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캐와 부캐 사이 (1) >
즉석에서 알렌에게 불러준 ‘song for A Man’.
곡은 완벽했다.
괜히 늑장 부리다가 그때의 감정이 지워질까, 차선우는 로페즈 뮤직그룹에서 마련해준 스튜디오에 살다시피 하며 곡 작업에 매진했다.
내친김에 녹음까지 끝내버린 차선우는 완성된 음원을 보며 고민했다.
‘부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이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음원을 발표하자니, 이미 부캐의 상태에서 알렌에게 곡을 한번 들려줘 버렸다.
물론 그때는 골조라고 할 수 있는 짧은 멜로디라인 뿐이었고, 지금은 훨씬 더 풍성해지긴 했다.
하지만 차선우는 쓸데없는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알렌이 이 노래를 들을 때, ‘이거 파이퍼가 만든 노래 아니었나? 그런데 왜 천마가 만들었다고 되어있지?’ 같은 의문을 품은 채 듣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 노래에 푹 잠겨서 온전히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잠시 고민하던 차선우는 작곡란에 유일하게 적혀 있던 ‘천마’의 이름 옆에, 새로이 ‘파이퍼’의 이름을 추가했다.
작곡: 천마, 파이퍼
작사: 천마
편곡: 천마
천마와 파이퍼의 공동 작곡.
그 둘(?)은 그렇게 내적 합의를 이뤘다.
“완벽하군.”
마지막 남은 고민까지 해결한 차선우는 그대로 곡을 발매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남아있던 천마 전담팀은 차선우가 보내온 음원을 보고 퍽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드투어 콘서트를 마친 지 몇 달 안 된 거 같은데···.”
“분명히 쉬면서 LA를 돌아본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게 휴식을 취한 사람의 작업 속도인가?
늘 겪어도 새롭기만 한 속도였다.
아무튼 이러면 유통 일정에 문제가 생긴다.
“원래 앨범을 내기로 한 때가 2달 뒤이긴 한데···.”
물론 이 곡을 묵혀놨다가 두 달 뒤에 발매할 앨범에 수록하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천마가 당장 싱글을 내길 원한다는 거였다.
옥수진은 천마의 말을 떠올렸다.
- 빨리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천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한다.
잠시 고민을 하던 옥수진이 말했다.
“그럼 이번 앨범은 가볍게 싱글로 내는 거로 하죠.”
강여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평소 하던 대로 컴백일지 준비할게.”
강여름은 천마가 보낸 파일들을 하나하나 열어봤다.
컴백일지에 쓰려면 영상 파일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건 없었다.
“???”
부캐로 활동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연히 천마가 홍보를 위한 영상을 촬영했을 거라고 생각한 강여름은 당황했다.
그래서 이번 천마의 앨범은 유례없이 조용히 발매되었다.
조용히···라기보다는, 남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홍보만 했을 뿐인데 왠지 모를 여유가 넘쳤다.
앨범 발매를 마친 옥수진과 강여름.
천마 전담팀 사무실에서 차를 홀짝이며 옥수진이 말했다.
“앨범을 냈는데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이네요.”
음료에 있는 얼음을 아삭 씹어먹으며 강여름이 대답했다.
“그러게. 항상 앨범을 낼 때마다 뭔가 사건이 터졌는데.”
“사실 이게 일반적인 거 아닐까요? 이전까지 우리 회사가 좀 유난했던 거고요.”
“맞아. 평화로우니까 너무 좋다.”
평소라면 야근에 야근에 야근까지 하며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두 사람은, 식후 티타임까지 가지며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천마는 천마였다.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천마의 신곡은 팬들 사이에서만 잔잔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흐름에 변화를 준 건 하이포닉이었다.
하이포닉 - EMPTY
지난 앨범의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이포닉은 신곡을 발매했고, 역시나 이번에도 미국을 강타했다.
이번 신곡에서는 대대적인 스타일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게 하이포닉과 찰떡처럼 어울렸다.
이전에는 겉멋에 찬 스웨그와 자랑이 빡빡하게 들어있었다면,
신곡은 제목처럼 많은 것들을 비우고 덜어냈다.
그 빈 공간에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여유로움이 있었다.
대중들은 이번에도 열광했고, 평론가 역시 칭찬을 쏟아냈다.
특히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로 유명한 음악 평론가 ‘로버트 조셉’.
그는 매번 비판하던 하이포닉에게, 처음으로 극찬을 했다.
