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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공으로차트올킬-162화 (162/191)

< 우리 건축가가 이상해요 (2) >

진성 문화예술재단 이사장 김소현.

탁-

김소현이 소리 나게 홍차가 든 찻잔을 내려왔다.

영국에 온 만큼 ISO 3103 기준에 정확히 맞춘 최고급 잎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차보다 진하게 우러나와 입 안 가득 맴도는 풍미가 일품이었지만, 차를 마시는 김소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는 건가?’

얼마 전 날아온 영국에서,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를 만났다.

그 덕분에 그녀의 입장이 매우 곤란하게 됐다.

‘방송에서는 자신만만하게 소개해 준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진성 전자는 차선우 덕분에 대박이 났다.

에이플에게 밀려 계속해서 하락세만 보이던 일본과 미국 시장에서 오랜만에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냈고, 거대한 중국 시장에서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 광고가 제대로 먹혔다고 한다.

이번 [ZERO] 시리즈 만으로 벌써 진성은 수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런 만큼 오빠인 김재범도 차선우의 일을 신경 써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프랭크 리를 제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처음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후에 있었던 미팅까지.

차선우는 딱 집어서 프랭크 리가 마음에 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데, 아무래도 프랭크 리에게 건축을 맡기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김소현 이사장은 억울한 면이 있었다.

‘아니, 프랭크 리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난들 어떻게 알았겠냐고.’

세상에나.

프랭크 리가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줄이야.

프랭크 리가 워낙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보니, 그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은 건 없었다. 그래서 가족 내부에서 조용히 묻어두려고 하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김소현이고 진성이라고 하더라도, 영국에 있는 건축가 집안에서 쉬쉬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낼 방도는 없다.

물론 프랭크 리의 활동이 워낙 뜸해서 중간중간 은퇴설이 돌기는 했지만······.

‘그냥 나이가 있으니 슬슬 일선에서 물러나려나 보다 생각했지.’

그게 알츠하이머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국에 와서야 이 사건을 알게 된 김소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고민해봐도 쉽게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때였다.

“이사장 님. 약속 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수행비서의 말에 김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일단 할 수 있는 거라도 해봐야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소현이 만나는 사람은 프랭크 리의 아들.

프랭크 리 주니어.

참고로 프랭크 주니어도 건축가이다.

지금은 아버지의 건축 사무소를 물려받아 일선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하고 있다.

김소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기적으로 프랭크 주니어를 만나 병의 차도를 물어보는 중이었다.

오늘도 프랭크 주니어를 만난 김소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프랭크의 상태는 여전히 안 좋은가요?”

프랭크 주니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셨는데, 올해 들어서 그 주기가 조금씩 짧아지고 있네요.”

“이런. 얼른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이사장 님께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런 일을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요.”

알츠하이머라니.

현대 의학으로도 극복하지 못한 병이다.

이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프랭크 주니어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이제 건축가로서 생명이 끝났습니다. 사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오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설계를 하시려고 하시거든요.”

“마지막 미련이 남아있으신 것 같네요.”

“맞습니다. 병에 걸리시기 전에 혼을 갈아 넣은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으시네요.”

혼을 갈아 넣은 마지막 작품이라.

‘그게 천마 타운이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일은 일이다.

김소현은 지금 당장, 차선우의 천마 타운을 제대로 지어줄 건축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프랭크 리는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프랭크 주니어가 아버지의 진전을 잇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

잠시 고민하던 김소현은 대답했다.

“일단 차선우 씨에게 상황을 말씀드려보죠.”

물론 그녀는 속으로 다른 건축가를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차선우에게는 이 상황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을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 뒤.

차선우가 영국에 도착했다.

.

.

.

영국에 도착한 나는 김소현에게서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프랭크 리 씨가 알츠하이머 중증이셔서 건축을 하는 게 힘드시다는 거죠?”

“네. 죄송해요. 저도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

당황스럽다.

김소현이 직접 갔다길래 사옥 건축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알츠하이머라니.

‘이건 김소현 탓하기도 뭐하고.’

김소현은 여전히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그 아들인 프랭크 리 주니어가 이쪽 의뢰를 대신 받고 싶어 하네요.”

천마 타운은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프랭크 주니어는 천마타운을 건설했다는 커리어를 가지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김소연이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그건 썩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네요. 프랭크 주니어도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버지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거든요.”

“흠··· 그래요?”

김소현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겠지.

하지만 이럴 때는 내 눈으로 직접 상황을 확인하는 게 최고다.

