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공으로차트올킬-72화 (72/191)

< 음악의 전당 (5) >

분명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는데.

별다른 생각 없이 책상을 두드리던 손끝에서 만들어진 박자는, 순식간에 하나의 곡이 되었다.

"와 이게 되네?"

옆에서 라희가 중얼거렸다. 신기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틀만 잡혀있던 곡은, 나와 라희의 감정에 따라 얽히고설키며 빈 부분을 꽉 채워나갔다.

만족스럽다.

단순히 곡이 잘 빠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게 다른 두 사람이 음악으로 일치되는 순간에서 느껴지는 교감.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 쾌감.

음악을 하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극이었다.

비유하자면 무공의 경지가 상승했을 때, 새로운 지평이 열렸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귀환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심음에 이른 후 무료했던 나에게 새로운 경험은 즐거운 자극이 되었다.

나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때는 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비명을 지르면서 다짜고짜 끌어안을 때는, 파트너를 잘못 선택했나 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아직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았지만, 수백 마디의 대화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생각, 감정, 열정 같은 것들을.

라희와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싶다.

그건 꽤 즐거운 작업이 될 듯하다.

“조금 더 다듬어 볼까요?”

“좋아요!”

우리는 오늘 하루 만에 모든 걸 끝낼 기세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편곡도 찰떡같이 마무리됐고, 본격적으로 무대 컨셉 회의를 시작했다.

구체적인 방향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다.

"최대한 웅장하게"

"최대한 화려하게"

나는 이번 무대를 2집 활동의 마무리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보면서 감탄할 수 있을 만큼의 임팩트를 주고 싶다.

라희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이번 무대로 재기를 꿈꾸고 있어서, 진짜 끝내주는 무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온갖 거대하고 멋있는 무대장치를 다 때려 박았다.

“회전 무대를 쓰죠.”

“좋아요. 근데 만약에 안된다고 하면 어쩌죠?”

“그러면 회전하는 리프트로 갑시다.”

배경과 안무는 화려하게.

“동화가 베이스니까 서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면 좋겠어요.”

"대규모 안무팀을 동원합시다."

“사운드가 빵빵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합창단도?”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모두 넣다 보니 리스트가 어느새 빽빽해졌다.

라희가 중얼거렸다.

“...우리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거죠?”

“피디님께 여쭤보죠.”

피디는 호쾌하게 웃었다.

- 하하하, 그럼요. 500화 특집이라 예산은 넉넉한데다, 이번에 진성 재단에서도 제작비 후원을 조금 받았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는데요?”

그럼 문제없겠네.

나는 씩 웃으며 조금 전 만든 리스트를 피디에게 넘겨주었다.

- 잠, 잠깐만요 천마님. 이걸 다 쓸거라고요?

*

한때 [빛태영]이라는 닉네임을 쓰던 직장인은 얼마 전 [빛천마]로 개명했다.

이제 군대에 간 한태영을 보내주고, 본격적으로 천마를 파겠다는 의지였다.

최근 대규모 프로젝트가 끝났지만, 그 여파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근무와 함께 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월요일 싫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직장인은 멈칫했다.

‘어차피 주말에도 일했는데, 월요일을 싫어할 필요가 있나?’

그녀는 표현을 정정했다.

회사 싫어.

무튼, 월요일이라 쏟아지는 일들을 꾸역꾸역 처리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그래도 이놈의 회사는 일이 빡센 대신 밥은 제대로 나온다.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와중,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며 주말에 본 예능에 대해서 떠들었다.

“혹시 주말에 <음악의 전당> 보셨어요?”

그러자 몇몇 동료들이 반응했다.

“저 봤어요. 500화 특집 말하는 거죠?”

“이번 특집 재미있던데요?”

<음악의 전당>이야 워낙 유명한 장수 프로그램이고, 최근에는 500화 특집을 한다며 기사를 빵빵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 봤던 사람이 꽤 있었다.

