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미국행 (4) >
지난 해변공원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던 버스커.
그는 클럽의 DJ이기도 했다.
DJ는 천마에게서 마이크를 구원받았지만, 그 대신이랄까?
천마에게 기타를 뺏겼다.
그날 천마의 버스킹에 푹 빠져버린 나머지 기타를 되돌려달라고 말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마는 기타를 들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기타를 잃어버렸다는 아쉬움보다, 천마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 더 컸다.
‘젠장. 그때 영상이라도 찍었어야 했는데!’
물론 당시로 되돌아가도 무대에 빠져 영상을 찍는 걸 잊을 테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하지만 어디에든 좋은 걸 보면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DJ가 그토록 바라던 일을 대신 해주었다.
샌프란시스코부터 퍽킹 버스킹까지, 여러 개의 키워드를 검색하던 DJ는 마침내 한 영상을 발견했다.
[San Francisco bay Park BUSKER - WHO IS THIS GUY?]
‘역시 뉴튜브! 없는 게 없다니까.’
시작은 DJ가 맨 처음 들었던 노래의 중반부부터였다.
영상을 올린 사람은 친절하게 한국 가사까지 영어로 번역해서 자막으로 달아주었다.
-그러나 흔한 리듬에 몸을 바치고
백일몽 속에 나를 가두고
‘아,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당시에는 가사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번역된 가사를 보니 곡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저 한낮의 꿈일 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정오.
환상처럼 들려왔던 세상의 합주는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숨소리가 나직이 섞여 마음이 편안해진다.
재생목록에 넣어두고 무한반복 하던 그는, 문득 천마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노래 진짜 잘 부른다. 가수인가?’
그 정체를 궁금해하는 건 DJ뿐만이 아닌지, 댓글들은 대부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 가수인가? 아는 사람 없어?
- 한국 가수는 잘 모르지만 노래는 참 감미로워
- 난 어제 공원에 있었어 이 영상을 올려준 사람에게 행운이 있기를
- 이게 케이팝?
- 오··· 그래서 누구라고?
DJ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든 댓글을 읽어봤지만, 아직 정체를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영상이 올라온 지 2시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DJ는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지? 가수인 거 같은데, 이런 실력이면 분명히 유명할 거야.’
DJ는 한국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갔다.
차트의 맨 위부터, 일일이 가수들을 검색해서 비교 대조해봤다.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마의 노래가 차트 최상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 처온마? 천?”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천마의 이름을 불러본 DJ는 이 사람이 한국에서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라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뉴튜브 채널이 있었잖아!”
[BJ 음공천마]
데뷔 이전부터 꾸준히 영상을 올리는 채널인데, 구독자가 400만 명이 넘었다!
채널에 들어가니 마침 천마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는 중이었다.
방송은 한국어로 진행되고 있었고, 댓글도 대부분 한국어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조금씩 영어 댓글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처럼 버스킹을 보고 유입된 사람이 있는 듯했다.
방송 안에서, 천마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를 내고 있었다.
- 외국 댓글이 많아져서, 트로트를 팝으로 바꿔야 한다는 건 무슨 개소리야?
시청자들이 후원을 많이 해주는데 왜 화를 내는 거지?
DJ는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게 처음으로 아쉬웠다.
‘영어 자막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워하던 와중,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어!”
마이크를 선물해준 여자친구였다.
그의 여자친구는 가수이다.
데뷔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실력은 있어서 캘리포니아주 내의 지역 방송에 자주 나가면서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DJ는 천마의 방송에서 시선을 겨우 떼고 여자친구를 돌아봤다.
“왔어? 오늘 방송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저녁에. 어?????”
여자친구는 DJ의 휴대폰 화면을 보더니 놀랐다.
그녀의 시선이 천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DJ는 이 사람이 바로 소매치기를 잡아준 그 남자라고 설명해주려는데,
“얘 걔잖아! 이름이 뭐더라. 그, 그···천? 첸?”
여자친구가 먼저 알아봤다.
DJ는 당황했다.
그가 몇 시간 동안 정보의 바다를 탐험하여 얻은 내용을, 여자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유 노우 천마?”
“그래. 천마! 당연히 알지! 너야말로 둠 챌린지 몰라?”
“?!?!”
.
.
.
버스킹 영상을 본 사람들은 결국 이 버스커의 정체가 ‘천마’라는 한국의 가수라는 걸 알아냈다.
비록 그들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천마를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보는 사람은 없다.
버스킹으로 유입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천마의 채널 구독을 눌렀다.
