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미국행 (3) >
안토니오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할리우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저기 산 중턱에 걸린 'HOLLYWOOD' 사인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지금까지 본 유명한 영화들이 만들어진 스튜디오가 있는 곳까지.
‘마블 촬영장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미국에 오길 잘했네.’
오랜만에 머리를 비우고 휴식을 취하니 좋았다. 비어있는 머릿속으로 영감이 쏙쏙 들어올 것만 같았다.
통역사를 대동한 채로 함께 할리우드를 구경하던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발단은,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 지금 천마와 만나고 있다고요?
그는 요즘 안토니오와 작업 중인 영화의 감독이었다.
뮤지컬 영화를 찍고 있다는데, 이름이 사이먼 베일리였다고 했나?
-아···. 저도 한번 만나 뵙고 싶은데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 아니다, 마침 근처니까 그럼 이쪽으로 구경 오실래요?
전화를 끊은 안토니오가 물었다.
“천마, 액션스쿨 한번 구경해볼래?”
“액션스쿨?”
"아까 내가 하고 있다는 영화 기억나? 마침 지금 연습 중이라고 해서.”
뮤지컬 영화를 찍는데 웬 액션스쿨?
내 의아한 표정을 본 안토니오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이번에 준비 중인 <팬텀 스틸러>는 전형적인 괴도 스토리를 따라가는 뮤지컬 영화이다.
배경은 1900년대.
남자 주인공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탐욕스러운 재벌에게 뺏긴다. 이후 가보를 되찾기 위해서 재벌에게 접근하고, 그 와중에 재벌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가보도 되찾고 연인과의 사랑도 이루어지는 그런 이야기다.
엄청난 액션씬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클라이맥스에서 가보를 되찾은 주인공이 탈출하는 장면에는 고난도의 액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그 부분만 미리 연습하고 있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대한의 검성>을 떠올렸다.
‘설마 이번에도 가서 액션씬을 봐주게 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당시 촬영 현장에서 단체로 액션씬을 찍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뮤지컬 영화에서 어떻게 액션을 쓸지도 궁금하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재밌겠네. 거기도 한번 들러보자고.”
그렇게 도착한 액션스쿨.
그곳에서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배우가 연습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열중해서 연습하고 있길래, 나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때 할리우드에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언어가 귀에 꽂혔다.
“아니, 작곡가님. 여기에 웬일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한국어가 들려오는 쪽을 보았다.
정체는 <대한의 검성>을 찍었던 무술감독이었다.
지난번에 <대한의 검성>에서 해준 조언 덕분에 좋은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해왔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같이 작업해보자고 계속 찔러보길래 그냥 씹었다.
이곳에서 한국인을 만날 줄은 몰랐던지라 나도 얼떨떨해졌다.
“저는 사이먼 감독님이 한번 보자고 해서 왔습니다. 감독님은 여기에 무슨 일이세요?”
그는 정말 반가워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저야 일하러 왔지요. 여기 무술감독이 홍콩 출신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저는 서브로 들어와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부르신 거면··· 혹시?”
순간 지난번에 <대한의 검성>에서 하마터면 액션씬을 전부 다 수정해줄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딱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관광하러 왔어요.”
“아, 관광이시구나.”
무술감독은 아쉬워하면서도 여기에 합류한 과정을 설명해줬다.
전작인 <대한의 검성>이 화려한 액션씬으로 호평을 받았고, 그걸 커리어로 이번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지금 무술을 맡은 홍콩 출신의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임파서블 태스크’를 찍은 사람이라서, 이번 기회에 할리우드에도 한발 걸쳐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마 님은 진짜 이쪽 재능이 타고나신 것 같은데. 혹시 무술은 어디서 배우셨나요? 혹시 액션스쿨 출신이신가요?”
“액션스쿨은 처음입니다. 무술은 산에서 배웠어요.”
천산에서 배웠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도 액션씬은 진행되고 있었다.
해당 장면은 <팬텀 스틸러>의 하이라이트 씬이다.
유명한 괴도가 된 주인공 팬텀.
팬텀은 저택에 침입해서 가보를 들고 도망치던 도중, 저택 경비원과 추격씬이 진행된다.
마지막 담장만 넘으면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데, 하필 그때 팬텀에게 많은 경비원들이 따라붙는다.
