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판 잠마동 (1) >
펄 엔터테인먼트의 메인 프로듀서인 제이맨.
결재서류를 보는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지금 꽤 난처한 상황에 부딪혔다.
“천마만 끼면 되는 일이 없군.”
펄 엔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페즈 뮤직 그룹과 투자 협상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도 좋았다.
로페즈 그룹은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시장을 노리고 있었고, 펄 엔터는 이번 기회에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데뷔한 에이클라스는 비록 성적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펄 엔터의 간판인 매그넘은 아직 건재했다. 특히 일본과 동남아에서의 인기는 보증 수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계약이 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천마가 나타나 버리다니.”
로페즈는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천마와 계약을 했고, 도약을 하려고 했던 펄 엔터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제이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원점에서부터 계획을 검토했다.
“먼저 에이클라스부터 확실히 자리 잡게 해야겠지.”
작년 연말 야심차게 낸 미니앨범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하필 미니앨범을 냈을 때 천마의 둠둠둠이 나올 줄이야.
연말에는 천마의 노래가 차트를 장악하고 있었고, 거기에 에이클라스의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기대하고 있던 신인상도 젤리크러쉬한테 빼앗겼다.
“아무래도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겠군.”
제이맨이 보기에 에이클라스 자체의 실력은 충분했다.
다만 그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맨은 지금까지 에이클라스의 청순함을 강조하며 남성 위주의 라이트 팬층을 공략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가지는 게 중요한데, 이 대중성을 잡는 데 실패해버렸다.
왜냐하면 당시 대중들은 천마에게 홀려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성 확보에 실패했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여성 중심의 코어 팬층을 공략해서 강력한 팬덤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걸크러쉬 컨셉이라면 모를까, 청순한 컨셉은 여성 팬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결국 에이클라스는 이도 저도 아닌 그룹이 되어버렸다.
제이맨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차라리 컨셉을 바꾸는 게 좋겠군.”
천마 같은 수준으로 계속해서 대중적인 노래를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확실한 캐릭터를 잡아서 코어 팬층을 만드는 편이 낫다.
다만 제이맨은 그 작업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이미 자신은 한번 실패했다.
자신보다 이쪽 방면에서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크 엔터의 권동욱 실장이다.
하지만 그는 접근이 쉽지 않다.
특히 이번에 아크에서 준비하는 4세대 걸그룹을 성공적으로 런칭한다면 임원이 될 수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제이맨의 정보망에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아크 엔터와 권동욱 실장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군.”
본부장과 한판 붙고 키우던 신인 데뷔가 무산되었다는데.
아무래도 스카웃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듯싶었다.
제이맨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늘이 준 기회군.”
물론 그 기회가 제이맨에게만 간 것은 아니었다.
*
나는 본격적으로 잠마동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지방에 있는 빈 건물 하나를 통째로 임대했다.
규모가 있는 빌딩이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고, 마침 근처에 산을 끼고 있어서 무림에서의 잠마동을 연상시켰다.
이제 여기에 100명의 연습생을 넣어놓은 후, 7층을 통과하는 연습생만 데뷔시킬 예정이다.
“원래 잠마동은 천 명이 국룰인데.”
하지만 천 명이 묵을 숙소를 구하는 문제부터, 식비니 인건비니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어쩔 수 없었다. 연습생을 천 명이나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해서 숙소를 비롯한 휴게공간을 만들게 했고, 나는 건물의 설계도를 보며 연습생들을 테스트할 기관진식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단 1층에서 7층까지는 다른 관문이 들어가야 하겠고,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확 높아지게 만들어야겠군. 나때는 말이야, 3층에 가기 전 반수가 병신이 됐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만들면 안 되겠지?
그러면 1층에서는 가볍게 기본기를 볼 수 있는 환영진만 설치한 후, 2층부터 본선을 치르도록 해야지.
2층부터는 난도가 확 뛸 거다.
그때부터는 모든 규칙이 사라지며,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않는 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허용된다.
상대방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고의로 방해해도 되고, 파벌은 만들어도 된다.
잠마동을 오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실력만이 아니라, 근성과 독기도 필수적이니 이런 규칙을 추가했다.
대신 이 무한경쟁의 장을 통과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
“다음 층으로 넘어갈 때 확실한 성장을 보장해주는 거지.”
각 층에 설치된 진법을 통과하면, 내가 주입해둔 내공이 신체를 노래와 춤에 적합하게 바꿔준다.
물론 환골탈태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고, 진법에 들어가 있는 내공이 몸을 자극하면서 살짝 다듬어주는 느낌이지만.
잠마동을 뚫고 올라오는 마인들은 분명 그것만으로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기 추억에 잠겨 잠마동을 계획하고 있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동생 놈이었다.
“뭐야? 왜?”
- 오빠 왜 이렇게 톡을 안 봐?
“톡?”
집중하느라 무음으로 돌려놓은 모양이었는지, 동생에게 12개의 톡이 와있었다.
- 예리가 파우치 잃어버렸다는데 못봤어?
- 안에 중요한 게 있다던데
- 빨간색이고 커다란 인형 달려있는거야
- 오빠? 바빠?
- 톡보면 답장 ㄱ
- 똑똑똑
- 야
"......."
그러고 보니 파우치를 가지고 와서 내 방 구석에 박아놓은 게 기억난다.
“그 파우치 나한테 있기는 한데.”
- 친구가 그거 찾고 있어. 안에 중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모양이야. 오빠가 좀 전해줄 수 있어?