그리고 천마 채널은 요즘 강여름이 관리한다.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강여름은 최근 유난히 외국인 댓글이 많이 달리는 걸 발견했다.
- cheonma? looks hot as fuck (천마? ㅈ나섹시해)
- song name?
- do u know where i can find this? (노래 어딨냐?)
ㄴ not released :< (발매안됨ㅠㅠ)
ㄴonly on newtube (뉴튜브에만 있음)
“뭐지? 외국인이 많이 유입됐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던 강여름은,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거기서 천마가 버스킹을 하고 있네?
심지어 그사이 새로운 곡 작업을 했던 건지, 그녀의 취향을 저격하는 이지리스닝의 가벼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강여름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한테는 일하지 말라더니!”
신신당부하던 천마는 혼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
천마는 어느새 음악감독의 작업실에서 뮤지컬 프로덕션 넘버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음악감독인 브랜든 킹.
그는 앞선 작업 현황을 공유해주었다.
“남자 주인공 팬텀의 테마에는 브라스를 사용해서 무게감이 있는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여자 주인공은 재벌집 딸의 사랑스럽고 밝은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플루트를 메인 악기로 삼았죠.”
“확실히 두 소리가 대비 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네요.”
팬텀은 브라스, 여자 주인공은 플루트, 팬텀의 조력자는 글로켄슈필.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악기를 하나씩 정해놓고 그 위에 구성을 덧댄다.
그러려면 음악과 동작, 스토리, 목소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킹 감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큼 섬세한 작업이라 시간이 오래 걸려요. 좀처럼 떠오르지 않을 때는 밤을 새워요. 그렇게 멍때리면서 밤을 꼬박 새우고 나면 아침 10시쯤에야 뭔가 생각나기 시작하죠.”
차선우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떠올렸다.
‘내가 저렇게 치열하게 고민했던 게 언제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최근 음악을 만들면서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상상하는 심상은 언제나 완벽한 멜로디로 구현되니까.
‘예전에는 나도 저렇게 고민했던 거 같은데.’
무림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신을 갈아 넣고 매 순간 투쟁했다.
그때는 그게 무척 어렵고 힘들었는데.
산을 깎아 내고, 계곡을 모두 메워 버리니, 이제는 평지밖에 남지 않았다.
평탄하고 평탄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배부른 소리인 거 같기는 한데, 모든 게 쉬워진 지금이 되니 킹 감독처럼 힘껏 달려보고 싶다.
차선우는 물었다.
“그럴 때 뭔가 생각나면 기분이 어때요?”
킹 감독은 씩 웃었다.
“말해서 뭐해요. 죽여주죠.”
그래.
차선우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자신이 사실 뭘 찾고 싶었는지 조금은 깨달았다.
그건 신선한 자극이나 새로운 흥미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고, 마침내 성취하는.
그 빛나는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마침 새로운 과제가 놓여 있다.
킹 감독이 말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콘티와 러프 영상을 계속 봤는데도 감이 오지 않았거든요? 뭔가 애인이랑 밀당하는 느낌?”
세상 모든 자극에서부터 무던해진 차선우에게, 뮤지컬 음악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새롭게 탐구할 분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차선우가 대답했다.
“밀당을 이쯤 했으면 슬슬 연애도 해야죠. 독창 부분은 어제 얘기가 끝났으니, 이제 이중창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만들어 볼까요?”
곡의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프로덕션 넘버는 주인공 팬텀에 독창으로 시작한다.
팬텀이 담장 위에 올라서 우왕좌왕하는 경비원을 내려다보며, 모든 걸 마침내 이루었다는 선언을 시작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독창.
이 독창은 이후 여자 주인공으로 만나면서 이중창으로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다른 조력자까지 나오면서 합창과 군무로 넘어가는 점층적 구조이다.
먼저 킹 감독이 말했다.
“여자 주인공을 만날 때 사랑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표현하고 싶어요.”
“좋아요. 그런데 여자 주인공의 테마 악기가 플루트라고 했던가요?”
“맞아요. 플루트를 메인으로 밀기엔 마냥 청아하고 맑기만 해서 고민이에요. 조금 더 설레는 느낌을 주고 싶은데.”
이제 막 사랑을 완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직전에 그 설렘.
딱 그가 무림에서 돌아와서 음악 방송을 처음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그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악기가 생각났다.
“벨을 추가하는 건 어떨까요? 신디사이저 벨 계열의 음색이 나오면 좋을 거 같은데.”
그러면서 차선우가 기계를 조작하여 생각하던 음을 재생해본다.
