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강호행 (4) >
공연은 끝났다.
사람들은 라이브 하우스를 떠났다.
진짜 LA의 해변을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었다느니, 역대급 커버였다느니.
저마다 오늘 있었던 공연에 대해 떠들며, 문을 나서기 전 아쉬운 듯 무대를 한 번씩 힐끔 쳐다보았다.
하이포닉을 시작으로 몇몇 레이블 관계자는 천마에게 컨택해보겠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텅 빈 가게 안.
아직 여운이 남은 가운데, 알렌은 혼자서 마무리를 했다.
평소라면 빠르게 마감을 끝내고 퇴근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겠지만.
오늘따라 정리하는 손은 굼뜨기만 했다.
밀대로 바닥을 밀다가도 힐끔.
떨어진 쓰레기를 줍다가도 힐끔.
알렌은 연신 무대를 쳐다보았다.
“......”
불이 꺼진 무대 위.
그 위에서 공연을 하던 청년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인다.
‘진짜 끝내줬지.’
LA의 한 조각을 떼어 무대 위에 올려놓은 듯, 생생한 무대였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알렌이 꿈꾸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도 딱 저렇게만 노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아니다.’
알렌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음악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한때는 자신이 가진 재능 중에서 노래가 제일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
음악에 올인하면 뭐라도 될 줄 알고 해봤는데, 개털이 됐다.
어렸을 때야 호기롭게 큰소리 뻥뻥 치고 다녔지만, 성과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제는 낭만 하나로만 먹고 살기에 버거워졌다.
알바와 병행하면 계속할 수야 있겠지만, 나이 먹어서까지 제대로 된 경력 없이 알바만 전전하기도 그렇고.
페니와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도, DJ처럼 어디 소속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매달릴 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그래서 지금 알렌은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길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중이다.
네 가지가 넘는 알바를 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공부든 기술이든,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이미 음악에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갖다 바쳤던지라, 남들과 같은 선상에서 새 출발을 하려면 남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돈을 모은 다음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든가, 기술을 배워서 남들처럼 살기로 했다.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여유가 되면.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
당분간 음악은, 그냥 마음속에 묻어놓은 채로.
이제는 완전히 정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천마의 공연은 정말 좋았다.
그게 문제였다.
너무 좋으니까 나도 모르게 ‘저렇게 되고 싶다’하는 마음이 든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당장이라도 건반을 두드리며 시원하게 한 곡 뽑아보고 싶다.
하지만 그 감정이 마냥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왜 불편한 걸까?
고민하던 알렌은, 자신이 무대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어정쩡하게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신.
그의 어정쩡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했다.
마음 속으로는 현명하게 타협했다고 되뇌었지만, 사실 알렌도 알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음악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다른 수많은 일자리가 있는데도 이 라이브 하우스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알렌은 무대를 보았다.
텅 빈 무대가 유난히도 눈에 밟힌다.
지금 이대로 떠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알렌은 발을 내디뎌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차분하게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텅 빈 라이브 하우스, 아무도 없는 무대.
여기서 그가 건반을 치든 말든, 노래를 부르든 말든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그에게 달린 문제.
수많은 고민이 손끝에 담겼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결정을 내리는 건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이다.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텅 빈 라이브 하우스에 퍼진다.
그리고 건반 소리에 맞춰.
알렌의 뒤편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천마였다.
*
천마는 2주 동안 LA에 머무르면서, 알게 모르게 알렌과 동선이 많이 겹쳤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알렌과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주워듣기도 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한때 알렌이 음악을 했다는 것도.
이제는 음악을 포기했다는 것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사는 축복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깊숙한 열망을 한구석에 밀어놓고, 일상을 살아나가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확정된 실패 앞에서도,
자그마한 열정을 불태우며,
악기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알렌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관람객의 신분에 머무르며 이 도시를 관조하던 천마는.
처음으로 삶과 삶이 맞닿은 느낌이 들었다.
‘와, 이런 기분은 정말···오랜만인데.’
감동이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올라온다.
‘천마’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동안 경험을 한 게 너무 많다.
그중에는 남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기 힘든 경험들도 많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흥이 없다.
천마를 오래된 서재에 비유하자면, 그곳에는 ‘경험’이라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것이다.
이미 가득 찬 서재에서는 새로운 책을 꽂아 넣기도, 이전의 낡은 책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알렌의 모습은 천마에게 책갈피가 되어주었다.
알렌의 삶을 보는 순간,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끔은 삶이 너무 치열해서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모든 일이 꼬일 때도 있고,
그냥 살아갈 뿐인데 모든 게 엉망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는 건.