팬텀은 그들을 가까스로 물리치고 담장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담장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주인공과 사랑을 확인한 후 떠난다···는 것이 이 장면의 주된 흐름이다.
서브 무술 감독이 은근슬쩍 물었다.
“천마 님이 보기에 어떠신가요?”
“나쁘지 않네요. 치열하고, 처절하고, 비장미 넘치고.”
물론 내 부하 놈들이 저딴 식으로 동작을 낭비하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겼겠지만, 이건 영화니까. 뮤지컬 영화치고는 합이 잘 맞아서 CG까지 입혀지면 볼 만 할 것 같았다.
그러자 서브 무술감독이 토로하듯이 말했다.
“그렇죠? 근데 그게 문제에요. 너무 치열하고 처절해서.”
“왜요? 싸움은 그래야 제맛 아닌가요?”
“이게 액션이 아니라 로맨스가 서사의 중심이거든요. 여기서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다 보니 다음 씬과 연결성이 좀 떨어지네요.”
요약하자면 이랬다.
다음에 나올 장면은 주인공이 마침내 담장을 넘고 여주인공과 사랑을 확인한 후 떠나는 엔딩 장면이다.
그런데 방금의 액션이 너무 비장해버리면 이어지는 장면과 괴리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수십 명과 칼부림을 하고 바로 로맨스라.
안 어울리기는 하네.
“그래서 좀 가벼웠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서브 무술감독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본다.
“......”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그때 우리의 얘기를 듣던 메인 무술 감독이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그걸 왜 일반인에게 물어봅니까?”
조금 삐딱한 말투였지만,
“어휴, 보통 분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몇 번이나 말한 <대한의 검성> 하이라이트 씬을 찍는데 도와주신 분입니다.”
<대한의 검성>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래요? 그럼 당연히 환영이죠. 그럼 한번 보여주시죠.”
“???”
갑자기?
황당한 내 표정을 본 안토니오도 한마디 했다.
“허공에서 몸을 여덟 번 뒤집던데, 그것도 한번 보여주는 건 어때?”
마지막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사이먼 감독마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장면을 천마 님이 자문하셨다고요? 호오. 궁금하군요.”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어째 미국에 오니까 무공을 더 많이 쓰는 거 같다?
그래도 어려운 건 아니니까 한번 시범만 보여주기로 했다.
나는 원래 주인공이 서던 자리에 왔다.
앞뒤로 경비원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둥글게 포위하고 있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만 수십 개가 떠오른다.
나는 서브 감독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그러나 팬텀처럼.
그러자 수십 가지의 경로 중에서 하나의 길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보법을 밟았다.
유령이 지나가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내 발걸음은, 천마신교 호법들에게만 전해지는 유령신보이다.
“???”
“어어?”
“잠깐만!”
경호원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 스턴트맨들은 원래 동작보다 더 과격하게 움직였지만, 내 몸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빈 공간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에서는 이전의 비장미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유쾌하고 시원시원해진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제치고, 마지막 사람의 어깨를 발판 삼아 어기충소의 묘리를 이용해 하늘 높이 도약.
원래라면 여자주인공이 던져주는 밧줄을 잡아채고 담장을 넘어야 하지만, 그런 것도 없이 바로 담장(처럼 설치된 구조물)을 넘어가 버렸다.
“대충 이 정도면 됐죠?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시죠.”
“?!?!?!?!”
사이먼 감독은 입을 쩍 벌렸고, 안토니오는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날뛰었으며, 날 잡으려고 헛손질을 한 스턴트맨도 깜짝 놀랐다.
“...방금 내가 뭘 본거지?”
홍콩 감독은 펄쩍 뛰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 흥분했는지 영어가 아니라 홍콩어를 썼다.
“혹시 소림사 출신입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본좌를 감히 소림 땡중들이랑 비교해?
*
사이먼 감독은 당황했다.
‘뮤지션 아니었어?’
그런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예사롭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사이먼이 본 액션 중에 최고였다.
방금 천마가 휘리릭 몸을 놀리는 장면은, 마치 주인공인 괴도 ‘팬텀’이 유령처럼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장면을 시그니처로 홍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심지어 이어지는 장면도 여주인공과 사랑을 확인하는 클라이맥스니 딱이지!
