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 더 쓰시죠? (1) >
헌트 뮤직 그룹은 헌트 픽처스에서 계열분리된 회사이다.
모기업인 헌트 픽처스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영화 제작사였다.
원래 헌트 뮤직은 OST를 비롯한 영화 음악을 관리하던 사업 본부였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음반사를 몇 개 인수·합병하면서 헌트 뮤직 그룹이 탄생하였다.
헌트 뮤직 그룹은 출범 이후 공격적인 투자와 확장을 통해서 3대 음반사에 올랐으나, 기존에 있던 로페즈 뮤직 그룹에 비해서는 한 끗발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헌트 뮤직은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한국에 있는 유명한 기획사와 제휴를 맺고 다양한 음악 콘텐츠들을 선점할 계획을 세운 상태이다.
물망에 오른 건 한국을 대표하는 걸그룹인 ‘위캔걸즈’를 가지고 있는 아크 엔터테인먼트.
아크 엔터테인먼트와 협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헌트 뮤직 대표의 눈에 천마가 들어왔다.
시작은 로페즈 회장이 천마의 방송에 직접 나타나서 후원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리 딸이 얽혀있다고 해도 그렇지, 로페즈 이 양반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깐깐한 로페즈 회장의 눈에 든 걸 보면 천마에게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헌트 뮤직의 대표도 천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확인해보니 천마와 헌트 뮤직의 접점은 생각보다 많았다.
먼저 한국 지사에서는 드라마 대한의 검성 OST를 유통했었다.
그때 천마가 작곡한 타이틀곡 ‘눈물겨워 하노라’가 미국 디지털 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었다.
또한 모기업인 헌트 픽처스에서 제작하고 있는 뮤지컬 영화 ‘팬텀 스틸러’에도 천마가 연관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씬의 프로덕션 넘버에 작곡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한국 작곡가 중에서는 특별한 커리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까다로운 로페즈의 눈에 들기에는 부족하다.
‘왜 로페즈가 직접 후원을 날린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지켜보던 중, 썸머 페스타 사건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관중을 휘어잡고 페스티벌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천마를 보며, 헌트는 로페즈가 천마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는지 깨달았다.
로페즈 뮤직도 아시아 시장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마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면서도, 현지 시장에 국한되는 걸 넘어서 미국으로 역진출할 수 있는 카드였다.
헌트 뮤직의 대표도 천마가 탐이 났다.
‘천마신교에 투자를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천마 측도 정규 앨범을 글로벌 시장에 유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고.’
헌터 뮤직에 대표는 천마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SNS에서 페니가 천마와 식사를 하는 사진을 올린 걸 발견했다.
룸으로 운영되는 최고급 식당은 로페즈 회장이 종종 찾는 곳이다.
‘뻔하군. 여기 로페즈 회장도 같이 있는 게 분명해.’
로페즈 측에서 먼저 침을 바르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남이 침 좀 바른 거라도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무엇보다 로페즈가 탐내는 천마를 뺏어올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헌트의 대표는 즉시 식당으로 출발했다.
*
로페즈 회장은 천마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천마가 마음에 들었다.
로페즈 뮤직 그룹은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제일 잘 먹히는 만큼, 한국에 아시아 총괄을 두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음반 제작이라는 게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가진다.
음악은 미학적인 상품이다. 당시의 문화나 대중의 소비적 취향이라는 까다로운 조건변수가 언제나 존재한다.
로페즈는 그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검증된 카드를 원했다.
‘원래라면 펄 엔터테인먼트와 제휴를 맺으려고 생각했는데.’
펄 엔터의 제이맨이 키운 매그넘은 생산력이 증명된 아티스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천마라는 선택지가 등장해버렸다.
음악적인 역량은 말할 것도 없다.
로페즈 회장은 천마가 수천 명의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본 순간 확신을 얻었다.
천마는 무조건 먹힌다고.
그의 음악은 언어를 초월해 사람의 근본적인 걸 건드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마에게는 음악적인 역량 말고도 스타성이 있지.’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천마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말 몇 마디로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일?
그게 쉬운 일이면 시큐리티가 왜 있겠는가.
‘나랑 같이 가볼래?’라는 한마디로 사람들을 모두 자기 무대로 끌고 가버린 일?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마케팅팀이 왜 있겠는가.
그런데 천마는 그 일들을 쉽게 해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천마는 본능적으로 대중을 휘어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저 나이에 음악성과 스타성을 모두 겸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로페즈 회장은, 어느샌가 대화가 끊겼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천마와 페니는 식사를 모두 마치고 디저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페즈 회장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때, 천마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시험은 어땠나요? 결과가 궁금한데.”
로페즈는 차선우가 대놓고 시험을 운운할 줄은 몰랐다.
허를 찔린 기분이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차선우에게는 자격이 있으니까.
“크흠. 시험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훌륭했네. 특히 썸머 페스타의 후원자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군. 축제에서 사고가 일어날 뻔한 걸 막아줘서 고맙네.”
차선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그도 이번 축제로 얻은 게 많으니까.
"별말씀을. 그럼 이제 비즈니스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차선우는 손깍지를 끼며 로페즈 회장을 바라보았다.