[편안했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달콤한 휴식을 취한 것 같다. 그럼에도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설렘까지 있었다. 하이포닉은 비워냄으로 본인을 채워냈다.]
그러면서 의문도 남겼다.
[이 정도면 변화(change)가 아니라 거의 진화나 변태(metamorphosis)에 가깝다. 하이포닉은 이 짧은 기간 동안 어떤 일을 겪은 걸까?]
[어쩌면 그가 트위트에 올린 글이 단서일지도 모른다.]
하이포닉이 트위트에 ‘Mymuse’라는 태그를 달고 커버 영상을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대놓고 발언한 건 아니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 얘가 하이포닉의 뮤즈라고?
- 와 편곡 진짜 잘했다···. 하이포닉이 반할 만한 듯
- ‘Solution’ 커버 영상 중에서는 최고인데. 원곡에서는 없었던 여유까지 살리니까 더 스웩있게 느껴져
- 근데 이 커버 하나만으로 뮤즈라고 하기에는 좀 비약 아닌가?
- 그래서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SNS상에서 천마의 부캐가 서서히 이슈가 되던 와중이었다.
하이포닉은 신곡 활동으로 토크쇼에 나갔고, 거기에서 요즘 핫한 질문을 받았다.
“하이포닉 씨가 올린 커버 영상이 핫하더라고요. 정말로 그 청년이 뮤즈가 맞나요?”
하이포닉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 당연하죠! 저는 그때 현장에서 커버를 직접 들었어요.”
“와우. 원곡자 앞에서 청년이 직접 커버를 부르다니. 그것참 인연이네요.”
“저에게는 기연이었어요. 그 청년은 제가 놓치고 있던 ‘본질’을 담아냈죠. 그는 나의 뮤즈입니다. 꼭 다시 찾고 싶어요. 이 영상을 보게 되면 제발 연락해줘요.”
그러면서 천마의 부캐가 하이포닉의 ‘Solution’을 커버하는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제공되었다.
뜻밖에 공중파까지 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커버 영상을 찾아들었고, 부캐는 점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 이건 Solution이 아닌데?
- 걍 다른 곡인데 진짜 좋다
- 하이포닉이 반할 만하네
- 파이퍼 뭐하는 놈임? 얼굴 없는 가수인가?
ㄴ 얼굴은 있지.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지
- 와 진짜 증발했나? SNS 다 뒤져도 나오는 게 이거 하나뿐이야
- 근데 파이퍼는 천마 별명 아니냐?
ㄴ 여기서 갑자기 천마? 너무 갔다
ㄴ 딱 봐도 천마랑 파이퍼는 스타일이 너무 다르잖아ㅋㅋㅋㅋ
하지만 이 영상을 제외하고는, 파이퍼의 존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 많은 곡을 원하던 사람들이 아쉬워하던 순간, 누군가 엄청난 정보를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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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드아아아아아악!!!
이 사람 천마 신곡에 참여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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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신곡 ‘song for a Man’ 작곡에 분명하게 박혀있는 이름.
파이퍼.
파이퍼에 목매던 사람들은, 천마의 신곡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
신곡 발매 일주일 후.
하이포닉은 빌보드 차트를 확인했다.
맨 꼭대기부터 차트를 훑어 내려가던 그는, 금방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15. 하이포닉 - EMPTY
“역시. 이번 곡이 먹힐 줄 알았다니까.”
앨범을 내자마자 바로 15위에 안착했다.
기존에 쌓은 대중성과 성공적인 변신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하이포닉은 멈칫했다.
곡도 잘 뽑혔고, 성적도 좋다.
다만 문제라면,
‘왜 이 이름이 여기 있는 거냐고.’
천마의 곡도 빌보드에 들었다는 것이다.
하이포닉과 같은 핫 100에 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천마의 이름이 빌보드에 오른 건 사실이었다.
그의 시선은 저 아래로 향했다.
155. 천마 - song for A Man
하이포닉보다 조금 늦게 발매한 천마의 곡은 빌보드 200 차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천마도 기본적으로 미국 내에 어느 정도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다.
그것도 다른 케이팝 가수들보다 규모가 있는 팬덤을.
하지만 발매하자마자 차트인을 할 만큼, 강력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천마는 수요일에 발매해서 딱 이틀 치 성적만 집계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성적을 거둔 것은···.
‘···내가 지대한 공헌을 했지. 젠장.’
천마 신곡 홍보의 1등 공신이 바로 하이포닉 자신이었다.
‘내 뮤즈가 천마랑 같이 작업한 줄 난들 알았겠냐고!’