그것만으로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무채색이던 천마의 무뎌진 세상에 조금씩 색이 입혀졌다.
알렌의 삶을 닮은 색이.
- 자, 역풍이 불어오고 있어
그리하여 천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치미는 어떤 감정을 토해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 차갑게 식어버린 땅일지라도
손을 뻗어 지금 뛰어넘어가는 거야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도록
들려오는 목소리에 알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한국어.
알렌에게는 낯설기만 한 언어다.
하지만 음악에는 언어를 초월해서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알렌도 분명 그걸 느낄 수 있었으리라.
이 노래는 어쭙잖은 위로도, 그렇다고 응원도 아니다.
모든 관객이 돌아간 어느 라이브 하우스에서,
천마는 삶이 뻔한 신파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남자를 보았고, 이 노래는 그를 위한 헌사였다.
노래는 짧았다.
가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렌은 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알렌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천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말로 고맙지.’
이런 경험은 기연과도 같다.
강호행을 시작한 첫 도시에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라이브 하우스를 떠나가려는 순간, 알렌이 물었다.
“어··· 혹시 여기서 공연을 더 하실 건가요?”
“아니요. 방금이 마지막 공연이었네요.”
공연은 오늘 하루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전 사장은 스케줄이 비는 대로 나를 넣어준다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할 마음이 없었다. 추가로 공연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없으니 여기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이제 빨리 호텔에 돌아가서 내가 얻은 것들을 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알렌은 퍽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혹시 이 노래 제목이 뭔가요?”
나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
“song for A Man (어떤 사람을 위한 노래).”
그리고 이 명곡은, 알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
*
하이포닉은 씨익씨익 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안 사요’라니! 내가 무슨 잡상인도 아니고!”
영입 제안을 거절한 천마는, 붙잡을 새도 없이 쿨하게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하이포닉은 쓸쓸하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천마를 영입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와 별개로 노래는 좋았다.
‘내 커버 곡 중에 최고였지.’
아니, 이정도면 그냥 가사만 똑같은 전혀 다른 곡이다.
하이포닉은 자신의 곡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천마의 공연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라이브 하우스는 가수들의 영상을 촬영하고 따로 뉴튜브 채널에 그 영상을 올려놓는다. 이번에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편집된 영상이 올라왔다.
하이포닉은 천마의 공연 파트만을 따로 잘라내어 무한으로 반복했다.
노래를 다시 들으니, 벌써부터 다음 앨범에는 어떤 스타일의 곡을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샘솟았다.
비록 대차게 까이긴 했지만···.
“···내 뮤즈라는 건 부인할 수가 없군.”
막혀있던 부분이 천마 덕분에 해결되자, 앨범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내가 너무 집착을 하고 있었나 보네.’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했고, 많은 걸 성취했다.
그럼에도 성공을 향한 집착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칫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뻔하던 그의 삶을, 천마의 커버 공연이 제동을 걸어줬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그래서 하이포닉은 자신을 비우기 시작했다.
천마의 곡에서 느낀 여유를 그의 삶에 조금씩 담아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곡이 완성되었다.
어제는 앨범에 넣을 노래를 선곡하는 블라인드 미팅이 있었는데, 만장일치로 이 곡이 선택되었다.
하이포닉 자신이 봐도 기깔나게 뽑히긴 했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쉬운 게 한 가지 있었다.
“그 사람이랑 같이 작업하면 더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이포닉이 들을 수 있었던 건 고작 하나의 편린.
작업 내내 그의 뮤즈가 되어줬던 청년의 부재가 아쉬웠다.
천마에게 차였던 당시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 또 ‘내가 그때 너무 급작스럽게 대쉬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마저 들 정도였다.
사실 ‘파이퍼’라는 이름 하나만을 가지고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청년은 그날 공연 이후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LA를 넘어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어떤 클럽을 가도, 틈만 나면 인터넷과 SNS에 ‘파이퍼’를 검색해봤는데도, 도통 보이질 않았다.
남아있는 건 라이브 하우스에 올라왔던 영상 하나뿐.
하이포닉은 벌써 수백 번은 돌려본 그 영상을 다시 한번 보며 씁쓸해했다.
‘설마 음악을 그만둔 건가?’
괜히 이런 마음까지 들며 불안해진다.
그 청년의 재능이라면 분명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군.’
그는 뮤즈를 위한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천마의 라이브 하우스 공연 영상을 트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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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ution’ 커버 중 내가 인정하는 최고의 영상.
한번 만나고 싶은데 디엠줘
#Mymuse #whoisP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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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의 서막이었다.
< 천마의 강호행 (4)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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