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캐와 부캐 사이 (4) >
각자의 신곡이 발매되고 몇 주 후.
신곡 활동이 얼추 마무리되었을 무렵.
마침내 하이포닉과 미팅 날이 찾아왔다.
나는 화려했던 하이포닉의 스튜디오 문을 떠올렸다.
‘오늘도 그 인상 깊은 곳을 가는군.’
하지만 오늘 내가 직접 그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지난번 방문과는 다르게, 하이포닉은 건물의 1층까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와우 파이퍼! 이게 얼마 만이야? 보고 싶었어! 천마가 내 이야기는 잘 해줬나 모르겠네.”
이쪽을 보고 해맑게 인사하는 모습이 퍽 새로웠다.
본캐에게는 그렇게 까칠하더만.
아무튼, 우리는 잡담을 하며 -정확히는 일방적인 수다를 들으며- 삐까뻔쩍한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보내준 곡은 들어봤어. 괜찮던데?”
오기 전 하이포닉은 미리 수정된 곡을 보내주었다.
초반부에서 막혀있던 노래는 끝까지 곡이 완성되어 있었다.
내 조언이 착실히 반영된 곡은 확실히 이전보다 나았다.
멜로디는 더 희미하게.
사운드는 더 미니멀하게.
하지만 보컬만큼은 더욱 힘을 주어서.
하이포닉이 말했다.
“뭐, 천마가 날카로운 면이 있더라고. 이것저것 짚어준 덕분에 방향성이 잡혔지.”
“확실히 예전보다는 분위기에 통일성이 있네.”
“엉? 예전보다?”
나는 말을 돌렸다.
“에. 편곡 아이디어를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하이포닉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작업에 집중했다.
지난번에 한차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편곡은 빠르게 완성되었다.
이번에 피처링으로도 참여하게 돼서, 온 김에 녹음까지 해봤다.
그러니 이제 완성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다만,
“흠. 보컬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뭐랄까, 맛깔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낮은 저음으로 묵직하게 불러주며 LA의 어두운 면을 보여줘야 하는 보컬이 곡을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파이퍼는 맑은 미성에, 하이포닉도 묵직함과는 부합하지 않는 보컬이다 보니 그런 듯싶었다.
그리고 하이포닉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흐음. 톤이 조금 안 맞는데. 아니면 우리 둘이 하모니를 넣어볼까?”
그래서 하모니를 넣어봤지만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아니면 이 벌스를 다른 사람에게 줘도 되고. 맥 로스웰은 어때? 그 친구도 괜찮을 거 같은데.”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이 말을 했던 내 주둥아리를 후려쳤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하이포닉이 소리쳤다.
“그래. 그거야!”
“엉?”
“이 벌스를 천마한테 주자고!”
···뭐라고?
“천마가 이 벌스를 부르면 진짜 쩔거같지 않아? 우리 셋이 이 곡에 함께 있는다고 생각해봐.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나도 기가 막힌다.
그러나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부딪힌 하이포닉은 본격적으로 본인의 주장을 어필했다.
“천마가 낮은 저음으로 어두운 느낌을 강조하고, 파이퍼 너의 미성이 밝은 느낌을 주는 거지. 그리고 두 사람의 대비 속에서 내 보컬이 그 중심을 잡아주는 거지. 생각만 해도 좋은데?”
우리 둘(?)의 보컬 사이에서 버티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지만··· 본인의 보컬에 자신이 있는 하이포닉은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솔직히 그 말에 나도 혹했다.
‘완성도 측면에서 그게 제일 좋긴 한데.’
내가 고민하는 걸 본 하이포닉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파이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빌보드 1등도 할 수 있어! 방금 촉이 왔어. 여기 천마까지 오면 이건 무조건 빌보드 1등이야. 와 대박. 나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미쳤다 미쳤어.”
“흐음···.”
빌보드 1등이라.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무엇보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천마와 파이퍼가 합심해서 만든 곡이니만큼, 부캐와 본캐의 보컬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 그렇게 해보자.”
내 말을 들은 하이포닉은 신나서 소리쳤다.
“오케이! 잘 생각했어, 브로. 그럼 내가 지금 바로 천마에게 연락해볼게.”
“???”