사이먼 감독은 옆에서 ‘보법이 어쩌고’ 설명을 곁들이고 있는 천마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만나자고 하길 잘했군.’
원래도 사이먼 감독은 천마를 좋아했다.
안토니오처럼 열성적인 팬은 아니지만, 사이먼이 보기에 천마는 천재였다.
그들의 천재성은 언제나 영감을 준다.
관광차 들렀다고 하는데, 좋은 씬까지 만들어주고 가서 고맙기도 했다.
‘역시 자문료를 드려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사이먼 감독은 방금 완성된 하이라이트를 떠올렸다.
저택 내부에서 가보를 되찾으면서 긴장감이 시작되고, 저택 내부에서부터 숨 막히는 추격씬이 이어지면서 한층 무거워진다.
원래라면 마지막 담장 탈출씬에서 경비원들을 나이프 파이팅으로 모조리 쓰러뜨리려고 했는데, 천마가 바꿔준 장면이 백만 배쯤 더 낫다.
경비원들이 닭 쫓던 개가 되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니 더없이 호쾌하다.
덕분에 여주인공과 사랑을 확인하는 로맨스가 나오기 전에, 그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었다.
모쪼록 천마 덕분에 목적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액션씬이 탄생했다.
전체적인 영화의 톤과도 훨씬 더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원래 이 장면에 배치하려고 했던,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프로덕션 넘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음악감독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귀가 밝은 차선우는 사이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망갈까?’
하지만 자신을 안내해야 하는 안토니오 로시가 잡고 놔주질 않았다.
유령신보를 보고 영감이 떠올랐다며 창작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액션스쿨에 발이 묶여버린 차선우는 그대로 음악감독까지 만나게 되었다.
“헤이, 반가워요. 방금 오면서 사이먼이 보내준 영상 봤어요. HOLY MOLY!”
호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음악감독은, 소개가 없었다면 레슬링 선수인 줄 알았을 뻔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2미터쯤 되는 커다란 키에, 외공을 익힌 것처럼 터질 것 같은 근육.
“감사합니다. 몸 좋으신데요?”
음악감독은 눈을 찡긋했다.
“사실 미식축구 선수가 되려고 했는데 부상때문에 이쪽으로 전향했습니다.”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도 지난 70년간 몸 쓰는 일(?)을 하다가 최근에 음악으로 전향했는데.
아무튼.
마침 관계자가 전부 있었기 때문에 액션스쿨에서는 곧바로 회의가 벌어졌고, 나도 얼떨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음악감독이 기뻐하며 말했다.
“장면 간의 연결이 훨씬 자연스러워졌어요. 이 부분을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고민이었는데, 액션 하나 바꾼 걸로 다 해결되다니!”
그는 이 장면에서 곡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마침내 실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음악감독은 이참에 노래를 들려주었다.
원곡은 낮은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애절한 선율을 통해 주인공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자문을 맡게 됐지만, 즉흥적인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열정적인 음악감독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몸도 들썩인다.
시놉시스도 읽지 않았지만, 이번 장면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들었고 액션씬도 내가 직접 수정했다.
그래서인지 바로 떠오르는 악상이 있었다.
“주인공이 담장 위에 올라간 순간, 레치타티보로 노래를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뒤에는 이런 리듬을 살짝 깔면서.”
나는 가볍게 흥얼거렸고 음악 감독은 바로 알아챘다.
“칼립소 리듬!”
“그렇죠. 독백에서는 옅게 깔고, 칼립소 리듬으로 테마를 이끌어가다가 여주인공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변주를 줘도 좋겠네요.”
음악감독과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
나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던 음악감독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면 B테마로 이어질 때는 코러스로 악기를 대체해서 사운드를 풍성하게 해도 되고···오오!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군요. 이제야 윤곽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미소 지었다.
“저는 작곡가입니다. 가수이기도 하고요.”
“...? 액션 자문 아니었어요?”
왜 그렇게 놀라?
그쪽도 몸 쓰다가 왔잖아?
*
천마가 얼렁뚱땅 뮤지컬 영화 제작에 합류하는 사이, ‘샌프란시스코 버스킹’ 영상은 뉴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 WHO IS THIS GUY?
< 뜻밖의 미국행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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