흘러나오는 벨에 차선우가 허밍으로 가볍게 가이드를 한다.
킹 감독이 휘파람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PERFECT! 그런데 조금 밋밋한데. 추가할 게 없을까?”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른다.
새로운 지평을 넓혀 가는 느낌이다.
차선우는 이 분위기에 기꺼이 몰입하기로 했다.
“4분의 4박자가 기본이지만, 팬텀과 여주인공이 번갈아 노래를 부를 때는 박자감을 좀 다르게 가져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좋은 아이디어야. 그것만으로도 훨씬 리드미컬 해질걸.”
어느새 두 사람은 맥주를 손에 하나씩 들고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 회사 아티스트의 지론. 예술을 하려면 무조건 술이 들어가야 한다!”
“그 친구 왠지 나랑 잘 맞을 거 같은데? 나는 이 넘버 만드는 데 최소 반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한 달도 안 돼서 끝날 거 같아.”
글쎄 한 달이나 걸릴 거 같진 않은데.
차선우는 미소 지었다.
그날 밤, 곡은 얼추 완성되었다.
물론 완벽하게 만들려면 좀 더 작업이 필요하지만, 디테일한 것까지 끝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천마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건 따로 연락해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앞서, 사이먼 감독과 홍콩인 무술감독, 음악감독까지 세 사람이 모였다.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부분이 기가 막히게 나와서인지 세 사람의 표정은 모두 싱글벙글했다.
천마가 만든 액션씬 러프 영상에 음악을 입혀봤는데, 싱크가 딱 맞아떨어지면서 실제로 찍으면 명장면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을 다 같이 감상한 후 사이먼 총감독이 감탄하며 말했다
“천마 님은 천재가 분명하네요. 연출에 감각이 있더라고요. 이 장면을 이렇게 살릴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홍콩 무술감독도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천마 님은 무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요. 방금 그 몸놀림 보셨습니까?”
음악감독도 한마디 거들었었다.
“어제 다들 직접 작업하는 거 보셨죠? 뚝딱 노래 하나 만들어 내는 거 보고 천재가 뭔지 느꼈습니다.”
한 마디씩 뱉은 그들은 멈칫했다.
천마에 대해 칭찬하는 포인트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먼저 홍콩 무술감독이 발끈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천마님은 무술에 재능이 있죠. 제가 보기에는 정통 무술 제대로 배운 사람입니다. 예전에 이소범이라고 홍콩의 유명한 액션 배우랑 작품을 찍었는데, 그 사람보다 더 뛰어나요. 분명 액션 배우로 크게 성공할 겁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이전에 <대한의 검성>을 찍은 서브 감독이 천마에게 작업을 같이하자고 졸라 댔다면, 홍콩인 무술 감독은 아예 자기가 영화를 찍을 테니 거기에 배우로 나와달라고 했다.
- 미쳤어요?
물론 천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음악감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이 천마와 함께 작업을 못 해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나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국가 보물이에요. 그걸 다른 데에 쓰는 건 재능 낭비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딱 봐도! 체육계 인재잖아요. 지금 우리가 음악계에 인재를 잠깐 맡긴 겁니다.”
이내 음악감독도 코끼리 다리처럼 굵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답답하네. 저 정도면 수십 년은 음악을 하다 온 사람이라고. 20대 청년이 저 수준에 오르는 건 재능이고 축복이야!”
“하! 웃기는 소리. 수십 년 무술을 한 사람도 저런 보법은 못 보여줘. 그쪽이 소림사는 가봤어? 거기 방장이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재능이라고.”
그리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사이먼 감독 혼자서 영상을 다시 돌려봤다.
‘이번에는 명작 하나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사이먼은 영화감독이 아닌 평론가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달랐다.
캐스팅도 원하는 대로 다 됐고, 극본도 잘 뽑혔고, 음악까지 잘 나왔다.
자신이 없었다.
못 만들 자신이.
두 사람이 여전히 싸우는 가운데, 사이먼 감독의 머릿속에서는 슬그머니 아카데미 수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
3집 앨범에 들어갈 백일몽.
천마는 백일몽과 페어를 이룰 노래를 만들었다.
Nightmare (악몽).
백일몽의 테마를 정반대로 뒤집어 만든 곡으로, 백일몽과 함께 3집의 더블 타이틀 곡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백일몽은 버스킹 영상으로 알음알음 해외에서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만든 Nightmare는 백일몽과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시작은 안토니오 로시와의 공동 작업이었다.
< 뜻밖의 미국행 (4)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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