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교의 유전자를 가진 걸그룹 (3) >
차선우의 동생, 차소미.
강한솔과 함께 조별 모임을 하기로 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같은 기숙사 고등학교를 나온 두 사람은, 전공은 다르지만 종종 만나서 밥도 먹곤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같은 교양 수업을 듣게 됐다.
팀플을 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온 차소미는 강한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강한솔은 카페 구석에서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야, 강한솔.”
차소미는 강한솔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지만, 강한솔은 그녀가 온 줄도 모르고 노트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뭔데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새로 나온 영화인가?’
차소미는 강한솔의 어깨너머로 나오는 영상을 슬쩍 보았다.
비장미가 넘치는 분위기에, 도르마무처럼 반복되는 미션을 넘기 위해 식량을 아껴가며 도전하는 주인공.
그런데 그 주인공이,
‘엥? 신예리?’
그녀의 친구였다.
강한솔이 정신없이 보고 있는 영상은 바로 천마신교에서 만든 ‘잠마동 1화’였던 것이다.
‘뭐야. 쓸데없이 고퀄이네. 걸그룹 만든다고 하더니 제대로 만들었잖아?’
차소미는 아이돌 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었다.
매번 비슷한 레퍼토리에, 생긴 것도 비슷한 애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하하호호 웃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잠마동은 달랐다.
원초적이고, 스릴이 있어 저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규칙도 단순하고 직관적이라, 지금처럼 어깨 너머로만 봐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뭔가 쭈꾸미 게임 같기도 하고.’
차소미는 2년 전쯤 유행했던 넷플렉스의 드라마인 '쭈꾸미 게임'을 떠올렸다.
피튀기는 경쟁을 뚫고 최후의 1인이 상금을 가지고 가는 서바이벌.
천마신교에서는 이번에 데뷔할 4명을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차소미는 오빠가 이런 기획을 했다는 게 새삼 대단해 보인다.
‘오빠가 진짜 천재였던건가?’
지금까지의 음악적 행보도 그렇지만,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들이 하나같이 엄청나다.
무림에서의 70년 정수가 담긴 것들이었지만, 차소미는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한솔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하지, 뭘 그렇게 서 있어.”
“내가 이름 불렀을 때 듣지도 못했으면서. 그게 그렇게 재미있냐?”
차소미의 말에 강한솔은 멋쩍은 듯 머리를 만졌다.
“그래? 미안하다. 너 혹시 천마라고 알아? 그 사람이 이번에 새로 만드는 걸그룹 영상인데 진짜 재미있네.”
차소미는 오빠가 천마라는 사실을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찐친이었던 신예리 말고는 천마가 그녀의 오빠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다 보니 차소미는 같이 영상을 보게 됐고, 그러다가 며칠 전 오빠랑 연락했던 게 떠올랐다.
지난번 부모님이 남매끼리 서로 연락이라도 좀 하면서 지내라고 한 이후, 두 사람은 정말 형식적으로 ‘연락’만 하고 지냈다.
하지만 지난번 통화에서는 몇 달 만에 근황 토크라고 할만한 걸 했었다.
차소미가 문득 신예리의 안부가 궁금해진 것이다.
잠마동에 들어간답시고 휴학계를 낸 녀석이 몇 달째 연락이 없으니 잘 지내고 있나 싶었다.
차선우에게 신예리의 입교(?)를 부탁한 전적도 있었고.
그래서 물어봤다.
“예리는 잘하고 있어? 회사 기밀 같은 거면 말 안해도 되고.”
- 무슨 기밀씩이나.
당시 데뷔조가 거의 정해진 상황이라서 기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곧 영상이 나와서 멤버들이 공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차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예리는 통과했다. 곧 데뷔할 거야. 조만간 영상 올라올 거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말고.
“헐 대박! 진짜 잘됐다!”
친구가 얼마나 데뷔하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던 차소미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오빠 고마워!!!!"
그날 차소미는 정말 오랜만에, 오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보통 10초 안에 끊어졌던 통화는 길어졌다.
만들어질 걸그룹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차소미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걸그룹 이름은 뭘로 지었어?”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차선우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천마신교의 걸그룹인 만큼, 마교걸즈나 무림사화는 어떨까 싶어.
“......”
