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미국행 (2)(수정) >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해변공원을 여유롭게 걸었다.
'내일 안토니오를 만나서 관광을 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푹 쉬어야지.'
얼마만의 여유인가.
미국에 있는 동안만큼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계속 쉴 거다.
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원을 거닐며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은잠술을 펼치지 않고 돌아다녀도 되겠군.'
예전에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은신술을 유지한 채 영화관에 갔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도 내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배경의 일부가 되어 이 느긋함을 즐길 뿐이다.
그때, 평화를 깨트리는 소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리 비켜!”
누군가 사람들을 밀치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도둑이야!”
“저 새끼 잡아!”
···얼마 만에 보는 소매치기인지.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무림에서는 손버릇이 나쁜 거지새끼들이 종종 있었다.
나도 처음 무림에 떨어졌을 때 몇 번인가 당하기도 했었고.
소매치기는 박스를 들고 필사적으로 뛰었고, 누군가 그 뒤를 열심히 쫓고 있었지만 모래사장이라 그런지 발이 푹푹 빠진다.
‘이러다가 놓칠 것 같은데? 조금 도와줄까?’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감회가 새로워지기도 해서 변덕을 부려봤다.
내공을 운용하여 천마군림보를 가볍게 밟았다. 내 몸은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그리고 절묘하게 소매치기의 앞을 막았다.
"Fuck off!"
소매치기는 나를 밀치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내 손이 훨씬 빨랐다.
-딱!
나는 소매치기의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음공을 이용한 기예 중 하나로, 듣는 사람의 기혈을 막고 근육을 꼬이게 만든다.
당연히 핀포인트 저격도 가능하다.
"아아아아악!"
소매치기는 다리가 꼬이면서 달리던 속도 그대로 굴렀고, 그가 넘어지면서 놓친 박스는 하늘에 붕 떠오르면서.
탁 -
내가 정확한 타이밍에 잡아냈다.
회수 완료.
“와우! 그레이트!”
“쿵후 보이!”
사람들은 옆에서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짝짝짝 쳤다.
나는 소매치기에게서 받은 물건을 뒤늦게 도착한 외국인에게 전해줬다.
외국인도 내 솜씨에 쌍따봉을 날리며 활짝 웃었다.
"땡큐 베리 머치!"
"노 프라블럼."
외국인은 정말로 고마워하면서 돌려받은 박스를 소중하게 들고 돌아갔다.
'근데 저건 무슨 박스인 거지?'
나는 저 박스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져서 외국인을 조금 더 지켜보았다.
확인해 보니 그 외국인은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던 버스커였다.
그리고 소매치기가 훔쳐 간 것은 그의 마이크였고.
장비를 옮기던 와중에 소매치기가 훔치기 좋은 사이즈의 박스를 들고 튄 것이다.
‘하마터면 버스킹 못 할 뻔했네. 저런 걸 훔쳐 가냐.’
나는 별걸 다 훔친다고 생각하면서 마저 산책을 했다.
해변을 따라서 나 있는 산책로를 걷다 보니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많았네.’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밴드 단위로 나와 합주를 보여주는 사람.
앰프 하나를 들고 와서 힙합을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노래와 악기 연주가 뒤섞인다.
통일성 없는 색들이 마구잡이로 도화지를 채워가는 건 정신없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게 또 나쁘지 않다.
나도 그 도화지 위에 나의 색깔을 그려놓고 싶다.
그 어떤 색깔보다 강렬하게.
‘한번 해 볼까?’
꽤 충동적인 생각이다.
버스킹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준비해온 악기는커녕 마이크나 앰프도 없다.
그러면 뭐 어때.
어차피 세상의 모든 건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파동.
사물 속에서 진동하는 가느다란 떨림.
세상과의 합주를 위해, 나는 자리를 잡고 진법을 설치했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버스킹이 시작되었다.
*
방금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버스커는 클럽의 DJ였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쉬는 날이라 버스킹을 하러 왔는데,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커스텀마이크를 잃어버릴 뻔했다.
