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삼각관계 >
킹 음악감독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몇 달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건 역시나 잠마동이다.
나는 웬만큼 일이 몰려도 거뜬하게 처리하는 편이었는데, 잠마동은 노동강도가 차원이 달랐다.
잠마동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달이었다.
그것도 내가 하루종일 매달려서.
인테리어는 그냥 업체에 맡기면 된다지만, 진법을 설치하는 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도맡아서 해야만 했다.
신교에 있었을 때는 대충 구조만 잡아주면 부하들이 알아서 했었는데.
현대에 내공을 쓰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게 처음으로 아쉬웠다.
“그래도 여기에 영약 비슷한 게 있어서 다행이지.”
무림에서 먹었던 공청석유니 만년하수오니 하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약재를 구해 연단술로 효능을 극대화시키니 웬만한 약보다 좋았다.
이제는 돈도 많겠다, 닥치는 대로 약초를 사 먹으면서 잠마동에 내공을 갈아 넣었다.
그래서 잠마동 설립이 끝날 때쯤에는, 내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쨌든 빡세게 한 덕에 잠마동은 계획대로 잘 돌아갔다.
“지금쯤이면 슬슬 2층을 통과한 녀석들이 있으려나.”
미래의 마인이 열심히 구르는 동안, 나는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미뤄뒀던 팬미팅도 한번 했고, 본격적으로 정규 앨범을 준비하기로 했다.
정규 1집 앨범인 만큼 지금까지의 앨범과는 다른 느낌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미니 1집 둠둠둠이 세상에 던지는 출사표였고.
미니 2집 타임랩스에서는 무림에서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이번 앨범에서는 현대에 돌아온 '가수' 천마가 해온 일들을 보여줄 생각이다.
나는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았다.
돌아오자마자 이승호와 한바탕했고, 이후에는 한태영을 시작으로 젤리크러쉬, 라희 등 많은 가수들과 다양한 이유로 얽혔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인연이 있는 모든 가수들에게 피처링을 부탁했다.
“그러고 보니 한태영과 윤재하는 군대에 있어서 안 되겠군.”
한태영은 아직 전역이 네다섯 달 정도 남았고,
윤재하는 정신질환으로 군대를 미뤘다가 올해 초에 입대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정규 앨범이 지금까지의 결산 같은 느낌인데?”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 만나며 한동안 앨범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러던 와중, 킹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 천마! 잘 지내고 있었어?
“이쪽이야 뭐 잘 지내고 있지. 오랜만에 무슨 일이야?”
-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팬텀 스틸러> 애프터 파티가 있거든. 너도 올래?
애프터 파티라.
영화가 개봉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한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화가 히트하면서 출연진과 제작진이 모두 바빠져 시간이 안 맞았다고 한다.
- 오면 재미있을 거야. 사이먼 감독이랑 무술 감독이 너를 꼭 보고 싶어 하거든.
그러고 보니 다시 2주마다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안토니오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 페니에게 피처링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미국에 방문한 김에 직접 만나봐야겠다.
“콜. 애프터파티는 언제인데?”
그렇게 갑작스러운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
<팬텀 스틸러>는 역대 뮤지컬 영화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올해 개봉작 중 다섯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렸으며, 벌어들인 금액은 예상치를 훌쩍 웃돈 1억 3천만 달러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제작사인 헌트 픽처스 측에서 성대한 애프터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파티의 시작 시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헌트 측에서 오늘 파티에서 입을 옷을 선물해줬는데, 맞춤 양복이라 샵에 들러서 세팅을 하다 보니 늦어졌다.
나는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맞춤이라 그런가? 핏이 다르긴 하네.’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슈트를 입으니 태가 확실히 산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붉은 카펫이 깔린 입구 앞에서 문이 열린다.
호화스러운 연회장 곳곳에 고가의 장식이 달려있고, 사람들 사이로 웨이터가 샴페인이 올려진 쟁반을 나른다.
내가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렸다.
마치 파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
그 시선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제일 먼저 근처에 있던 사이먼 총감독이 다가왔다.
“미스터 천! 스타일이 확 달라졌는데요?”
사이먼은 반갑게 인사하며 날 끌어안으려다가 뒤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치여 튕겨 나갔다.
무술 감독과 음악감독, 안토니오까지 모두 한꺼번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감독들이 모두 나에게 다가오자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무술 감독이었다.
“이번에 넷플렉스에서 제작하는 무협 드라마에 참여합니다. 혹시 같이할 생각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러자 다음으로 도착한 킹 감독이 껄껄 웃으며 거대한 몸을 밀어 넣었다.
“하하, 내가 천마는 천상 뮤지션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러지 말고 우리 다음에 뮤지컬 영화를 같이 만들어 보지. 내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
“좋은 아이디어?”
“자네가 지금까지 만든 노래들로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보는 거지. 맘마미아처럼. 어때?”
오?
이건 좀 그럴듯한 제안이다.
물론 당장은 힘들고, 커리어를 지금보다 발전시켜야겠지만.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다.
그렇게 킹 감독과 생산성 있는 대화를 나눈 뒤, 기다리고 있던 건 안토니오 로시였다.
내가 다른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안토니오는 사람들을 잔뜩 끌고 왔다.
“와, 오늘 머리를 깠네? 죽이는데?”
“죽이는 건 평소에도 마찬가지였지. 그나저나 이쪽은 누구야?”
“내 친구들!”
인싸이자 마당발인 안토니오.
그는 데려온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해주며 으쓱댔다.
“이런 게 다 인맥이라고!”
“...그래. 정말 고오맙다.”
예닐곱 명이 지나간 후 마지막으로 소개받은 사람은,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였다.
그녀의 이름은 도나 그레이슨.