이번 천마의 신곡을 함께 작업한 게 다름 아닌 뮤우우-즈였다.
내 영입 제안은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했으면서!
심지어 뮤즈를 찾는답시고 공개 구애글을 올렸는데, 천마에게 쪼르르 가버렸다고?
그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괜히 천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하이포닉이 그동안 공개 구애를 한 덕분에, 까였다는 사실 역시 만방에 알려졌다.
트위트에 쓴 구애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는데, 엄청난 공감을 받고 상단에 올라왔다.
- ‘파이퍼’라면 천마의 신곡에 공동작곡가로 이름 올린 얘 아니야? (좋아요 39,092개)
ㄴ 헐 맞는듯?
ㄴ 와 이걸 찾네ㄷㄷㄷ어떻게 작곡가 정보까지 찾아보냐;;;
ㄴ 그럼 하이포닉 까인 거야? 얘는 천마랑 작업했잖아
ㄴ 에이 설마. 그냥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같이 작업한 게 아닐까?XD
“······.”
천마가 한 건 없지만, 천마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한 기분이었다.
하이포닉은 다시 씨익씨익 거리면서 155위에 랭크된 천마의 신곡을 클릭했다.
‘나 대신 천마를 선택해놓고, 얼마나 대단한 노래를 만들었는지 한번 보자.’
평소 천마가 만들던 가볍고 뻔한 곡이면 시원하게 욕이나 한 사발 퍼부을 생각으로 들어봤다.
‘...음?’
왜지?
나쁘지 않은데?
다시 들어봤다.
이번에는 내용까지 이해하기 위해서, 영어로 번역된 가사를 찾아 함께 들었다.
‘흐으음?!’
조···좋은데. 왜 좋지?
이번 천마의 곡은 이전과는 달랐다.
비유하자면, 뜨끈한 수프 같았다.
지치고 피곤한 날.
한 스푼 떠먹으면 온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여운이 남는 곡이었다.
몇 번이고 천마의 곡을 돌려 듣던 하이포닉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론해봤다.
‘이건 분명 내 뮤즈의 솜씨일 거야.’
가벼운 대중소설 같은 천마의 곡에, 뮤즈가 깊이와 무게를 더해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만약 뮤즈가 자신과 함께 곡 작업을 했다면?
‘지금쯤 15위가 아니라 10위 안에서 놀고 있겠지.’
2주 차에 빌보드 1등을 찍고, 최소 8주는 1등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건, 자신이 찾던 뮤즈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하이포닉은 천마에게 연락했다.
- 안녕하세요. 가수 하이포닉입니다. 천마님 신곡에 ‘파이퍼’님이 참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그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이전부터···
어째서 연락을 했고, 왜 그를 찾는지.
예의 바른 문장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씹혔다.
“아니, 왜 읽었는데 답장을 안 해주는 건데?”
하이포닉은 짜증이 났다.
뮤즈는 연락이 안 돼서 돌겠는데, 유일한 연결고리인 천마도 씹네?
다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급한 건 본인인걸.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던 하이포닉은 주변에서 팁을 들었다.
-천마? 걔 뉴튜브 방송 유명하잖아. 거기에 찾아가 봐.
자세히 알아보니, 천마의 방송에서 돈을 내고 의뢰를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시작가가···.
“만 달러?”
일본의 모 게임업체 대표가 후원 시작가를 만 달러로 올린 덕분에 확 올랐다.
만 달러라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앨범 퀄리티를 높일 수만 있다면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이포닉은 총알을 넉넉하게 장전했다.
“뮤즈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10만 달러라도 써주지.”
천마의 방송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린 하이포닉은,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후원을 날렸다.
[하이포닉 님이 10,000달러를 후원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하이포닉입니다. 혹시 파이퍼 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
.
.
한편, 천마는 끊임없는 하이포닉의 연락에 짜증이 났다.
“얘는 왜 이렇게 질척거려?”
웬만해서는 답장을 해주겠는데.
‘걔가 바로 나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부캐 활동이 생각보다 반향이 컸다.
덕분에 신곡 홍보가 자동으로 됐지만, 딱 그정도까지가 좋을 듯했다.
오늘도 하이포닉의 연락을 씹어버린 천마는, 평소 하던 대로 방송을 켰다.
그리고 방송을 키자마자,
[하이포닉 님이 10,000달러를 후원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하이포닉입니다. 혹시 파이퍼 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
아오, 돌겠네 진짜.
< 본캐와 부캐 사이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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