그렇게 화제가 음악의 전당으로 넘어갔다.

“다들 보셨나 보네요? 이번 특집 진짜 대박이더라고요. 저는 천마가 곡 만드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뭐? 천마?

음악의 전당을 보지 않아 가만히 듣기만 하려던 직장인은, 천마의 이름이 나오자 귀가 쫑긋해졌다.

“맞아요. 다른 사람들도 좋았는데, 천마는 진짜 다르더라고요.”

"나 그렇게 곡을 만드는 걸 처음 봤어요. 너무 신기하더라니까."

마침 동료가 직장인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빛나 씨가 천마 팬이라고 했죠? 지난번에 콘서트 다녀오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아요. 근데 아직 방송을 보지는 못했어요.”

직장인은 주말에 회사에서 일을 하느라고 보지 못했다.

다른 팀이라 주말 근무를 피한 동료가 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진짜 재미있었는데, 꼭 보세요. 어제 천마가 뭘 했었냐면···.”

꼭 보라면서 동료는 스포를 했다.

라희와 천마가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5분 만에 곡을 만들어냈는데, 그게 또 나중에는 어떻게 변했고···.

“아하, 재미있었겠네요.”

직장인은 적당히 맞장구만 쳤다.

그냥 적당히.

‘난 또 뭐라고. 평소에 했던 거 했네.’

천마가 곡을 빠르게 쓰는 건 이미 알고 있다.

5분이 뭐야, 그것보다 더 빠르게 뽑아내는 것도 봤다.

‘주간 곡소리에서 맨날 하는 게 곡 빨리 쓰는 겁니다.’

김이 팍 새버렸다.

뭔가 싶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직장인은 ‘천마가 천마했네’ 라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일하는 와중에 짬을 내서라도 천마의 클립을 봤겠지만, 오늘은 별로 급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봐야지.’

그래서 퇴근을 하고 샤워를 하고 식사까지 다 마친 그녀는, 그제서야 천마의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고 <음악의 전당>에서 편집한 클립을 찾아 틀었다.

그 순간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이게 뭐야?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천마는 기꺼이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어 주었다.

시작은 천마가 집중해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장면이었다.

천마가 기분 좋게 두드리는 손박자에 맞춰, 갑자기 라희가 노래를 시작했다.

합을 맞춘 것도 아닌데, 둘이 노래를 주고받더니 곡이 뚝딱 튀어나오네?

"?"

미친 거 아니야?

천마를 보면서 상식을 많이 깼다고 생각했는데, 천마는 또 상식 밖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단순히 신기하다는 단어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교감이라는 단어를 영상으로 보여주면 딱 저런 모습일까?

인상 깊은 장면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직장인은 잠시 영상을 멈추고 평소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들어가 봤다.

역시, 어젯밤부터 음악의 전당 얘기밖에 없었다.

- 내가 뭔데 울컥하냐

- 둘이 부르는 거 보니까 애니 장면 바로 생각나네

- 걍 둘이 주인공 시키고 실사영화 하나 찍죠

- 나 남자 좋아하는구나

- 하,, 나 또 이거 보고 있잖아

- 이 노래가 이렇게 신날 줄은 몰랐는데 존나 잘 어울려 빨리 무대해ㅠㅠㅠㅠ

-둘이 가장 잘하는 걸 하는데 조합 개꿀

- 두 사람 가둬두고 노래만 만들게 시키고 싶다

직장인은 댓글을 보며 웃다가 마지막 댓글에 대댓을 달았다.

ㄴ 1곡에 5분이니···한시간에 12곡. 내일 정규앨범 나오겠네요

'이제 마저 봐야지.'

영상은 이제 컨셉 회의를 지나, 무대 세트를 설치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시작은 제작진의 한숨이었다.

- 두 분이 말씀하신 거 하려면 돈이 엄청 깨질텐데.