영화에서는 사랑을 받고 자란 부잣집 막내딸을 맡았는데, 만나보니 실제로도 그 느낌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오 마이 갓! 이쪽이 천마?”
도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호들갑을 떨더니 거의 나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으음. 이건 좀 격한데.
“진짜 만나고 싶었어. 빌보드 맨 꼭대기에 내 이름이 오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별말씀을. 노래를 잘 불러줘서 고맙지.”
영화의 주제곡,
도나가 남주와 함께 듀엣으로 불렀던 이 노래는 7주째 빌보드 핫 100차트 5위를 차지하는 중이다.
도나는 마치 스타를 만난 팬처럼 눈을 반짝이며 연신 질문을 날렸다.
“지난번 페스티벌 때 무대 영상도 너무 재미있게 봤어. 그때부터 너 방송 다 챙겨봤는데.”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그 를 판? 판소리? 그걸로 바꿨던 방송 있잖아. 내가 지난번에 후원 날린 거 알고 있어?"
하필 봐도 그런 걸 보냐.
나는 떨떠름해 하면서 감사인사는 했다.
“...덕분에 내가 그날 저녁에 치킨을 먹을 수 있었을 거야.”
도나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적당히 텐션이 있으면서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화술까지.
여러 가지 주제가 섞여, 대화는 이리 튀고 저리 튀다가 최근에 있었던 일까지 나왔다.
도나가 말했다.
“아참, 그리고 최근에 나 방송에서 나이트메어 댄스 챌린지 했었는데. 봤어?”
그 말에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뉴튜브에서 <팬텀 스틸러> 클립을 보다가 알고리즘이 관련 영상을 추천해줬다.
영화 배우가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길래 한번 봤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영화 홍보차 토크쇼에 나갔던 것 같다.
나는 아는 척을 했다.
“토크쇼에 나가서 췄던 거 말하는 거지? 잘 추던데?”
“맞아! 그때 안토니오랑 메이슨 쇼에 게스트로 나가서 췄었는데.”
메이슨 쇼.
심야 토크쇼인데 미국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안토니오가 말했다.
“도나 너는 댄스만 잘한 게 아니었지. 메이슨한테 넘어가서 영화 스포할 뻔했잖아.”
“야! 그 이야기를 하면 어떡해!”
도나는 토크쇼에 나갈 때마다 유도신문에 잘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스포요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번 메이슨 쇼에 나가서는 절대 스포를 하지 않겠다며 준비를 해 간 모양이었지만, 이번에도 스포를 할 뻔했다고 한다.
도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메이슨이 너무했어. 그런 난처한 질문을 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조심했어야지. 메이슨이 괴팍한 질문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한창 메이슨의 이야기를 하던 도나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혹시 토크쇼 나갈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토크쇼는 진짜 많이 나가봤거든.”
뭐 당해본 사람만의 경험담이 있다는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토크쇼에 나갈만한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나와 한참 더 이야기한 후, 나는 머리를 식힐 겸 정원 분수대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야!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리고 나를 거칠게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
잭 포터는 가수 겸 배우이다.
그리고 팬텀 스틸러에서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
포터는 헌트 픽처스의 영화에서 아역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가수의 재능을 발견하며 헌트 뮤직과도 계약했다.
시작은 배우였지만 포터는 음악 커리어를 더 훌륭하게 쌓았다.
이제는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많이 알려졌고, 아역 이후로는 간간이 TV에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번 팬텀 스틸러에 나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짝사랑하고 있는 도나 그레이슨의 출연.
감독의 마음에 든 포터는 남주 역할을 맡아 도나와 환상의 케미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극중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고백할 때 부른 세레나데도 직접 작곡해서 불렀다.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표현했는데 도나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나에게 이번 뮤지컬 넘버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좋냐고 은근슬쩍 물어봤지만,
'나? 나는 가 제일 좋은데.'
'...내가 만든 세레나데는 어때?'
'물론 네가 만든 세레나데도 훌륭하지!'
뒤늦게야 칭찬을 받았지만, 누가 봐도 빈말인 걸 알 수 있었다.
더욱 자존심 상하는 건 도나가 칭찬한 는 여전히 빌보드 상위권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다. 포터가 작곡한 세레나데는 저기 아래서 노는 중이고.
“시발! 그딴 칭크가 만든 노래가 뭐가 좋다고!”
그 노래를 도나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덕에 얼떨결에 빌보드 5위에도 올라봤지만, 동양인인 천마에게 밀린 듯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이후 도나는 몇 번이고 천마의 이야기를 하고, 천마의 방송을 보며 포터의 열등감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오늘, 천마가 직접 등장함으로 열등감이 폭발해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천마를 칭찬하는 걸 보니.
도나와 천마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린다.
포터는 샴페인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져 평소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잔을 연거푸 들이키던 그는 눈을 돌려 도나를 찾았다.
도나는 여전히 천마와 대화 중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기 있을 참이야!’
천마가 있는 곳이 주인공의 자리인 것 같다.
천마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며 인사를 나누고, 파티장은 천마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도나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천마의 옆에 딱 붙어서 웃고 있다.
웃을 때마다 천마에게 가볍게 터치를 하는 게 심상치 않다.
‘설마 도나가 저 새끼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지금이라도 가서 대화에 끼어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천마가 바람을 쐬러 정원 분수대로 나갔다.
포터도 헐레벌떡 천마를 따라 나갔다.
‘단단히 경고해줘야겠어.’
하지만 분수대에는 천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숨어든 파파라치가 카메라를 들고 먹잇감을 찾고 있었고, 천마는 이번에도 이슈메이커의 명성을 이어 나갈 예정이었다.
< 뜻밖의 삼각관계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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