말을 걸었다.
“희찬이 이번에 콘서트 했다면서? 이번에 10분 만에 전 회차 매진시켰다고 기사에도 나오더라.”
“에이, 선배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죠. 나중에 선배님 콘서트 게스트 필요하시면 편하게 말해주세요.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 조금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누가 낸 노래가 얼마나 좋았고, 최근에 누구를 만났고, 또 어떤 방송에 나갔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둘 나올 때였다.
누군가가 말했다.
“희찬 씨, 저 <우리집> 영상 봤는데 양궁 진짜 잘하던데요?”
“에이, 그래봤자 3명 중에 3등이었는데요. 저보다는 천마 님이 대단했죠.”
그리고 박희찬의 입에서 처음으로 이 자리에 없는 천마의 이름이 나왔다.
적당히 대화에 참여하던 라희의 귀가 쫑긋해졌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천마랑 같은 방송에 나왔다고 했지?’
박희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천마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천마와 함께 예능 촬영을 했던 박희찬을 시작으로,
“촬영할 때 둠둠둠 노래를 맨 처음으로 들은 사람으로서, 그때 이미 저는 차트 1등은 물 건너갔다고 예상했습니다.”
<히트메이커>에서 천마의 무대를 직접 보았던 서이안도,
“어? 저도요. 저도 천마 님이 <히트메이커> 1차 본선에서 노래 부르시는 거 보고 우승은 힘들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같이 곡 작업을 해본 젤리크러쉬의 가은까지.
“전 천마 님이 이렇게 뜰 줄 알았어요. 티키티키를 만들때부터 대단한 사람이라는게 느껴졌다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라희는 천마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천마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화제의 주인공, 천마였다.
라희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어? 천마다!”
“...?”
화제의 인물 차선우가 등장했다.
*
촬영이 시작되었다.
회의 전 사람들끼리 충분히 친해질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촬영장의 분위기는 금새 훈훈해졌다.
가벼운 대화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팀 매칭이 시작되었다.
후배 가수들은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함께 있으면, 본의가 아니더라도 표정이나 몸짓으로 힌트를 줄 수 있다는 제작진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배 가수들만 남아서 선택할 준비를 했다.
라희는 그 사이에서 꼭 천마와 듀오를 이룰 거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천마의 노래를 꼭 찾아야 해!'
처음 나온 건 트로트였다.
원곡도 트로트, 편곡도 트로트.
‘이거 박희찬이네.’
누가 들어도 주인을 알 수 있는 곡이었다.
이번 곡을 패스하기로 한 라희는 트로트 가수인 김연준을 힐끗 보았다.
김연준은 고민 없이 1지망에 첫번째 노래제목을 써넣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온 건 락 계통의 노래였다.
‘이건 서이안 씨겠네.’
라희는 이번에도 패스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곡의 주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곡은 두 개.
둘 중 하나가 천마의 곡이 분명했다.
다음으로 나온 건 중성적인 느낌의 재즈풍의 곡이었다.
‘남녀 듀엣으로 편곡한 건가? 좀 헷갈리는데.’
조금 더 들어보면 좋을텐데. 제작진은 칼같이 노래를 잘랐다.
하지만 인스트루먼트 트랙만 들어도 좋다는 게 확 와닿았다.
여기에 자신의 보컬이 올라가면 어떨지 궁금했다.
‘이게 천마 노래인가? 편곡 잘됐는데.’
라희가 고민하는 사이, 마지막 노래가 나왔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누구라도 어릴 적 한번쯤은 들어봤을 노래.
바로 ‘노파와 야수’ 주제가였다.
노파와 야수는 30년쯤 전에 나온 애니메이션이다.
이후에도 리메이크를 거듭하고 실사 영화도 나올 만큼 인기가 좋은 애니메이션.
보통 팝으로 편곡되는데, 천마가 선택한 건 전혀 다른 장르였다.
‘뭐야 이거? 디스코인가? 하우스?’
천마는 주간곡소리 실력을 십분 살렸다.
원곡의 구조는 남겨놓으면서도 신나는 파티 음악으로 바꾼 것이다.
상상도 못한 전개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게 바로 천마 노래구나!’
천마의 노래는 한번 들어도 누가 만들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흥겨운 리듬에 몸이 저절로 들썩인다.
'계속 듣고싶다.'
그 순간 노래가 뚝 끊겼다.
쳇.
제작진의 절단신공에 라희는 삐죽거리면서도 펜을 들었다.
‘무조건 이거다!’
고민 없이 1지망에 마지막 노래를 적은 라희는, 천마의 노래를 골랐다는 만족감에 미소지었다.
그렇게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주위를 돌아본 순간, 다른 사람들이 1지망에 적어뒀던 노래를 죽죽 그어버리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트로트 가수인 김연준까지도!
라희는 당황했다.
'아, 안 되는데?’
< 음악의 전당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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