“방금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기껏 나온 버스킹을 망쳐버리는 건 물론이고,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여자친구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으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아까 전 히어로처럼 등장한 청년을 떠올렸다.
소매치기 앞에 나타나서 순식간에 제압하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예전에 아시아 사람들은 다들 태권도라는 무술을 배운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진짜인 걸 오늘 깨달았다.
그는 기타를 치면서 되찾은 마이크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고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조금 전의 청년이 괜히 신경 쓰였다.
“감사 인사를 너무 대충 했나? 관광객처럼 보이던데 내가 도와줄 건 없으려나.”
버스커는 기타를 치는 와중에도 청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청년은 어느새 버스커의 시야 끝자락,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흠 거리면서 목을 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뭘 하려는 거지? 설마 노래를 부르려는 건가? 저 자리에서?”
이 공원이 버스킹 허가가 필요 없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청년이 자리 잡은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다.
동네 토박이인 버스커는 저쪽 구석으로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버스커의 몸이 움찔거린다.
“그래도 나를 도와줬던 사람인데. 가서 조언이라도 좀 해줘야 하나.”
버스킹을 하기에 좋은 포인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버스커는 뒤늦게서야 청년의 행색이 간소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타나 스피커는커녕 그 흔한 마이크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뭐야. 버스킹을 하려던 게 아니었나?”
그렇다고 저 자리가 관광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자리도 아닌데.
계속 신경 쓰던 버스커는 기타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청년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혹시라도 도와줄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청년의 행동은 버스커의 예상을 아득히 빗나갔다.
청년은 주변에 있는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몇 개 줍더니, 손으로 쓱쓱 문지르곤 주변에 그것들을 뿌렸다.
“...?”
가볍게 던지는 나뭇가지가 말뚝처럼 땅에 박혀 들어가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만, 청년의 행동이 버스킹과 전혀 관련이 없는 건 확실했다.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는 생각에 버스커가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 그러나
노래가 들려왔다.
사뿐사뿐, 가볍게 줄을 튕기는 듯한 목소리.
여기까지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소리를 건너와서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온다.
- 흔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처음 들어보는 나라의 말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장 해제되고 만다.
버스커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갔다.
그가 돌멩이와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청년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 백일몽 속으로
늘 보던 풍경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연한 파스텔 톤으로.
마치 부드러운 베일이 현실 위를 한 꺼풀 덮듯이, 기존의 풍경에 덧칠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악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버스커는 의아했다.
‘분명 악기는 없었는데?’
사실, 악기가 아니었다.
발 속을 파고드는 모래알 소리.
햇빛이 노골노골 내려앉는 소리.
세상이 들려주는 훌륭한 협주곡을 배경으로 삼아, 청년은 노래하고 있었다.
버스커는 어느새 관객 모드가 되어 빠져들었다.
- 그저 한낮의 꿈일 뿐
이윽고 노래가 끝났다.
버스커는 노래가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몽환적인 색감이 빠져나가며 현실로 되돌아온다.
"아!"
아쉬움에 버스커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자신과 비슷한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버스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천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버스킹 명당이 넘치는 이 해변 공원에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언어로 만들어진 노래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원 외진 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금방 끝나버린 노래에 아쉬워하면서도, 당연히 천마가 노래를 더 불러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제 슬슬 돌아갈까."
···천마는 그냥 일어났다.
"???"
버스커는 당황했다.
정말 이대로 갈 거라고?
그렇게 대단한 노래를 부를 줄 알면서, 정말 딱 한 곡만 부르고 갈 거라고?
그는 저도 모르게 천마를 잡았다.
"Oh, nononono. Stop!"
그러면서 들고 있던 기타를 불쑥 내밀었다.
"악기가 없으면 내가 빌려줄게요."
천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타? 나 줄거에요?"
"Of course!"
의사소통에서 어떤 오해가 생겼는지 모른 채 버스커는 해맑게 기타를 건넸다.
천마는 뜻밖의 선물에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기타를 받았다.
그걸 버스킹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우우우오어!
"가지마!"