말릴 틈도 없이, 하이포닉은 핸드폰을 들어 ‘천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잠깐만.”
본캐와 부캐의 핸드폰을 따로 쓰기는 한다.
하지만 그 말이 핸드폰을 하나만 들고 다닌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천마’의 핸드폰은 내 가방에 있었다.
‘아오 돌겠네.’
얘랑 얽히면 왜 되는 일이 없냐.
하이포닉이 전화를 걸고, 수화음이 걸리기까지 그 짧은 찰나.
나는 가방을 들고 튀었다.
“화장실!!!!!!!”
급하게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이포닉은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화장실은 이 안에 있는데?”
그건 그렇고.
방금 진동이 울리지 않았나?
*
하이포닉은 갑자기 뛰쳐나간 파이퍼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답답한 마음에 파이퍼에게 물어봤지만,
- 갑자기 지병이 도졌어.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하이포닉은 그 후로 파이퍼를 영원히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두 사람의 피처링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지병이 발생해버린 파이퍼와, 이상할 만큼 이쪽을 피하는 듯한 천마는 각자 스튜디오에서 벌스만 따로 녹음해 보내주었다.
이제 사운드 엔지니어가 이 노래를 믹싱, 마스터링만 해주면 녹음은 끝난다.
하이포닉은 흥얼거리며 스튜디오로 갔다.
이번 앨범은 직접 총괄 프로듀싱하는지라, 엔지니어링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헤엥. 사운드는 어떻게 나왔으려나?”
하이포닉은 천마와 파이퍼가 보내준 벌스를 떠올렸다.
사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에 있어서 엄청난 집요함을 자랑하는 하이포닉은,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서 함께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실망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내준 녹음을 듣는 순간.
‘내 섭외력 미쳤구나.’
두 사람(?)의 녹음은 문자 그대로 완벽했다.
험난한 구애 끝에 용케 두 사람을 끌어들인 자신을 칭찬해주었다.
특히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파트가 있는데, 이 파트가 어떻게 나왔을지가 제일 기대되었다.
그렇게 작업실로 들어가는 순간, 하이포닉은 어두운 얼굴을 한 엔지니어를 발견했다.
엔지니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이거 아무래도 좆된거 같은데?”
“엉? 갑자기 문제라도 생겼어?”
하이포닉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게 완벽한데 문제가 될 게 있나?’
엔지니어는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믹싱이 끝난 파일을 가리켰다.
하이포닉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믹싱된 노래를 들어봤다.
그리고 노래를 듣자마자 그 문제가 뭔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어?”
도시의 양면을 표현하는 청아한 미성과 부드러운 저음.
두 목소리가 만나는 순간 하모니가 터지면서,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뒤에 나오는 하이포닉의 보컬을 그대로 잡아먹었다.
“......”
이 씬에서 피처링에 잡아먹히는 노래가 종종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하이포닉은 자기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쌓아온 내공으로 보나, 음악을 한 경력으로 보나, 하이포닉은 두 사람을 압도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보컬 위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먹혀버렸네?
발매를 앞두고 하이포닉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건 안돼! 다시, 다시 녹음 들어가!”
까딱하다가는 노래를 빼앗기게 생겼다.
하이포닉과 엔지니어는 즉시 장비를 세팅하고 재녹음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
.
.
하이포닉의 정규 앨범은 발매 전부터 여러모로 화제를 끌어모았다.
파이퍼와의 스토리텔링도 그렇고, 두 달 전에 낸 리드 싱글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앨범의 오프닝이자 천마와의 공동작업물인 「Unclear (feat. 천마&파이퍼)」는 발매하자마자 스포티나인에서 1위에 올랐고, 발매 첫 주부터 빌보드 핫100 차트 5위를 차지했다.
그래미 후보로 언급될 만한 뮤지션이, 적절한 바이럴을 동원했을 때.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예증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하이포닉을 듣기 위해 노래를 재생했을 때, 엉뚱한 녀석들이 이목을 빼앗아 갔다.
-맙소사!!!!!!!!!! 피처링 도대체 누구야?