김소현은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일단 나는 프랭크들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프랭크 주니어가 의지를 보인 만큼 그와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무엇보다 상태가 안 좋다지만 프랭크 리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프랭크의 집.

원래는 건축 사무소에서 보기로 했는데 프랭크 리가 외출이 힘든 까닭에 장소를 급하게 집으로 변경했다.

나는 집을 보고 감탄했다.

“와··· 아름답네.”

이 집은 프랭크 리가 직접 건축했는데, 동래학춤의 흰 도포와 한복의 소매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늘 위를 흐르는 지붕에 반사되어, 유려하게 반짝이는 햇빛.

그리고 내가 프랭크 리를 첫 손에 꼽은 것도 바로 이 집 때문이다.

이런 집을 건축한 프랭크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을 가장 잘 구현할 것 같았다.

‘한번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봐야겠군. 혹시 내가 고칠 수도 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사실 프랭크 리와 비슷한 증상이 무림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물론 무림에서는 이 원인이 무공으로 인한 부작용이었고, 현대에는 퇴행성 뇌질환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중요한 건 내가 고쳐본 적이 있다는 거지.’

주화입마로 돌아버린 놈들을 음공으로 치료했던 전적이 있다.

만약 프랭크 리도 비슷한 상황이면, 내가 고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 희망은 집에 들어가서 프랭크 리를 만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으히히히히히, 아빠!”

문을 열자마자, 적어도 환갑은 훌쩍 넘은 것 같은 노인네가 나에게 달려온다.

“.......”

그 아들인 프랭크 주니어도 당황하며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아니, 아버지. 언제 나오신 거예요. 방금 전만 해도 방에 계셨는데.”

프랭크 주니어는 허둥거리면서 아버지를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지만, 나는 그를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그리고 프랭크 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네? 갑자기······.”

음공은 음파, 즉 파동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파동 안에는 인체에 흐르는 파동도 포함이 된다.

보통 알츠하이머 질병의 치료가 어려운 이유는 약물이 없기도 하지만, 적절한 약을 개발해도 혈뇌장벽을 투과하기가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내공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거창하게 노래를 부른다거나 할 필요는 없다.

프랭크 리의 파동과 내공이 뿜어내는 파동을 맞춘다.

단전에서 뿜어진 파동은 프랭크 리의 몸을 타고 들어가 직접적으로 뇌파에 간섭한다.

이내 내공은 뇌혈관계와 뇌세포를 자극하고,

“.......”

잠깐이지만 오랜 세월을 거친 노장의 눈빛에 현기가 돌아왔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프랭크 리가 말했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구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니어는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니, 아니지. 이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줬다.

“동양의 신비입니다.”

“......진짜요?”

진짜겠냐?

*

프랭크 리의 정신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건 일시적인 거다.

길어야 몇 시간.

그 뒤면 프랭크 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이전부터 프랭크 리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던 차선우는, 집 뒤편에 있는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프랭크 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나한테 천마 타운의 건축을 맡기고 싶으시다고?”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건축가는 선생님 말고는 없는 것 같아서요.”

흐름.

차선우가 프랭크 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70년간의 무림에서의 흐름.

현대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

차선우는 천마 타운에 그 시간의 흐름을 담고 싶었다.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인 프랭크 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잘 찾아왔네. 흐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건축의 주제였지.”

흥미가 동한 프랭크 리는 자신의 건축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십 년을 거슬러, 수백 년을 거슬러, 태곳적으로 돌아갔을 때.

항상 존재했던 건.

빛.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모두 담고 싶었지. 여명 아래에서 볼 때와, 노을 아래에서 볼 때 다르고, 아침부터 밤까지 다른 빛으로 빛나는 그런 건물을 말이야.”

차선우는 프랭크 리의 눈동자 속에서 빛이 반짝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프랭크 리처럼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건물을 세우려던 건 아니었지만,

햇빛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건물이 되는 건 꽤 멋지게 들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집을 처음 지을 때는 그럴 역량이 부족했고, 지금은 다 늙어서 그럴 정신이 없구먼. 허허.”

지금의 프랭크 리는,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을.

차선우가 지금은 프랭크를 잠깐 제정신으로 돌려 놓았다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옆에 붙어서 천마타운 설계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차선우는, 프랭크의 눈 속에서 반짝임을 본 순간.

욕심이 생겼다.

하루 종일 여러 가지 빛으로 빛나는 건물을 가지고 싶다고.

그 순간 차선우의 입이 열리고, 프랭크는 환상을 봤다.

거장의 역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우리 건축가가 이상해요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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