차소미는 웬만하면 오빠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건 진짜 아니야. 그렇게 지으면 애들 도망갈걸?”
- 그, 그래?
“오빠는 네이밍 센스가 없으니까, 그냥 직원들이나 아니면 애들한테 지으라고 하는 게 백배 쯤 나아보이네.”
차소미의 조언을 받아들인 차선우는 데뷔조에게 직접 그룹명을 지으라고 했다.
그룹명이 뭐가 될뻔했는지 짐작도 못한 아이들은, 백년대계를 논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토론했다.
"우리의 정체성 나타내야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네 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건 잠마동이었다.
“잠마동이 약간 탑 같지 않아?”
“맞아 맞아. 1층에서 7층까지 올라가는 게 탑 등반물 같아.”
“그럼 탑에서 온 소녀들 컨셉은 어때?”
“오, 좋다. ‘탑 걸즈’ 어때?”
“괜찮은데? TOP Girls 의미도 좋네.”
천마신교의 첫 번째 걸그룹은 만장일치로 탑 걸즈(TOP Girls)가 되었다.
.
.
.
강한솔과 차소미는 팀플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잠마동 1화를 끝까지 보았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데뷔 예정인 4명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신예리
윤은지
김경빈
김다빈
이름은 이내 검은색 배경 아래로 침잠되며, 하나의 문구가 박혔다.
[TOP GIRLS]
차소미는 그 이름을 보고 미소지었다
‘무림사화보다 백만 배 낫네.’
*
옥수진은 잠마동 영상의 반응을 보며 깜짝 놀라고 있었다.
‘조회수가 엄청 잘 나오고 있네?’
처음 천마가 할리우드 CG 팀까지 불러와서 영상을 만들 때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할리우드 CG 팀이 예산을 엄청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 대중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심지어 그 인기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았다.
잠마동 영상은 어느새 해외 인기 동영상 차트를 떡하니 차지하더니, 거기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전 쭈꾸미 게임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외국에서는 잠마동이 쭈꾸미 게임과 비슷하다며 잠마동 + 쭈꾸미를 합쳐 ‘잠꾸미 게임’이라고 불렀다.
몇몇 뉴튜버들은 진짜 VR 장비를 동원해서 '잠마동에 나온 관문 깨기' 같은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으니, 여러 OTT 플랫폼에서 제작 지원을 해주겠다는 제안도 슬금슬금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정도면 CG에 들어간 비용도 충당할 수 있겠는데?’
벌써부터 시즌제로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다.
옥수진은 옆에서 빽빽하게 걸그룹의 스케줄을 적어 내리는 천마를 보며 감탄했다.
“역시, 천마님은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뭐, 그렇지.”
물론 아니다.
단지 천마는 걸그룹에 진심이었을 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차선우는 사람들에 잠마동에 관심을 가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타이틀 곡은 어제 완성했고, 오늘 안토니오가 온다고 했지. 슬슬 한국에 도착했을 것 같은데.”
“뮤비 감독님도 세트장 준비가 끝나간다고 연락했어요. <대한의 검성> 감독님 소개 덕분에 대단한 분이랑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지금까지 차선우가 활동하면서 쌓은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안무가부터 뮤비 감독까지, 그 면면이 화려하다.
차선우는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걸그룹을 보며 생각했다.
이정도면 국내를 장악하는 것도 멀지 않았다고.
‘일단 이번 걸그룹으로 아크 엔터를 누르고.’
다음으로는 펄 엔터가 있다.
하지만 제이맨이 프로듀서로 있는 펄 엔터는 흔들리는 중이다.
얼마 전 대표가 쫓겨났으며, 대표의 라인인 제이맨도 함께 휘청거리는 모양이다.
그 타이밍을 노리고 국내의 대형 유통사인 코코넛이 펄 엔터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걸그룹이 대성공을 이룬다면?
펄 엔터를 먹을 만한 자본력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정말 천마신교가 한국 시장을 통일하는 셈이다.
차선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잠마동을 통과한 네 사람이 천마신교에 도착했다.
4명은 이제는 관례가 되어버린 ‘현판 인증샷’을 찍은 다음 본격적으로 회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우리 이제 데뷔하는 거야?”
“천마님이 만드신 타이틀곡도 기대된다.”