그러면서 무대 제작 과정이 나온다. 일부만 보여줬는데도 직장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천마 님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제대로 만들려면 엄청 비싸서.

직장인이 당황했다.

‘여기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왜 나와···?’

- 회전 무대를 원하셨는데, 이 구도에서는 설치가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전 리프트로 대체했습니다.

‘뭘 하길래 회전을 해?’

- 나중에 구조물을 무너뜨린다고 하시네요. 그래서 무너뜨리기 쉬운 소재로 설치해야 합니다.

‘둘이 사랑을 나누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뭘 무너뜨린다고?’

직장의 눈이 핑핑 돌아갔다.

이어서 화려한 의상을 제작하는 의상 제작팀과, 군무를 만드는 대규모의 안무팀까지.

뭔가 엄청난 것이 나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500화 특집이 다가오고 있었다.

*

<음악의 전당> 기부 콘서트 당일.

어느새 앞서 세 개의 무대가 끝나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가 준비되는 사이 나는 무대 뒤편에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무대에 비해, 관객석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아무래도 기부 콘서트다 보니 방청객 외에도 초청 관계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포함해도 500명이 될까 했다.

그리고 한 쪽에 마련된 특별관람석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번에 후원하기로 한 병동 아이들인가 보군.'

나는 안력을 돋우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보호자까지 해서 20명 남짓한 적은 인원.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아픈 기색이 역력해서 누가 봐도 환우처럼 보였다.

그래도 볼이 발갛게 물들어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 젤리크러쉬 누나 짱 예쁘지 않음?

- 이따가 꼭 사인 받아야지

저들끼리 도란거리는 이야기를 훔쳐 듣던 나는 웃어버렸다.

퍽 귀엽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괜히 옛날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교에도 저런 아이들이 많았었는데.’

중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천마신교.

천마신교가 있는 천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사막도 인접해 있었다.

농사를 지어도 흉작이며 물건이 오가는 것도 어렵다.

식량은 만성적으로 부족하고 기본적인 물자들도 귀한 곳이었다.

‘내가 무림을 일통하면서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굶는 게 일상이고, 아파도 치료받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민을 느꼈다.

정파는 협과 의가 저희만의 것이라고 외치지만, 그건 틀렸다.

마(魔)에도 도리가 있으며, 나는 마도의 하늘에 다다른 자이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작은 온정을 베푸는 것은 지극히 천마다운 일이리라.

나는 본격적으로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수련을 거듭하여 훨씬 웅혼해진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이번 노래에 사람을 치유해주는 힘을 담을 것이다.

사람의 감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음파의 힘은, 아이들의 내부로 들어가서 신경세포를 재생하고 생체 에너지를 활성화한다.

‘내공 소모가 극심하겠지만 이번 무대 하나만 하면 되니까.’

효율적으로 제어하면 못 할 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잠시 분장을 고치고 온 라희가 내 옆에서 조잘댔다.

“와, 이번 무대는 뭔가 기대가 되는데요? 이거 노파 분장 좀 보세요. 진짜 잘되지 않았어요?”

나는 라희를 힐끗 보았다.

라희의 피부는 노파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이따가 미녀로 변신(?)할 때 찢어낼 수 있도록 가면 같은 걸 부착해놨다.

'인피면구 같군.'

특수분장 기술이 신기하긴 했다. 그런데 라희는 나를 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제 분장보다 천마 님 분장이 더 잘된 것 같은데요? 얼굴 좀 봐. 사람을 완전 야수로 만들어놨네.”

"......."

그야 분장이 아니니까.

라희는 나를 오밀조밀 뜯어보며 연신 감탄했다.

“몸은 또 어떻게 한 거래. 골격이 커졌는데요? 안에 뭐 넣은 거죠? 요즘 기술 진짜 좋아졌다.”

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사실 이건, 역용술이다.

< 음악의 전당 (5)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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