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능과 본업 사이 >
1월.
연말에 이어 각종 시상식과 콘서트, 행사로 분주한 달이었다.
원래라면 컴백 비수기로 꼽히는 달이지만.
올해는 달랐다.
천마신교의 탑걸즈와 아크 엔터의 프로젝트 걸그룹이 데뷔했기 때문이다.
쇼케이스 취재를 위해 나온 기자는 주머니 속 핫팩을 주물럭거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춥다 추워. 빨리 들어가야지.’
차가워진 공기가 두꺼운 패딩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백팩에 크로스백까지,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온 기자는 진성 아트 스퀘어에 들어갔다.
‘진성 아트 스퀘어에서 쇼케이스라니. 역시 천마가 대단하긴 하네.’
한 달 전, 진성 그룹의 김소현 이사장은 국제 전시회를 열었다.
5개국을 투어하는 전시회인데, 천마가 만든 하이퍼 팝 장르를 기조로 한 사운드트랙을 전시와 곁들이며 외국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진성 문화예술재단의 김소현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천마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칭찬했고, 천마는 진성 아트 스퀘어 시설을 이용하는 데 특혜를 받았다.
아트 스퀘어 주변에는 벌써 수백 명의 팬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자 쇼케이스를 하고서 팬 쇼케이스를 한다고 했지?’
이 추운 날에 벌써부터 저렇게 모이다니.
신인 걸그룹인데도 화력이 장난이 아니다.
따뜻한 내부로 들어온 기자는 패딩의 지퍼를 풀고 안주머니에 있는 기자증을 꺼내 들었다.
[탑걸즈 쇼케이스
2024.01.11 MON 20:00 P.M]
우아하고 고급진 홀에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기자는 안내에 따라 쇼케이스가 열리는 강당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기자는 핸드폰을 열었다.
시각은 7시 30분.
‘쇼케이스가 8시니까 늦지는 않았네.’
기자는 빠르게 장비를 세팅했다.
메고 온 백팩에서는 노트북을, 크로스백에서는 커다란 렌즈를 가진 카메라가 나왔다.
능숙한 손길로 장비를 세팅하고, 인터뷰 내용을 곧바로 원고화할 준비까지 끝냈다.
여유가 생기니 이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평소 쇼케이스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와 있었다.
강당이 넓어서 수용인원이 많기도 했고, 아무래도 최근 여러 가지 일로 이슈가 됐기에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그때였다.
“선배님. 자주 뵙네요?”
눈이 마주친 후배 한 명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기자는 후배와 악수를 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얼마전에 슈퍼A 쇼케이스에서 봤었지?”
두 사람은 사흘 전에 있었던 아크 엔터의 쇼케이스에도 초대받았었다.
프로젝트 걸그룹 ‘슈퍼A’의 데뷔 무대였다.
후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난번 슈퍼A 무대는 마음에 드셨나봐요? 기사 잘 써주셨던데.”
기자는 슈퍼A의 쇼케이스를 떠올렸다.
근래 있었던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멤버 한 명을 급하게 교체했는데도, 무대 퀄리티가 뛰어났다.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못써줄 이유가 없지. 모든 멤버가 메인급이잖아. 지금까지 쇼케이스 다니면서 소름 돋은 건 처음이었어.”
“다들 연차가 있으니 여유가 있어서 맛깔나더라고요. 반응도 좋고. 아쉬운 게 있다면 가사이긴 한데.”
“음···.”
완벽한 노래. 완벽한 비트. 완벽한 멤버. 완벽한 실력.
그런데 하필 가사가···.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는 아크 엔터가 아니라, 탑걸즈의 쇼케이스였으니까.
대신 기자는 탑걸즈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 탑걸즈도 장난 아니던데? 음원 들어봤지?”
2시간 전.
그러니까 18시에 탑걸즈의 뮤비와 음원이 공개되었다.
후배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 우다다다 말했다.
“당연하죠. 여기 오면서 계속 들었는데 역시 천마네요. 명곡은 듣자마자 느낌이 오잖아요? 어떻게 저지클럽 비트를 가져올 생각을 했지? 탑걸즈 컨셉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쏟아지는 감탄을 들으며 선배 기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탑걸즈의 미니 1집「HeRose (히어로즈)」.
그 타이틀곡 ‘부릉부릉’은 그가 듣기에도 인상 깊었다.
부와아앙하는 시원한 바이크 배기음과 함께 시작되는 톡톡 튀는 브레이크 비트.
오면서 잠깐 들었는데도 벌써 머리에 박힌 걸 보면, 역시 천마의 비트메이킹 솜씨는 명불허전이었다.
“청량한 하이틴 감성을 잘 살리면서도 힙하더라.”
