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강호행 (1) >
6개월 동안 진행된 월드 투어 콘서트가 끝났다.
시작할 때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가을이 지났다.
‘시간 참 빠르다니까. 귀환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네.’
방구석에서 시작한 음악방송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음악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키고, 아티스트를 키워내는 과정은.
무림에서 마교를 중원 제일로 키워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어제 LA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로 월드투어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호텔에 짱박혀서 쉬려는데, 로페즈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무슨 일이세요?”
“허허.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인가. 어제로 투어 일정이 모두 끝났다고 하길래 겸사겸사 연락했지.”
이번 월드투어 콘서트는 로페즈 뮤직 그룹을 통해서 진행했다.
로페즈 회장쯤 되는 사람이 아티스트의 콘서트를 일일이 챙기지는 않지만, 나는 달랐다.
로페즈 뮤직 그룹은 이전부터 동아시아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천마신교 덕분에 그 기회를 쉽게 얻어냈다.
천마신교가 일본에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나도 게임의 파워가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지.’
극진 3로 미니롱도 대박났지, 둠스카이 4도 대박났지, 확장팩에 들어간 탑걸즈도 잘나가지.
특히 천마신교 세계관을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게 유효했다.
‘조선에서 타임리프한 천마’라는 내용을 기조로 한 천마 유니버스가 의외로 일본 팬들의 취향을 저격했나보다.
모니터링하던 강여름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어? 천마님 팬픽도 생겼네요?’
‘.......’
‘꼭 읽어봐야지! 번역본은 안 들어오나?’
그런 건 제발 안 들어왔으면 한다.
아무튼 일본에서 올린 수익을 볼 때마다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로페즈 뮤직 그룹에 빌린 돈을 모두 상환하고도 남아, 다시 지갑이 두둑해졌다.
천마신교 지분을 탐내던 로페즈 회장은 상당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천마타운을 건설한다는 말은 들었네. 사옥을 지으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텐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게나.”
이 영감이 이제는 아주 대놓고 속셈을 드러낸다.
“저 돈 많습니다만? 그리고 이제 부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연락한 겁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음반을 낼 때 영어 버전을 따로 내보는 건 어떤가 해서 말일세. 아니라면 작사가에게 맡겨서 영어 가사를 써보는 것도 좋고. 아무래도 이쪽에서 한국어는 너무 낯설거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언어의 장벽이 생각보다 무시할 게 못 되어서 말일세. 이번 3집 앨범도 영미권에서 성적이 너무 아쉬워. 음악성만 가지고서는 빌보드 상위권도 노려볼 만했는데 말이야.”
내가 종종 들었던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어는 부족해요. 그리고 미국인이 나를 사랑한다면,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나도 사랑할 테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뭐,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로페즈 회장은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전화를 마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일통이라···.”
무림에서 천하일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내가 상대보다 강하면 끝난다. 두들겨 패면 서열이 정리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무공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한다.
단순히 개쩌는 멜로디를 만들고 영어로 가사를 써서 좋은 성적을 내면 일통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는 어제 콘서트에 온 수만 명의 사람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국에서 하는 콘서트와 미국에서 하는 콘서트는 느낌이 달랐다.
어느 하나가 좋고고 나쁘다는 건 아니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아직 어색할 뿐.
한국 관객들은 마음 놓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고향 친구 같은 느낌이라면, 외국 관객들은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랄까.
그럼에도 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이해해보고 싶다.
그들에게 더욱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직접 겪어봐야 한다.
아무래도 이번은 거기서 시작해야 할 듯싶다.
‘할 일도 다 했으니, 애들처럼 미국이나 돌아야겠군.’
마침 호텔 근처에 미니롱과 길성진에게 추천을 받은 라이브하우스가 있다.
갑작스러운 강호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미국 LA에 있는 어느 라이브하우스.
일견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무대에 반들반들하게 묻어있는 손때는 라이브하우스가 오랜 기간 사랑받아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도 무대 위에서는 블루스 밴드가 소울풀한 목소리로 공연을 펼치고 있었고, 가게를 꽉꽉 채운 손님들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며 그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바에서도 젊은 두 남녀도 맥주를 마시며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허니, 미안해. 나도 이렇게 바쁠 줄 몰랐지.”
다만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토라진 듯했고, 여자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소속사에서 스케줄을 엄청 많이 잡아 놔서 어쩔 수 없었어. 이번이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하더라고. 나 어제까지 뉴욕에서 화보 촬영하고 왔단 말이야. 오늘 로스앤젤레스에 오자마자 허니 보려고 달려왔는데.”
여자.
그러니까 페니 로페즈는 요 몇 달 자기가 얼마나 바빴는지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그래도 2달 만에 데이트는 좀 심했어.”
디제이는 볼멘소리로 대답했지만, 이해는 했다.
페니의 말마따나 그녀는 정말로 바빴다.
로페즈 뮤직 그룹을 등에 업은 뮤파이에서 본격적으로 페니를 푸쉬해주는 덕분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미안해. 그래도 내가 지난번에 천마 콘서트 티켓도 구해줬잖아.”
디제이는 치열했던 천마의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했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그에게 페니가 표를 구해준 덕분에 천마 콘서트에 갈 수 있었다!
어제 있었던 천마의 콘서트를 떠올리자 디제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어제 천마는 디제이가 예전에 선물해준(?) 기타를 들고 타이틀곡 ‘I’를 연주했다.
그 기타를 한눈에 알아본 디제이는 뿌듯했다.
비록 빼앗기기는 했어도 천마가 콘서트에 들고 다니며 연주하는 게 영광처럼 느껴졌다.
“크흡!”
“어? 웃었다? 그럼 풀린 거다? 우리 건배나 하자!”
이래서야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디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맥주잔을 짠 부딪혔다.
