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음악방송 (5) >
나는 약속 장소인 호텔 VIP 라운지에 도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호텔도 진성 그룹의 소유이다.
VIP 라운지에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대리석이 쫙 깔려있었다. 딱 내 취향이다.
“미적 감각이 탁월하군.”
마치 무림에 있을 때 천마신교 교주전을 보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내 교주전은 흑오석(黑烏石)과 흑단목(黑檀木) 이용해서 만들었었다.
그때의 기억을 살려, 현대로 돌아와서 천마신교 레코즈를 설립할 때도 검은색 인테리어를 하려고 했는데···.
옥수진의 반대에 부딪혀 아늑한 느낌을 주는 목재 인테리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 라운지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김소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인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원이 내온 차를 마시며,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
그녀는 남의 대기실에서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저 김소현이에요.’라고 말하며 명함만 주고 가버렸다.
세상에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진성 그룹 회장의 장녀였다.
국내 문화예술계에서는 '한국의 메디치'라고 불릴 정도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술가를 지원하고, 음악회와 전시회를 유치하고, 복합예술시설을 건립하는 등 문화예술사업 양성에 힘을 쏟아 온 모양이었다.
내가 이번 만남에 응한 이유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진성 아트 스퀘어.
국내에서 손꼽히는 문화예술공간인 이곳에 내가 원하는 무대가 있었으며,
‘김소현이 바로 진성 아트 스퀘어의 주인이니까.’
<천마의 음악방송>을 런칭하기 위해 직원들이 동분서주하고는 있다지만, 가장 중요한 스튜디오 대관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음향학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공간.
기관진식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
그리고 장기 대관을 할 수 있는 여건까지.
내 조건을 들은 옥수진이 울상이 되었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하지만 오늘 김소현과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김소현이 뭘 원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날 부른 거라면 분명 음악과 관련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뭐. 이미 거래가 반쯤 끝난 거나 다름없지.
또각또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저 멀리 김소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돈된 모습으로.
다가온 김소현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콘서트 이후로는 처음이죠?"
커피를 주문한 김소현은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부 콘서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주제는 내 첫 콘서트 무대로 넘어가버렸다.
"엔딩 무대에서 야광 도료를 활용한 건 인상 깊었어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건가요?"
"딱히 영감을 얻은 건 없는데···."
그런데 이 사람 묘하게 나에 대해서 잘 안다?
김소현은 내 의아해하는 눈빛을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흠흠. 본론으로 넘어가죠. 이번에 진성 국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할 예정입니다.”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전시회? 음악회가 아니라?
김소현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줬다.
"천마 님이 전시회 테마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요약하자면 이랬다.
올해 말에 전시회를 열 예정인데, 테마별로 각기 다른 사운드트랙을 제공해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고 한다.
김소현은 그중 한 테마와 어울리는 곡을 내가 만들어 주길 원하고 있었다.
대중들이 미술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음악을.
'호오?'
나도 대관을 목적으로 이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웬만하면 열린 마음으로 요구를 들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김소현의 제안이 생각보다 구미가 당긴다.
미술과 음악의 연계라니.
지금까지 내 노래의 주제는 '사람'에 한정되어 있다.
나, 혹은 내 노래를 부를 사람.
최근에 했던 신선한 시도로는 드라마 OST가 있긴 한데, 그것도 검성이라는 캐릭터를 위한 주제곡이었으니까.
그런데 예술품을 보고 음악으로 만들라니.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나를 자극한다.
“제가 어떤 테마에 대한 곡을 만들면 되는 겁니까?”
나의 관심에 김소현이 슬쩍 웃으며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이번 테마에 들어갈 작품이에요. 아직 다 들어온 건 아니라 전체적인 느낌만 보시죠.”
태블릿 화면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나와 있었다
내 미술에 대한 배움은 고등학교에서 끝났지만, 이게 뭔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먼저 보이는 건 뭉크의 절규였다.
하지만 기존의 정신병 걸릴 거 같은 우중충함은 사라지고, 쨍한 형광으로 채색이 바뀌었다. 마치 우울함을 승화하려는 듯이.
이어지는 작품들도 전부 대중에게 친숙한 소재를 모티브로 했지만,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는 전혀 친숙하지 않았다.
변화와 파격.
나에게 맡겨질 테마는 기존의 상식을 부수고 있다.
악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화면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전혀 다른 멜로디가 들려온다.
규칙적이지 않고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지만,
이걸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은 꽤 흥미로울 것 같았다.
"재미있겠네요."
내 대답에 김소현의 미소는 더욱 짙어진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유의할 게 있어요.”
“뭐죠?”
“작업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심사에서 반려될 수 있어요. 전시회가 올해 말에 예정되어있으니까, 기간은 넉넉하게 드릴 수 있겠네요."
"아니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쪽은 기한이 넉넉할지 몰라도, 나는 한시가 급한지라.
“그냥 여기서 만들어드리죠.”
방금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거든.
“지금요?”
당황하는 김소현.
나는 김소현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라이빗한 방안.
악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조금 전까지 마시던 차가 담긴 유리잔.
그리고 고급스러운 목재 책상이 전부.