“그쵸? 진짜 작정하고 만든 게 느껴지더라고요. 어? 이제 곧 시작하겠다. 어쨌든 선배님 화이팅 하시고, 조만간 술이나 한잔해요.”
말을 마친 후배는 자리로 돌아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7시 59분.
기자는 어쩐지 이번 쇼케이스가 궁금해졌다.
‘노래랑 뮤비는 완벽했는데 라이브는 어떨까?’
첫 무대.
첫 쇼케이스.
신인이라면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그들이 먼저 마주하는 건 무조건적인 환호를 보내는 팬이 아니라, 평가하려고 모여든 기자들이다.
물론 기자들도 천마신교의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니 나쁜 기사를 쓰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훈훈하고 따사로운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자신들을 품평하려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신인은 어떤 무대를 보여줄 수 있을까?
20시 00분.
탑걸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듯이 당당하게.
박수는 없다.
강당 안에는 찰칵거리는 셔터음과 키보드가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사무적으로 들려왔다.
기자 역시 열심히 손을 놀리며 평가했다.
‘의상은 얌전한 편이네?’
플레어스커트에 재킷을 걸쳐서 얼핏 보면 교복 느낌이 나기도 했다.
짧은 자기소개를 한 후, 천마신교 측에서 섭외한 MC와 함께 토크를 시작했다.
기자는 기계적으로 원고를 쓰며 생각했다.
‘연습을 많이 했나? 경력직 신입처럼 보이네.’
며칠 전에 갔다 온 아크 엔터의 쇼케이스처럼 멤버들은 여유가 넘쳤다.
제스처부터 말투, 표정이 모두 자연스럽다.
물론 이건 잠마동에서 진법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며 수련을 한 결과였다.
5분가량 간단한 토크를 한 후에,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 준비를 하느라 잠깐 조명이 꺼졌다.
문득 기자는 사흘 전에 보았던 아크 엔터의 무대가 떠올랐다.
‘무대 하나는 레전드였지. 괜히 아크 엔터에서 글로벌이니 뭐니 떠들어댔던 게 아니라니까.’
탑걸즈는 신인이니 그쪽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그룹이 계속 엮인데다가, 아크 엔터의 레전드 무대를 고작 사흘 전에 봐서인지 기자의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뭐, 서로 민망하지 않게 무대 위에서 실수만 하지 않으면 좋게 써줄···.’
부와아아앙-
그때 바이크 사운드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기자의 시선이 무대 위로 고정되었다.
오프닝을 연 건, 쌍둥이 중 한 명인 메인보컬 다빈이였다.
- 뭐 그리 빠르지는 않은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우리 사이
‘얘 음색이 장난 아니네. 왜 음원보다 좋게 느껴지지? 현장이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건가?’
기자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지금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장소가 진성 아트 스퀘어라는 것이다.
이 장소에서 <천마의 음악방송>을 함께 진행하고 있으며, 천마는 여기에 진법을 깔아놨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탑걸즈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130 중후반대의 BPM.
클럽 리듬에 기반을 둔 호쾌한 비트는, 신인들의 당찬 에너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했다.
‘고작 네 명뿐인데. 무대 장악력이 대단하군.’
규모가 있는 무대이지만, 비어 보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손끝까지 자로 잰 듯 맞아떨어지며, 객석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까지 허투루 쓰지 않는다.
격한 안무에도 흔들림 없는 보컬은 그들이 가진 에너지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정신없이 무대에 집중하다 보니 첫 벌스가 빠르게 지나갔다.
보통은 이후에 프리-코러스가 따라오지만, 타이틀곡인 ‘부릉부릉’은 이를 생략하고 곧바로 후렴구로 점프했다.
탑걸즈가 빙그르르 돌며 동선을 바꿨다.
플레어스커트 자락도 동선을 따라 나풀거린다.
그 새하얀 자욱이 발랄한 신입생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대형이 바뀌는 순간,
—.
악기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반전된다.
동시에 탑걸즈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졌다.
지금까지의 느낌과 완전 다른, 스포티하고 힙한 의상이 드러났다.
“와우!”
기자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센터인 신예리가 맨 앞에 섰다.
차가운 얼굴에 어린 독기 가득한 눈빛.
'반전이 제대로인데?'
교복을 입었을 때의 파릇한 느낌이 싹 사라진다.
이내 나오는 바이크 핸들을 조종하는듯한 포인트 안무.
- 부릉 부릉 부릉
안무도 찰떡같다.
한없이 청량하던 소녀가 학교를 나오자마자 보여주는 일탈 같다.
오기 전에 음원도 몇 번 돌려 듣고 뮤비도 미리 봤다.
하지만 현장에서 무대를 직접 보니 또 다르다.
천마가 기획한 ‘마교 소녀’가 어떤 컨셉인지 확 와닿는달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기자는 문득 깨달았다.
‘사진을 안 찍었네?’