"저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로페즈 회장은 이번에도 차선우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번 차선우가 마음에 드니 이런 당당한 모습도 마음에 든다.
원래라면 차선우가 먼저 유통 계약을 제안하도록 대화를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결국 로페즈 회장의 입에서 용건이 먼저 나왔다.
“자네 회사에 투자를 하고싶네.”
로페즈 회장은 선급 투자를 제안했다.
기획사는 가수라는 자원을 발굴하고 훈련시킨다.
거기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니, 음반 제작사는 가수가 낼 음반 예상 판매량에 해당하는 선급금을 미리 지급한다.
기획사는 선급금으로 좋은 퀄리티의 앨범을 제작하고, 음반 제작사는 독점 유통권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로페즈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차선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은 제안인데?’
차선우는 지금 정규 앨범을 준비 중이다.
뮤지션에게 '정규'라는 타이틀이 주는 의미는 크다.
특히 페니의 앨범 프로듀싱을 통해 미국에서는 어떻게 작업하는지 경험해보니, 더 완벽을 기하고 싶다.
세계적인 세션 팀과 사운드 엔지니어를 데리고 와서 사운드의 퀄리티를 높이고, 유통 쪽에서는 로페즈의 힘을 빌린다.
로페즈 뮤직 그룹은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유럽 등 해외에 있는 지사를 통해 전 세계로 유통할 수 있다.
또한 차선우는 정규 앨범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신인 그룹을 데뷔시키려고 하는 만큼 투자금은 많을수록 좋지.’
차선우가 그럼 제안서를 보내달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최고급 와인을 들고서.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옆 방에서 와인을 선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음? 와인을?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누가 보낸 거지?”
“헌트 대표님이 보내셨습니다.”
“...헌트 대표가?”
헌트와 로페즈는 좋게 말하면 경쟁자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앙숙이다.
로페즈 회장이 중얼거렸다.
“그놈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안거지?”
그 말에 페니가 움찔했지만 생각에 잠긴 회장은 다행히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천마에 대한 투자 건을 빠르게 진행하려고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 자리에 갑자기 와인을 보내는 헌트의 속셈이 눈에 훤히 보인다.
분명 자기도 한 다리 걸쳐보겠다고 하는 심산이 분명하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 이 와인은 다시 돌려보내게.”
로페즈가 거절을 하는 순간, 매니저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아두지 그러시오. 나도 같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헌트 뮤직 그룹의 대표였다.
*
나는 갑자기 시작된 기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방송이 아닌 곳에서 배틀을 볼 줄은 몰랐는데.’
눈치를 보던 페니는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도망가버렸고, 헌트 대표는 와인을 빌미로 자연스럽게 방에 들어와선 페니가 앉았던 의자를 차지했다.
갑자기 나타난 헌트의 대표지만 나는 그의 난입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원래 계약이라는 건 경쟁자가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지.’
헌트 대표는 나와의 친분을 상기시키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천마 님이시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눈물겨워 하노라’를 유통했었거든요.”
...그랬었나?
그 친분이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친분이기는 했지만.
“반갑습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맞장구를 쳐주자 옆에 있던 로페즈의 회장이 움찔거린다.
로페즈 회장은 여유로운 척 와인잔을 들며 한마디 던졌다.
“우리 회사도 천마와 얽힌 일이 많지. 이번에도 우리 딸 앨범을 프로듀싱 해주고 있거든. 참, 페니는 요새 잘 하던가?”
“페니는 언제나 잘하고 있죠. 이번 앨범은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나는 로페즈 회장의 말도 받아주었고, 이번에는 헌트의 대표가 움찔거렸다.
“하하하!! 응원합니다. 그나저나 ‘팬텀 스틸러’에서는 천마 님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넘버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진 모양이더군요.”
그게 그쪽에서 만든 거였어?
영화를 헌트 픽처스에서 제작했다는 건 방금 알았지만, 맞장구쳐주는 건 어렵지 않다.
“킹 감독님이 애를 많이 썼죠. 벌써 개봉을 앞두고 있다던데요.”
헌트의 대표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보니 천마 님과 우리가 같이 작업한 게 참 많군요. 이거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요?”
이번에는 나를 거치지 않고 로페즈 회장이 바로 반박했다.
“궁합이라는 단어는 그런 데 쓰는 게 아니죠. 이번에 썸머 페스타에서 활약한 거 봤죠? 이게 바로 궁합입니다.”
“궁합은 무슨. 그건 수습이라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천마 님 없었으면 대형 사고가 날 뻔했으면서.”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아주 불꽃이 튀는군.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 천마신교에 투자를 원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세부 사항을 이야기할 수는 없느니, 정말 실속 없는 ‘기싸움’만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정리했다.
“그냥 두분 다 회사로 제안서를 보내시죠. 검토해 보겠습니다.”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그날의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
.
.
며칠 뒤, 나는 제안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옥수진은 제안서에 적힌 액수를 보고 기겁했다.
“1,500만 달러? 아니 여기는 2,000만 달러네요?!”
하지만 나는 그 금액을 보고 여유롭게 웃었다.
이건 고작 시작가일 뿐이다.
조만간 몸값이 오를만한 사건이 두 개나 터질 거거든.
< 조금 더 쓰시죠?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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