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판 잠마동 (2) >
권동욱 실장은 생각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사실 그는 당장에, 곧바로 이직을 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건 아니었다.
하는 일에 현타가 제대로 왔는데, 마침 천마신교와 제이맨에게 스카웃 제의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보려고 한 것이었다.
자신이 스카웃 되면 어떤 일을 하는지, 각 회사의 비전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일단 오늘은 제이맨과 먼저 약속을 잡았고, 내일은 천마와 약속을 잡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자신 앞에 나란히 앉아버렸다.
꼭 2 대 1로 면접을 보는 듯한 상황에, 권 실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일이 커지고 있어···.’
자신의 커리어에 자부심이 있는 권동욱이지만, 4대 엔터의 메인 프로듀서와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가수를 눈앞에 두니 왠지 모르게 쭈글해졌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돌고 있어서 섣불리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먼저 입을 연 건 제이맨이었다.
“실장님이 오시면 에이클라스의 디렉팅을 전적으로 맡길 예정입니다.”
그러자 천마도 말했다.
“저도 걸그룹을 만들 예정입니다. 권동욱 실장님이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하더군요.”
천마가 걸그룹을 만든다는 말에 권동욱도 놀랐고, 제이맨도 덩달아 놀랐다.
‘권동욱 실장과 같이 있는 걸 보고 설마 했는데. 천마신교에서 진짜 걸그룹을?’
예상외였다.
동시에 천마와 권동욱이 손잡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맨은 재빠르게 새로운 조건을 덧붙였다.
“우리 펄에서는 에이클라스가 4세대의 대표 아이돌이 될 수 있도록 수십억의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천마는 피식 웃었다.
“수십억··· 제가 최근에 로페즈 측에서 수천만 달러 투자받은 건 알죠?”
돈에서도 제이맨이 밀렸다. 제이맨이 다급해졌다.
“우리 펄 엔터의 프로듀서진 아시죠? 최고의 곡을 만들기 위해 작곡 캠프를 열겁니다.”
여러 명의 작곡가들을 불러 캠프를 꾸린 다음, 좋은 곡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노래를 구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천마는 이번에도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캠프 같은 건 안 할 겁니다. 대신 트레이닝부터 프로듀싱까지, 모든 과정에 제가 참여할 겁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곡가 수십 명을 붙여놔도 천마 한 사람만 못한다.
계속해서 천마에게 밀리자, 제이맨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어필했다.
“실장님. 펄 엔터로 오시죠. 실장님이 쌓은 커리어를 생각하면 벌써 임원을 달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권동욱은 몇 번이나 능력을 증명했고, 위캔걸즈를 통해 그 정점을 찍었다.
“펄 엔터는 능력에 따라 확실하게 대우해주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나누는 걸로 하고, 실장님이 원하는 대로 꾸려나갈 수 있도록 전적으로 서포트 해드리죠.”
제이맨은 권동욱이 가려워하던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줬다.
지금까지 아크 엔터에 헌신한 권동욱이 가장 크게 현타를 느낀 부분이었다.
열심히 했지만 막상 중요한 일에서는 배제되는 기분.
제이맨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믿고 맡기겠다는 말을 들으니 혹했다.
그때, 차선우가 말했다.
“우리는 마교스러운 걸그룹을 만들 겁니다.”
차선우의 선언에 제이맨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권동욱은 눈을 빛냈다.
‘마교스러운 걸그룹?’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기는 소리라고 했겠지만, 권동욱은 다르게 생각했다.
‘요즘 아이돌 판에서는 대중성이 희미해졌으니까.’
워낙 많은 아이돌 그룹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언제든 자기 입맛에 맞는 아이돌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데뷔 할 때의 캐릭터와 컨셉을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 컨셉이 취향이 맞으면서도 신선할 때, 이른바 입덕 포인트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리고 평소에도 무협 소설을 즐겨보는 권동욱은 예전부터 천마의 컨셉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라는 컨셉, 신박하잖아.’
요즘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여러 가지 콘텐츠가 나오면서 경쟁력 있는 컨셉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천마는 시작부터 머리를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관과 컨셉을 디테일하게 만들어놓으니 팬들이 녹아들 수밖에.’
말투나 행동까지 진짜 무협지에 나오는 천마를 빼다 박은 것 같다.
회사 이름은 천마신교에, 팬클럽의 이름은 십만교인이다.
그래서인지 천마 팬덤에는 여자뿐만 아니라, 무협을 즐겨보는 남자 팬층까지 두루두루 확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적인 기획력이었다.
분명 오랜 시간 천마라는 캐릭터를 연구한 게 분명했다.
물론 차선우가 70년 동안 무림에서 천마로 생활했다는 건 권동욱의 상상에는 없었다.
‘거기다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도 천마가 낫지.’
로페즈와 계약을 맺은 걸 보면 돈도 빵빵한 게 분명하고.
단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권동욱은 차선우 쪽에 더욱 끌리기 시작했다.
권동욱의 반짝이는 눈빛을 본 제이맨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천마와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던 제이맨은 자동반사적으로 방어기제가 올라왔다.
“내가 알기론 천마신교에 연습생은 없을 텐데요. 지금부터 걸그룹을 키우려면 몇 년은 걸리는데, 너무 허황된 이야기 아닙니까?”
제이맨의 반박에도 차선우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잠마동을 이용할 겁니다.”
어차피 잠마동에 들어갈 100명의 연습생을 뽑기 위한 공고를 조만간 올릴 예정이었다.
기밀 사항도 아니라서 차선우는 시원하게 오픈했다.
또다시 나온 무협 용어에 제이맨은 당황했다.
“...그건 또 뭡니까?”
하지만 권동욱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넘어, 스스로 차선우의 해석을 재창조했다.