“그정도는 어렵지 않지.”
용건은 끝났다 싶어 전화를 끊으려는데, 동생이 붙잡았다.
- 그런데 예리 말이야···.
*
차선우는 결국 신예리를 만나러 갔다.
마침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고, 은신술을 쓰면서 기척을 숨기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신예리는 먼저 카페에 도착해있었다.
보아하니 뭔가 깊게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차선우는 다가가서 신예리를 불렀다.
“예리 씨?”
차선우의 부름에 신예리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손으로 접시를 쳤고, 포크가 바닥에 떨어진 뻔한 걸 차선우가 재빠르게 잡아챘다.
“...조심하시고. 자, 여기 포크요.”
“앗, 넵. 감사합니다.”
“찾으시던 파우치가 이거 맞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씀 편하게 하세요. 소미 오빠이신데.”
“그럼 그럴까?”
차선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 전 차소미에게서 들었던 신예리의 사정을 떠올렸다.
‘오빠. 그 지난번에 만난 예리 기억나? 혹시 오빠가 한 번만 봐줄 수 있을까?’
‘갑자기 뭘 봐줘?’
동생은 신예리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면서 부탁을 해왔다.
‘얘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아쉬운 소리 안 하는 녀석인데.’
동생의 부탁이 아니어도, 마침 걸그룹 멤버를 뽑으려던 차선우에게 신예리는 매력적인 카드로 보였다.
중학생 때부터 아크 엔터에서 연습생 생활을 했으면 기본기는 당연히 탄탄할거고.
데뷔조에 뽑힐 정도라면 실력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잠마동에 들어갈 인재로는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차선우가 운을 뗐다.
"아크 연습생이라면서?"
“네 맞아요.”
"잘 돼가?"
동생에게서 대강 이야기는 들었지만, 신예리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그렇게 신예리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차선우가 본론을 꺼냈다.
“그러면 우리 회사는 어때? 이번에 걸그룹을 만들 예정이거든.”
차선우의 이야기를 들은 신예리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천마는 국내에서 가장 핫한 아티스트니까.
무엇보다 천마가 손을 댄 가수는 모두 성공했다.
천마신교 레코즈의 아티스트는 물론, 젤리크러쉬와 페니까지.
여기에 얼마 전 로페즈와 계약을 맺어 자본도 빵빵하다.
신예리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그러면 천마님이 직접 걸그룹을 만드시는 건가요?”
“그래. 내가 직접 트레이닝부터 프로듀싱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할 거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걸그룹에 들어오려면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잠마동을 통과해야만 데뷔조에 들어갈 수 있다.”
차선우는 잠마동에 대해 설명했고, 이야기를 듣던 신예리는 생각했다.
'보통 빡센 게 아닌데?'
조금 전까지 아크에서 나와 천마신교에 들어가 볼까 하던 마음이 다시 사라질 뻔했다.
이어지는 차선우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대신 이건 확실히 약속하지. 잠마동만 통과하면 무조건 반년 안에 데뷔시켜줄게.”
데뷔.
수년간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신예리에게 차선우의 말은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었다.
사실 차선우를 만나기 직전까지도, 신예리는 갈등하고 있었다.
뒤숭숭한 분위기를 인식했는지 아크 엔터에서는 데뷔조 연습생들을 한 명씩 불러서 면담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데뷔를 할 정도로 키워놨으니 보내기 아까울 수밖에 없다.
본부장이 신예리에게 직접 말했다.
- 예리야. 데뷔가 코앞이다. 딱 일 년만 기다려보자.
반면 직접 데뷔조를 케어해주는 권동욱 실장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 프로젝트 걸그룹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데뷔는 보류될 거다. 현실적으로 1년 반은 더 기다려야 해. 예리 네가 원한다면 내가 다른 회사로 이적도 알아봐줄 수 있어.
같은 회사에서 다른 말을 하니 고민이 됐는데, 방금 천마의 제안이 쐐기를 박았다.
'경쟁이야 질리도록 해왔는데. 잠마동쯤이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천마는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잖아?’
통과만 한다면 성공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 보장되는 거다.
그래서 신예리는 결심했다.
더 이상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요. 저도 그럼 잠마동에 참여할게요.”
그 말을 들은 차선우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걸로 1호 수련생 획득 완료이다.
“잠마동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을 거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예리는 잠마동에서 마주하게 될 시련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지금은 그저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웃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두 사람이 나가는 길.
신예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
차선우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트레이에 있던 컵이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질 뻔했다.
신예리는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황급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괜찮습니. 어? 예리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실장님? 실장님이 여기는 어떻게?”
카페에 있던 사람은 권동욱 실장이었다.
신예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권동욱을 만나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한 건 권동욱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신예리 옆에 차선우가 있는 걸 보더니 어리둥절했다.
“나는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두 사람은 왜 여기에···?”
그때 차선우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원래라면 내일 뵀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늘 뵙네요?”
지난번 차선우는 권동욱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었고, 권동욱도 한번 들어나 보자며 약속을 잡은 참이었다.
마침 그게 내일이었고.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아 보였다.
“당장 바쁘신 거 아니면 잠깐 얘기나 할 수 있을까요?”
권동욱은 시각을 확인했다. 원래 오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지만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탓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차선우와 신예리가 함께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럼 잠깐 앉으시죠.”
차선우는 자연스럽게 권동욱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려는데, 카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오늘 권동욱과의 약속이 있는 남자.
제이맨의 등장이었다.
< 현대판 잠마동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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