"노래 계속 불러줘요."
"한 곡 더, 한곡 더, 한곡더!!!!!"
그 모습을 보며 천마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똑같다고.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는 건 한국이나, 샌프란시스코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간절한 시선을 즐기면서 기타를 잡았다.
시작은 가볍게 바디를 치는 것부터.
탁 탁 탁 탁
내공이 담겨서 유난히 경쾌한 소리가 관객들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한다.
흥을 못 이기고 벌써부터 몸을 들썩거리는 사람도 있다.
소리에 맞춰서 누군가는 손뼉을 치고 누군가는 발을 구른다.
그 가운데서 천마가 씩 웃었다.
"이번에는 신나는 노래로 가볼까?"
손가락이 현란하게 기타 위를 누빈다.
이전과는 다르게 빠르고 흥겨운 멜로디가 나오는 순간,
샌프란시스코의 해변공원은 파티장이 되었다.
*
버스킹은 만족스러웠다.
특히 처음 불렀던 노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건 다음 앨범에 넣어도 될 거 같은데.'
지금까지 냈던 앨범에는 악기를 파워풀한 보컬로 컨트롤하는 느낌의 곡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백일몽'이라고 이름 붙인 이 곡은, 악기를 최소화하는 대신 편안한 목소리로 노래를 채웠다.
마치 한낮에 꾸는 꿈처럼 한없이 여유로우면서도, 귀에 착 감기는 이지리스닝 노래였다.
‘2집 앨범을 낸 지도 3개월이 지났으니 슬슬 다음 앨범이 나올 때가 됐지. 자, 그러면 백일몽으로 스타트를 끊고···.’
이어서 곡 작업을 시작하려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아니야. 미국에서는 쉬어야지.’
직원들에게는 일하지 말고 놀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 놓고 사장이 일을 하면 직원들은 편하게 쉬질 못할 것이다.
곡 작업은 한국에서도 할 수 있다.
이왕 미국에 온 만큼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실컷 즐기다 갈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의 일정이 있다.
그토록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 안토니오와의 약속이 바로 오늘이다.
“마침 요즘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낸다고 했지.”
라고 무심결에 생각하던 나는, 내가 생각보다 안토니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토니오라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얼마 전 뮤지컬 영화의 안무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회의에 치를 떨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어떤 곡으로 어떤 안무를 만들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다.
2주마다 해오는 연락에, 나도 모르게 그의 일상을 주입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친밀감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Hey! 천마!”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남자.
곱슬거리는 흑금발에 오랫동안 무용을 해서 탄력적인 몸매.
안토니오 로시였다.
메시지에도 에너지가 흘러넘치더니, 실제로 보니 엄청 밝은 사람이다.
나도 안토니오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로시 씨. 드디어 보네요.”
“그건 너무 딱딱하잖아. 그냥 토니라고 불러요.”
안토니오의 일방적인 구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도 안토니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안토니오는 앨범 수록곡 말고도 주간곡소리에서 나온 곡으로도 안무를 만들었는데, 즉석에서 만든 내 곡에 안무가 붙어있는 걸 보면 신기할 때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안토니오가 내 노래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거다.
언젠가 이 사람과 함께 작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관광이 먼저지.’
나는 미국에 일하러 온 게 아니라 놀러 왔으니까.
통역사를 끼고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나이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고 꽤 통하는 부분도 있었다.
우리는 금새 예의와 격식을 던져 버리고 편하게 서로를 대했다.
“토니. 그렇게 미국에 오라고 했는데, 이번 관광은 맡겨도 되는거야?”
“하하, 당연하지. 여기는 내 앞마당 같은 곳이라고.”
“오, 그래? 그럼 어디부터 갈 생각인데?”
안토니오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LA하면 당연히 할리우드지.”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
내가 보았던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했다.
‘기대가 될 수밖에 없잖아.’
이게 진짜 제대로 된 관광이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안토니오를 따라 할리우드로 향했다.
.
.
.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할리우드에서도 일을 하게 된다.
< 뜻밖의 미국행 (2)(수정)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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