‘연습생을 뽑는 과정부터 저런 컨셉이라니. 영리한 계략이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룹과 멤버에 애착을 가지도록 서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세계관이나 뭐니 하는 것들도 그것의 일환이다.
잠마동을 이용한다면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서사가 만들어지고, 나아가 천마가 이미 만들어놓은 무협 세계관에 편입이 가능해진다.
‘어쩌면 천마는 처음 컨셉을 잡을 때부터 여기까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
전혀 아니다. 차선우는 그저 무림에서 못다 이룬 로망을 실현하는 중이었다.
오해는 점점 깊어지는 와중에, 권동욱은 천마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
시간이 흘렀다.
차선우에게 설득당한 권동욱은 결국 천마신교로 넘어왔다.
그는 ‘천마신교 세계관 확장’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새로운 걸그룹을 만드는데, 강여름과 특히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이 세가니, 장법이니, 무공의 속성이 어쩌니 하면서 무협지 하나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차선우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 저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어쨌든, 그 사이 잠마동은 완성이 되었다.
잠마동에 들어갈 연습생들도 선발이 끝났다.
천마신교에서 걸그룹 데뷔를 위한 오디션을 치른다고 하니 전국 각지에 있는 연습생들이 몰려왔다. 보내준 영상으로 1차 검토하고, 2차로 대면 심사를 통해 걸러냈다.
그렇게 선발된 100명의 인원이 잠마동 앞에 모여 있었다.
마침내 오늘, 입소식이다.
신예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잠마동 건물을 보고 당황했다.
주변은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데, 거기 커다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저게 잠마동인가?”
신예리의 옆에 있던 쌍둥이도 감탄했다.
“와, 여기 완전 시골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권동욱이 아크 엔터를 나오면서 내부에는 혼란이 있었다.
신예리와 친하게 지내던 쌍둥이도 그 혼란 속에서 아크 엔터를 탈출했다.
세 사람은 잠마동 건물을 보며 꼭 합격하자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때, 쌍둥이가 신예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헐, 언니. 저기 좀 봐봐.”
돌아보니 지난번에 화장실에서 신예리와 시비가 붙은 여자애도 참여해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 연습생은 신예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비뚜름한 눈빛으로 신예리를 바라보았다.
“제일 빨리 도망친 년이, 여긴 제일 빨리 온 모양이네?”
역시나 눈을 이글거리면서 시비를 걸어온다.
신예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연습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들 경쟁자였기에 신예리는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야 빨리 왔지. 그런데 너는 늦게 온 걸 보면 욕심이 없나봐?”
"뭐?"
"아, 그래서 데뷔조에서도 밀린 건가?"
"야!"
발끈한 여자애가 달려들었지만, 타이밍 좋게 잠마동에 입장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잠마동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제 입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백 명의 연습생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순간, 실내임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다.
“...뭐야?”
신예리는 같이 들어온 쌍둥이를 불러보았다.
"다빈아, 경빈아! 너네 뭐라도 좀 보여?"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둘러보니 함께 입장한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
신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잠마동에 들어오기 전에 들은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첫 번째 시험은 개인 테스트니 당황하지 말라고 했지.’
뭔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마치 가상현실 체험장에 온 듯한 기분이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잠마동 수련생 여러분
- 첫 번째 개인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 각자 번호에 맞는 부스에 들어가서 시험을 준비하세요
신예리의 번호는 1번.
걷다 보니 1이라고 쓰여있는 커다란 부스가 나왔다.
신예리는 문을 열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부스 안에 몸을 넣으니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무대에 선 것 같은 긴장감과 압박감이 그녀를 조여왔다.
본격적으로 진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잠시, 스피커에서 반주가 흘러나왔다.
부스 한쪽에는 MP3와 함께 노래를 익힐 수 있는 악보가 있었다.
“다행히 내가 아는 노래네.”
반주는 유명한 가요였다.
당장 심사를 해줄 사람은 없지만, 뭔가 노래를 부르라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신예리는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차선우가 준비한 1층 관은 가볍게 기본기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노래를 부른다면 다음 관문으로 향하는 생문이 열린다.
실제로 신예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앗!”
긴장감에 실수로 음이 플랫 되는 순간, 열리던 길이 닫혔다.
반주는 멈추고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자가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음정이 살짝만 틀려도.
심지어 집중력이 떨어져 감정 전달이 부족해진다면.
가차 없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도르마무···?”
신예리는 이 상황이 불안해졌다.
“나 나갈 수 있는 거 맞겠지?”
가볍게 기본기만 보려고 한 첫번째 관문.
그 ‘가벼운 기본기’의 기준이 천마 본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덕분에 연습생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다행히 벽곡바라고 불리는 간식거리를 무제한으로 제공해줘서 기력이 딸리지는 않았다. 꾸역꾸역 노래를 부른 신예리는 결국 완창에 성공했다.
관문을 통과하자 아까부터 몸을 짓누르던 느낌도 사라지고,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그리고 다른 관문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와! 이제 2층으로 가는 건가? 이정도면 7층까지 문제없겠는데?”
신예리의 행복회로는 겨우 5분 뒤, 장렬하게 불타서 사라졌다.
*
100명의 연습생이 잠마동에서 고통받고 있을 그 시각.
차선우는 킹 감독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킹.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 그럼. 덕분에 영화가 잘돼서 요즘 날 찾는 곳이 많아졌지.
“잘됐네. 여동생은 잘 지내고 있어?”
-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 아, 내가 말했나? 뮤파이 대표와 다시 만나기로 했대.
“......”
무튼. 충격적인 소식은 뒤로 하고.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 아 그게 말이지···.
< 현대판 잠마동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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