사진은커녕 기사도 한 줄 적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키보드로 손가락을 옮겼지만,
타다다..다···닥.
어느새 느려지는 손가락과, 무색하게도 무대로 빠져드는 시선.
기자는 본능과 본업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
“고생하셨습니다!”
쇼케이스가 모두 끝났다.
무대를 마친 탑걸즈는 무대 뒤편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함께 고생한 스탭들에게도 잊지 않고 인사를 했다.
스탭들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데뷔 축하해요!”
“고생했어요. 얼른 들어가서 푹 쉬세요.”
“떨지 않고 잘하시던데요?”
시끌벅적한 그 인사에 신예리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실감했다.
‘내가 데뷔를 했다고?’
몇 주 전만 해도 논란 때문에 잠도 못 잤다.
천마의 특제 수면송을 듣고 나서야 겨우 취침할 수 있었는데, 그게 까마득한 먼일처럼 느껴진다.
리더인 윤은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때, 포기 안 하길 잘했지?”
이연진이 폭로글을 터뜨렸을 때는 멘붕이 왔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아크 엔터의 사진 조작까지.
신예리는 팀에 피해를 끼치는 것만 같아서 그냥 여기서 그만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때 윤은지가 한마디 했었다.
‘야, 원래 인생은 병신보다는 썅년으로 살아야 해.’
‘...!’
‘아니, 이건 썅년도 아니잖아.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은 신예리는 마음을 다잡고 온전히 데뷔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길 잘한 거 같았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데뷔 한 방에 싹 날아가고 있었다.
무대 인사를 마치고 뒤늦게 내려온 쌍둥이도 말했다.
“대박. 예리 언니 오늘 한 번도 안 넘어졌어!”
“아까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잘 넘어갔으니까.”
“맞아. 그정도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쌍둥이의 칭찬에 신예리는 멋쩍게 웃었다.
오늘 하루, 신예리는 단 한 번도 덜렁거리지 않았다.
이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예리 덜렁 총량의 법칙’은 불변의 진리였다.
이제 차고 있던 마이크를 넘겨주고 대기실로 돌아가려는데.
“어어? 이거 왜 이러지?”
마이크를 풀던 신예리의 손이 꼬이면서, 마이크의 선과 머리카락과 액세서리가 동시에 얽혀버렸다.
“잠깐만요. 이거 진짜 안 풀리는데요?”
신예리가 이상한 자세로 몸을 배배 꼬며 마이크 선을 풀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선은 단단하게 엉킬 뿐이다.
보다 못한 스탭이 말했다.
“...예리 씨, 지금 더 엉키고 있어요. 저희가 할게요.”
결국 스탭 두 명이 달라붙고 나서야 신예리는 마이크 선을 풀어낼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다들 터덜터덜 걸어가며 말했다.
“근데 오늘 진짜 피곤하다. 얼른 숙소 들어가서 쉬고 싶어.”
“나는 차 안에서 기절할 것 같아. 씻는 건 내일 할까?”
“지금 머리에 왁스 떡칠된 건 알고 있지? 그러다가 탈모 온다.”
“...탈모는 절대 안 되지.”
최근 데뷔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새벽 3시까지 연습을 하고 딱 4시간을 자고 일어난 다음, 본격적으로 쇼케이스 준비를 시작했다.
쇼케이스가 끝나고 긴장감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리더인 윤은지가 말했다.
“근데 매니저 님은 어디 가셨지?”
쇼케이스가 끝나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매니저가 보이질 않았다.
“글쎄. 잠깐 어디 얘기하러 가신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신예리는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때 대기실 안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래도 코코넛 엔터는···.”
대기실 안에서 매니저가 통화하는 소리였다.
큰 목소리가 아니여서 문을 제일 먼저 열었던 신예리만 들을 수 있었다.
‘뭐지? 코코넛 엔터는 왜?’
거기는 요즘 펄 엔터와 인수니 뭐니 하며 무슨 문제가 있는 곳 아닌가?
신예리가 멈칫하는 순간, 통화를 하던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매니저가 황급히 전화를 끄며 다가왔다.
“어, 어. 벌써 왔니?”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며 신예리의 뒤에 있던 다른 멤버들도 우르르 들어왔다.
“왜 문을 열다 말고 있어?”
“우와, 이게 뭐예요?”
그들은 대기실에 들어오더니 둥둥 떠다니는 풍선 장식을 보고 감탄했다.
매니저는 머쓱해 하며 말했다.
“그, 뭐. 축하해주려고. 대표님은 케이크 픽업하러 갔는데,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지.”
“오오. 우리는 매니저님 안보여서 찾고 있었는데. 완전 감동!!”
“하하하.”
데뷔 축하 서프라이즈에 정신이 팔린 멤버들을 보며, 신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코코넛 엔터?’
< 본능과 본업 사이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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