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강호행 (2) >
강호행의 첫 공연을 하기 위해 방문한 라이브하우스.
안타깝게도, 천마는 사장을 만날 수 없었다.
라이브하우스에는 알렌 혼자 남아서 마감을 하는 중이었다.
“사장님은 오늘 다른 지역으로 나가셔서 내일 돌아오시는데요.”
“그래요? 그럼 여기서 공연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알렌은 천마를 보며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도 한때는 여기저기 클럽하우스를 다니며 음악을 했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알렌은 대답했다.
“제가 사장님께 말씀 전하고 그쪽에게 일정을 연락드릴게요. 그럼 연락처를 좀 주시겠어요?”
천마는 자연스럽게 품속에 있는 명함을 건네려다 멈칫했다.
멋들어진 필체로 '천마신교 대표, 차선우'라고 적혀있는 명함.
검은 배경에 글자는 황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명함은 어디서 봐도 눈에 띈다.
이걸 꺼내면 역용술까지 하고 이곳에 온 보람이 없다.
천마는 대신 알렌의 핸드폰에, 미국에서 사용하는 핸드폰의 번호를 입력해주었다.
“그럼 오디션이 잡히는 대로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천마가 찍어준 번호를 저장하던 알렌은 이름을 저장하는 칸 앞에서 멈췄다.
“그런데 그쪽 성함이···?”
천마는 지금 얼굴부터 목소리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고민하던 천마는 미국에서 자신을 ‘파이퍼(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걸 떠올렸다.
천마는 씩 웃으며 말했다.
“파이퍼입니다.”
*
다음 날 아침.
로스앤젤레스의 9월은 맑고 온화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하늘보다 더욱 푸른 바다가 훤하게 보이는 호텔의 최상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파이퍼, 아니 천마가 일어났다.
“오랜만에 푹 잤네. 하긴, 콘서트까지 조금 달리기는 했지.”
공연을 준비한답시고 매일같이 무대 리허설을 하며 내공을 펑펑 사용했더니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오랜만의 여유를 느끼며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스케줄을 짜볼까?”
이전에 강호행을 했던 미니롱과 길성진에게 괜찮은 식당이나 공연장을 추천받아 핸드폰에 저장해놓았다.
그리고 어제 잠들기 전 근처에 있는 핫플레이스를 일차로 추려놓았다.
핸드폰을 켜서 리스트를 확인하려는데, 마침 문자 한 통이 왔다.
- 오늘 5시 오픈 전까지 가게에 오시면 됩니다.
어제 만난 알렌이라는 종업원에게 온 메시지였다.
문자가 도착한 시각은 새벽 6시.
천마가 혀를 내둘렀다.
“일찍 일어났네. 어제 마감까지 한 것 같은데.”
아무튼 일정도 잡혔으니 천마는 그에 맞춰 스케줄을 짜봤다.
본격적으로 강호행을 시작하기 전에,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미니롱과 길성진이 강력하게 추천해준 식당이 마침 호텔 근처에 있었다.
두툼한 베이컨과 포실한 스크램블 에그에, 짭조름한 소시지까지.
미국식 전통(?) 아침을 끝내주게 한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인데도 웨이팅이 좀 있었다.
천마는 참을성 있게 기다린 후 테이블에 앉아 주문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천마가 시킨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주문하신 블랙퍼스트 세트 나왔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
“혹시···?”
어제 라이브 하우스에서 마감을 하고 있던 알렌이었다.
익숙한 솜씨를 보아하니 하루 이틀 일한 게 아닌 듯했다.
천마를 알아본 알렌도 멋쩍게 웃었다.
“여기서 또 뵙네요. 아까 문자 보낸 건 확인하셨죠?”
“네. 늦지 않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천마는 알렌이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하며 식사를 했다.
잠시 후, 끝내주는 식사를 한 천마는 만족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버스커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해변가.
‘다들 실력 좋네. 뉴욕에서는 지하철 버스킹을 하기 위한 오디션까지 열린다던데.’
한참 공연을 보던 천마는 핸드폰 진동에 정신을 차렸다.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안무가 안토니오 로시의 연락이었다.
- 헤이! 잘 지냈어? 미국에 왔는데 얼굴이나 한번 봐야지. 내가 이번에 끝내주는 라이브 하우스를 소개해주려고 하는데. 시간 좀 어때? 참고로 잘나가는 친구도 한 명 소개시켜줄게.
끝내주는 라이브 하우스와 잘나가는 친구라.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일단은 강호행이 먼저지.’
당분간은 강호행에 집중하고 싶었다.
간단하게 답장을 한 천마는 갈증을 느꼈다.
전통 미국식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좀 짠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근처에 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중 간판의 모양이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에 방문한 천마는 카운터에서 주문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테이크아웃이요.”
잠시 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바리스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천마에게 건넸다.
그런데, 바리스타의 얼굴이 이번에도 낯익다.
“...?”
역시나 알렌이었다.
깔끔한 앞치마를 두른 알렌은 바리스타로 변신해있었다.
벌써 오늘만 두 번째.
천마와 알렌은 뻘쭘한 눈인사를 나눴다.
‘진짜 바쁜 사람이구만.’
라이브하우스 알바부터 시작해서.
식당 서빙과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직장만 벌써 세 곳이다.
한창때의 옥수진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워커홀릭.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천마는 시간을 좀 더 보내다가, 알렌이 알려준 시각에 맞춰 라이브 하우스에 방문했다.
그리고, 이제 막 오픈 준비를 시작한 라이브 하우스 홀에서.
알렌이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
*
라이브하우스의 사장실.
사장과 차선우 사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사장은 LA에서 오랫동안 라이브하우스를 운영해왔고, 그만큼 많은 스타들이 라이브 하우스를 거쳐 갔다.