디제이는 남아있는 맥주를 그대로 원샷했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골이 찌리리 울리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 식었다.
사실 디제이도 알고 있다.
페니가 얼마나 바쁜지.
천마가 만들어 준 곡으로 빌보드에 오르기 시작한 페니는, 이제 어디서나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노래가 나왔으며, 잡지를 사면 페니의 화보가 적어도 한 페이지 씩은 들어가 있었다.
페니의 스케줄 표를 볼 때마다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주 못 보는 것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디제이가 진정으로 속상한 건, 페니가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나랑 너무 비교되잖아.’
페니는 로페즈 뮤직 그룹의 딸이고, 좋은 소속사에 들어가 저 높은 곳에서 날아다니는데,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초라했다.
결혼···생각은 너무 이르긴 했지만, 종종 급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과연 어울리는 사람인걸까?’
집안 좋은 빌보드 스타와, 별 볼 일 없는 클럽의 디제이.
페니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지만, 가끔씩 마음 한구석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졌다.
어쨌든.
오랜만의 데이트이다.
‘좋은 곳에 와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지.’
디제이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 생각을 갈무리한 뒤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그런데 여기 라이브하우스도 진짜 오랜만이다. 페니 너 가출했을 때, 여기서 자주 공연했었잖아.”
“맞아. 그때는 진짜 대책 없었지.”
몇 년 전을 떠올린 페니는 키득거렸다.
그녀는 음악을 하겠답시고 다짜고짜 집을 뛰쳐나왔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다가 남자친구를 만났고, 그러다가 이 라이브하우스에서 페니는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그때는 진짜 돈이 없어서 별 궁상을 다 떨었는데. 그래도 여기에서 은근히 유명한 가수가 많이 나왔단 말이야. 하이포닉도 여기서 일했다며?”
“응 그렇다더라. 나보다 5년 전에 일했다고 들었어.”
미국의 젊은 R&B를 대표하는 하이포닉.
앨범을 냈다 하면 몇 주간 빌보드를 점령하고, 올해 그래미상의 유력한 수상자인 하이포닉도 이 라이브하우스 출신이었다.
그 이외에도 몇 년마다 한 번씩 걸출한 실력을 가진 뮤지션을 배출해서, 레이블의 캐스터도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두 연인은 당시의 일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페니가 첫 공연에서 긴장한 나머지 가사를 까먹었던 일.
흥이 오른 관객이 무대에 난입해서 함께 춤을 췄던 일.
그러던 두 사람은 이내 맥주잔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니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알렌! 우리 맥주 떨어졌어.”
그리고 잠시 뒤.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종업원이 맥주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는 다른 사람을 시키면 안 될까? 바로 앞에 바텐더가 있잖아. 나는 오늘 홀 담당이거든?”
“에이, 오랜만에 왔는데. 얼굴 좀 보려고 불렀지.”
페니는 알렌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종업원에게 친근하게 말했다.
페니가 가출했을 때, 세 사람은 쉐어하우스에서 함께 지내며 음악을 했었다.
이 라이브하우스에서 함께 공연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디제이도 반갑게 인사했다.
“여 알렌. 잘 지냈어? ”
“나야 뭐 늘 똑같지.”
악수를 한 두 사람.
디제이는 물었다.
“그래서, 이제 음악은 안 하는 거야?”
알렌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디제이는 전속 클럽도 있고, 지역 라디오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을 하고 있다.
빌보드에 오른 페니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만 알렌은 음악을 포기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건 여전하다.
그러나 그걸로 먹고 살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가끔은 일상조차도 너무 힘들어서 그저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느 순간 음악이 버거워졌고, 그래서 한때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던 알렌은 그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알렌의 표정을 본 디제이가 제안했다.
“나중에 우리 라디오에 한번 놀러 올래?”
“에이 나는 됐어. 마음만 받을게. 주문이 밀려 있어서. 잠시만.”
말을 마친 알렌은 디제이와 페니가 있는 테이블을 떠났다.
페니와 디제이.
그리고 일하면서 알게 된 여러 아티스트들까지.
알렌의 주변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음악은 나랑은 거리가 멀지.’
악기를 살 돈도 없고.
노래를 부를 시간은 더욱 없다.
집에 가면 씻고 잠들기 바쁜 알렌에게, 음악은 사치였다.
‘뭐, 부럽기는 하네.’
여전히 디제잉을 하는 친구와 이제는 빌보드에 오른 페니.
두 사람의 모습이 부럽지만,
- 여기 맥주 좀 빨리 주세요!”
“예! 갑니다, 가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알렌은 남은 미련을 모조리 털어버렸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마감이 가까워졌고, 페니와 디제이 친구는 데이트를 마치고 나갔다.
두 사람이 먹은 안주와 술잔을 치우던 알렌은 접시 아래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걸 보았다.
“......”
친구들이 팁이랍시고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돈을 보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한때는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들.
이제는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는 친구들.
잊지 않고 챙겨주는 게 고마웠다.
다만 동정을 받는 것 같아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이 돈을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으면 친구들과 벌어진 차이를 인정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알렌의 휴대폰이 울렸다.
- [알람] 월세/내일까지 꼭
종업원의 급여는 박하다.
집세에, 공과금에, 각종 고정비용을 지출하면 남는 건 조금.
하지만 페니가 남긴 팁이면, 한 달 정도는 여유롭게 살 수 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렌은 지폐를 주머니에 챙겼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마감을 하려는 순간.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알렌은 바쁘게 상을 닦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죄송한데 저희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손님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렌은 그제서야 뒤를 돌아봤다.
볼캡을 푹 눌러쓴 청년이 카운터에 있었다.
“여기서 공연을 하고 싶은데요.”
역용술을 쓴 천마였다.
< 천마의 강호행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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