“분명 엄청 좋을 거야!”
“나는 하루만 좀 쉬고 싶어.”
그들을 부푼 꿈에 젖어 앞으로 걸을 꽃길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들 앞에 펼쳐진 건 불꽃길이었다.
네 사람 앞에 나타난 천마는 그녀들 앞에서 앞으로의 스케줄을 공개했다.
“자, 이제 데뷔 2달 남았다. 오늘부터 타이틀 곡 연습 들어가야 해. 하지만 당장은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하니 메이크업을 받으러 간다. 연습은 프로필 사진을 다 찍고 오후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그걸 시작으로 두 달 치 스케줄이 빡빡하게 차 있었다.
네 사람은 당황했다.
“...? 휴식은 없나요?”
“우리 잠마동 나온 거 맞지?”
그렇게 네 사람의 짧은 천마신교 구경이 끝나고, 본격적인 데뷔 준비가 시작됐다.
*
아크 엔터에서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슈퍼A’.
슈퍼A는 총 5명의 멤버로 구성되었으며, 위캔걸즈 멤버는 두 명이 참여했다.
정식 데뷔까지 몇 달 남지 않아서 슈퍼A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컨셉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가는 날.
아직 선배들이 오지 않아 위캔걸즈 멤버 두 명은 방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보는 그녀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왜 잠마동 얘기밖에 없냐.”
며칠 전만 하더라도 홍보팀에서 기사를 뿌려 연예 뉴스에는 슈퍼A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천마신교에서 새로 만드는 걸그룹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근데 그거 알아?”
“뭘?”
“얘네 우리랑 데뷔 일정이 겹칠 거 같다는데?”
“와, 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두 사람은 코웃음을 쳤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죽은 가수도 멱살 잡고 되살린다는 천마가 작정하고 만든 그룹이다.
분명 엄청난 곡을 가지고 나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잠마동의 인기도 심상치 않다.
단순 뉴튜브 콘텐츠를 넘어서, 거의 정규 프로그램이라 할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들리는 바로는 인기가 너무 좋아서 1화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OTT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제작 지원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기존에 활동한 게 있어서 팬덤 쪽은 슈퍼A가 훨씬 강해보이지만,
대중성은 글쎄?
천마신교에서 만드는 녀석들이 압도적으로 보인다.
기사들은 벌써 신나게 경쟁 구도를 만드는 중이었다.
당연히 위캔걸즈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진짜 짜증나. 슈퍼A도 하기 싫었는데.”
솔직히 위캔걸즈는 슈퍼A에 반쯤은 강제로 참가했다.
그들은 슈퍼A라는 프로젝트 그룹이 없어도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 '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참여했으니 센터라도 시켜주면서 밀어줄 줄 알았는데, 슈퍼A의 센터는 최연장자인 1세대가 맡았다.
“솔직히 센터도 우리가 맡아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제일 잘 나가는데?”
“서른 넘어서 걸그룹 센터라고? 센터는 그룹의 얼굴인데. 다 늙어가지고 무슨 센터.”
활동 연차가 쌓였는데도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활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막내라는 게 말이 되냐? 선배들 눈치 보는 거 불편해 죽겠어.”
불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타이틀 곡 들어봤어?”
“말하지도 마. 위캔걸즈 컨셉이랑 너무 비슷하더라.”
위캔걸즈는 키치하고 발랄한 컨셉을 밀었는데, 이번 프로젝트 그룹의 컨셉도 이와 비슷했다.
그 말은 본진인 위캔걸즈의 이미지 소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 말이다.
회사에서는 무조건 성공할 프로젝트라고, 글로벌 그룹이 되어보자며 설득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생각이 많아졌다.
둘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와중, 선배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너희 먼저 와있었네?”
그러자 위캔걸즈 멤버들은 벌떡 일어나서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시전했다.
“에이, 당연히 저희가 먼저 와있어야죠.”
“점심은 드셨어요?”
“응, 우리는 방금 먹고 왔어. 이제 슬슬 출발할까?”
“네, 언니. 그런데 오늘 화장 너무 잘 먹었는데요?”
바야흐로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스튜디오로 출발한 그들은, 천마신교의 탑 걸즈를 만나게 된다.
< 마교의 유전자를 가진 걸그룹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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