최근 R&B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하이포닉과 라이징 스타 페니 역시 무명 시절 이곳에서 공연을 했었다.
그래서 사장은 이렇게 찾아오는 무명 가수를 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속에서 숨은 보석을 발굴해내는 것에 사명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 다짜고짜 연락처만 남기고 간 동양인 청년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정성스러운 프로필과 함께 공손히 찾아오는데 말이다.
‘이건 또 뭐하는 놈이지?’
사장은 차선우를 훑어보았다.
여유로운 표정과, 그것보다 더 여유로운 분위기.
무명 가수 같은 어리숙함이 보이지 않아서 호기심이 생긴다.
예전에 하이포닉을 발굴했을 때의 직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일단 사장은 예의를 갖춰 물었다.
“어제 제가 다른 지역에 나가 있어서 제대로 된 소개를 못 들었네요.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음. 파이퍼라고 불러주세요.”
‘파이퍼’라고 하면 미국에서 흔한 성씨이긴 한데, 다짜고짜 이름도 없이 달랑 파이퍼라는 말을 들으니 예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장은 차선우가 파이퍼든, 똥이든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차선우의 목소리.
그걸 들은 순간 이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미성이지만 마냥 맑지만은 않고, 개성이 묻어나는 듯한 목소리.
이름을 말하는 짧은 순간에도 흠칫할 정도였는데, 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하이포닉 이후로 새로 찾은 숨은 보석이 될지도.’
덕분에 사장의 태도는 조금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좋아요. 파이퍼 씨. 저희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럼 그전에 파이퍼 씨의 실력을 알아봐야 할 거 같은데요. 지금까지 낸 음반이라던가 프로필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어디 밴드에 소속되어 있나요? 사실 제가 파이퍼 씨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 말에 차선우는 난처해졌다.
지금까지 천마로서 쌓은 경력은 화려하다.
하지만 파이퍼로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제 즉흥적으로 만든 부캐니까.’
그렇다고 이제와서 천마라는 걸 밝히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차선우가 말을 돌렸다.
“...경력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실전이죠. 한번 노래부터 직접 들어보시죠?”
차선우가 경력을 얘기하지 않고 말을 돌리는 듯하자 사장은 의심스러워졌다.
라이브 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공연 경험이 전무한 초짜를 올리면 곤란하다.
‘뭐야? 설마 공연 경험도 없이 여기에 온 건 아니겠지?’
그래도 저 사기적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멜로디는 들어보지 않고 못배기겠다.
일단 차선우가 원하는 대로 자리는 만들어줬다.
오픈하기 30분 전이라서 무대는 세팅이 되어있었다.
차선우는 달리진 목소리에 적응하기 위해 간단히 발성 연습을 했다.
“두루루루루루루루”
원래 천마의 외모는 선이 굵고 단단하다.
하지만 지금은 ‘옥면서생’이라 불릴 법한 여리여리한 외모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두상이 바뀌다 보니 목소리 톤도 달라졌다.
원래 천마의 트레이드 마크는 묵직하게 들어오는 저음이지만, 지금은 누가 들어도 감탄할 만한 미성을 가졌다.
사장이 저 옆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차선우는 무슨 노래를 부를까 고민했다.
잠시 고만하다 선택한 건, 최근에 계속 불렀던 타이틀곡 ‘I’ 였다.
원래는 기타를 메인 악기로 가져가는 노래지만, 따로 기타를 가져오지는 않아서 홀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코드 진행이야 머릿속에 박혀있으니 피아노 버전으로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은 차선우는 필살기를 썼다.
내공을 담아 건반을 두드린 것이다.
라이브하우스에서 쓰는 피아노는 좋은 악기이긴 했지만 어디 유명 콩쿠르에서 쓸 법한 명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차선우가 피아노를 치는 순간, 남다른 울림이 퍼져나갔다.
무림에서 차선우는 심음의 경지에 이른 적이 있었다.
아직 그 경지까지는 까마득했지만, 음에 마음을 담는 법은 알고 있다.
사장은 첫 소절을 듣자마자 반했다.
‘숨은 보석이 아니라 잘 세공된 보석인데?’
사장도 ‘I’라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다. 몇몇 아티스트가 천마의 기타 솔로를 커버하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천마의 노래를 온전히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파이퍼라는 청년은 그 노래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피아노 버전으로 재해석해서 말이다.
‘천마를 커버한 사람들 중 최고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차선우의 노래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발성 운동을 해와서 탄력감 있는 목소리.
깨끗한 미성 안에서 생동하는 그루브.
다른 나라의 언어인데도 느껴질 수 있는 깊이 있는 표현력.
사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한번 같이 가보죠.”
사장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하지만 이곳은 유명한 라이브하우스라서 몇 달 치 공연 스케줄이 꽉 차 있다.
그래도 종종 공석이 날 때가 있는데, 무명 가수가 기획사 캐스팅 팀의 눈에 들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줄을 확인하던 사장이 유쾌하게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2주 뒤 토요일 저녁이 비었어요.”
“그럼 그때 하기로 하죠.”
이때만 해도 천마는 몰랐다.
부캐가 미국 음악계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
.
.
2주 뒤, 라이브하우스.
천마의 첫 공연이 있는 날이 다가왔다.
마침 특별한 손님 두 명도 와있었다.
유명한 안무가인 안토니오 로시와,
그가 천마에게 소개해주려 했던 잘나가는 친구, 하이포닉.
두 사람은 특별히 마련된 자리에서 무대를 보았다.
무대를 보던 안토니오는 아쉬운 듯 말했다.
“천마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다행히(?) 안토니오의 바람대로, 그 자리에는 이미 천마가 있었다.
< 천마의 강호행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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