하이포닉은 재녹음에 재녹음까지 했지만, 뺏겨버린 곡의 주도권을 완전히 찾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띄우자고 천마와 파이퍼의 피처링을 다운그레이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어찌어찌 세 보컬의 균형만 맞추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천마와 하이포닉이 심혈을 기울인 만큼 노래는 흠잡을 데 없이 좋았고, 하이포닉은 차트 위를 성큼 뛰어올랐다.
지난번의 성적을 뛰어넘겠다는 하이포닉의 다짐대로, 음원 성적은 쭉쭉 뻗어나갔다.
···다만 천마가 주목을 가져갔을 뿐이다.
- 천마? 설마 이슈가이?
- 노래도 잘 불렀···네?
ㄴ 뭐라는 거야 원래 잘했음
천마는 여러 가지 이슈와 얽히며 미국 내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 결과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먼저 프로듀싱 팀 ‘아발론’과 토크쇼인 ‘메이슨 쇼’가 천마에게 박살 나면서 그쪽의 팬덤이 천마의 안티로 돌아섰고, 이런 이유로 이슈가 천마의 이미지메이킹에는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뮤지션으로서의 천마’ 이미지가 그 위에 덧씌워졌다.
- 천마 보컬 미쳤다 하이포닉이 묻혔네ㅋㅋㅋㅋㅋ
- 와···. 이번에 사운드퀄 뭐야ㅠㅠㅠㅠ 하모니 터질 때 소름
- 나른한 목소리로 막 마약 어쩌구 섹스 저쩌구 할때ㅠㅠㅠㅠ 시발 나 죽어
거기에 천마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이상 부캐를 꺼내 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예 천마신교 공식 계정을 통해 파이퍼의 지병 때문에 앞으로의 활동이 불가능할거란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피처링진 두 명(?) 중에서 하나가 사라지니, 파이퍼 몫의 관심까지 천마에게 향했다.
그런데 마침 천마의 노래가 차트에 있네?
- 얘들아 띵곡 하나 더 찾았다. 이거 꼭 들어봐 (송포맨 링크)
또다시 순위가 상승하는 건 당연한 수순.
빌보드 차트는 물론이요, 실질적으로 세계인들이 애용하는 스트리밍 사이트 ‘스포티나인’에서도 천마의 노래는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천마는 미국의 일반 리스너들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천마신교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를 하나 찾아냈다.
*
나는 마침내 하이포닉을 떼어냈다.
‘뭐, 돌이켜보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어.’
결과가 좋으니 과정도 미화되기 마련.
그렇게 나는 느긋하게 결과를 만끽하는데, 미국 반응을 모니터링하며 분석하던 강여름이 말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반응 양상이 예전과 다르네요.”
“그래요?”
“넹. 이번에 ‘스트리밍-라디오’ 부문에서 성적이 확 좋아졌어요. 심지어 세일즈보다 더 좋네요. 흐으음···.”
세일즈 부문은 팬덤을 측정하는 지표다.
팬들이 실물 앨범을 얼마나 사줬는가, 다운로드를 얼마나 했는가 집계한다.
한편, 스트리밍-라디오 부문은 현지의 인기 지표이다.
현지에서 일반 리스너가 얼마나 스트리밍했는가, 얼마나 라디오에서 곡이 나왔는가를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세일즈 부문은 팬덤의 화력 측정을, 스트리밍-라디오 부문은 현지 대중성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나는 세일즈 부문이 더 높았지만, 이번에는 스트리밍-라디오 부문이 압도적이었다.
“좋은 거 아닌가요? 현지 리스너에게 그만큼 먹힌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강여름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흐으으으으음”
···왜 또.
강여름에게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문제인데요?”
강여름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 말은 천마 님의 팬덤이 대중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이번이 이례적으로 대중성이 높았던 게 아니라요?”
“놉놉. 이건 원래부터 보였던 문제에요. 천마 님의 팬이 대부분 뉴튜브로 유입됐는데, 이들은 기존의 케이팝 팬덤보다 결집력이 약하거든요. 그래서인지 팬덤의 규모에 비해 세일즈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죠.”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럴듯하네.
지금 내 구독자가 4,000만 명이니까··· 그거에 비하면 잘 안 나오기는 한다.
“그래서요?”
강여름이 해맑게 웃었다.
“십만교인 양성 프로젝트를 하죠!”
“.......”
< 본캐와 부캐 사이 (4)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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