하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
김소현은 천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천재는 다르다는 건가? 자신감이 지나친데.'
김소현은 지금까지 후원을 해오면서 젊은 천재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봤고 또한 그들을 아꼈다. 그런 엘리트들이 차세대 예술계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마의 자신감은 과했다.
이 자리에서 곡을 만들겠다니.
'혹시 준비해온 게 있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악기는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작곡 프로그램을 실행할 노트북조차 꺼내지 않는다.
물론 김소현도 주간곡소리를 보았고, 천마가 빠르게 곡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주간곡소리에서는 적어도 프로그램이나 악기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곡이 나올리가 없지. 너무 성급했어.’
김소현은 판단을 내렸다.
눈앞의 젊은 청년에게는 이 제안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인 나머지···.
쨍-
"?"
천마가 티스푼을 들어 유리컵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페에서 종종 들리는 소음일 뿐인데, 오늘따라 유독 투명하게 들려온다.
김소현의 귀를 사로잡은 맑은소리는 어느새 하나의 비트가 되었다.
쨍- 쨍- 쨍-
규칙적인 비트가 뭉쳐 박자가 되고 리듬이 된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유리잔을 두드리는 소리다.
하지만 그 박자가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며 안정감을 만든다.
마치 박자에 진심인, 메트로놈의 +1, -1에 집착하는 클래식의 연주를 듣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김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천마의 손끝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내 천마의 손가락도 연주에 참여한다.
손가락은 유리잔의 아래쪽, 그러니까 마시다 남은 음료가 있는 부분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
새로운 소리가 추가된다.
조금 전까지 듣던 박자와는 다르다.
둔탁하고 짧은 소리.
톡- 톡- 톡톡-
하지만 이번 박자도 정확하다.
1초를 100개로 쪼개놓고, 그 사이에 박자를 끼워 넣으면 이런 게 가능할까?
마치 메트로놈 두 개가 다른 박자로 진자운동을 하는 것 같다.
박자의 향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리컵을 두드리던 천마가 이번에는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 밑에서는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로 다른 피치를 가진, 서로 다른 박자가 방 안을 채워나간다.
강렬하게, 각자의 존재감을 뽐낸다.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별것도 아닌 소리다.
그냥 유리잔을 두드리는 소리.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아니면 발 구르는 소리.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들을법한 그런 평범한 소리다.
‘...그런데 왜 이게 좋은 거지?’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이다.
별것 아닌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칙칙한 거리였다.
바닥에는 거무죽죽한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은 천편일률적일 뿐이다.
김소현은 잿빛으로 물든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선 다른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현대인이라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는데,
칙칙하던 거리에 갑자기 색깔이 채워진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바닥은 예쁜 분홍빛으로 변하고,
문을 탁 닫는 소리에 건물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그녀가 알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풍경.
하지만 김소현은 그 모습이 퍽 좋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hmm- hmmmm-
달콤한 허밍음이 들려온다. 어수선한 박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그 순간 맨홀 아래에서 바람이 휙 불어온다.
김소현의 치맛자락이 펄럭인다.
앗!
당황한 그녀가 치맛자락을 잡으려고 할 때.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천마가 있었다.
"아···."
김소현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더 듣고 싶다.
온통 엇박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선율.
유리컵과 나무 책상 대신 진짜 악기가 들어가면 얼마나 멋질까.
"좋네요. 굉장해요."
아직도 허밍이 귓가를 아른거린다.
당장이라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싶은 간질거리는 마음.
왠지 안달이 나서 김소현이 물었다.
“그래서, 다음 소절은 없나요?”
"다음 소절이 있기는 하죠.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김소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저도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저한테, 제안을···하겠다고요?”
김소현이 입을 쩍 벌렸다.
참 당돌하기도 하지.
자신이 직접 국제갤러리 전시회 스코어를 요청하는 건 엄청난 기회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며, 대중가요 작곡가 중 이런 경력을 쌓은 사람은 손에 꼽는다.
여기서 당연히 천마가 받아들일 줄만 알았는데, 되려 역제안을 하다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평소의 김소현이라면 기분 나빠하며 자리를 뜰 법도 한데,
“제안이 뭔지 한번 들어보죠.”
천마의 제안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왜인지 생각해보던 그녀는 그 이유를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천마는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방금 그 짧은 멜로디로 실력을 보여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매혹했다.
김소현은 인정했다.
천마의 노래가 마음에 든다는 걸.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걸.
천마에게 자신이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천마를 꼭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김소현은 천마가 무엇을 말하더라도 웬만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뭘 원하시나요?”
“아트 스퀘어에 있는 별관 하나를 빌리고 싶은데요.”
“...?”
*
대관에 성공한 <천마의 음악방송>은 정식으로 방송 일정을 공개했다.
새로운 음악방송을 원하던 수많은 관객이 방청 신청을 했다.
그중에는 진성 의료원의 교수도 있었다.
소아병동에서 근무하던 교수는, 아직도 기부 콘서트에서 아이들이 호전된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발견한 실마리는 천마로 이어지고 있었다.
< 천마의 음악방송 (5)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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