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건축가가 이상해요 (3) >
“으음······.”
프랭크 리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익숙한 천장이다.
‘내가 잠이 들었던가?’
천마와 산책을 하며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천마가 노래를 불렀고······.
‘아니, 그게 노래가 맞았던가?’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모호하다.
다만 확실하게 떠오르는 건.
거칠게 자신을 휩쓰는 멜로디와, 펼쳐지는 처음 보는 풍경.
‘그래. 꿈이라도 꾼 모양이군.’
잠시 기억을 복기하던 프랭크 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발로 땅을 디딘 그는 오늘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개운한데?’
그는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지고, 머릿속은 정리가 안 된 방처럼 산만하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몸에는 활기가 넘쳤고, 머리는 맑았다.
수십 년 전, 한창 젊었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뭘 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비싸다는 약을 먹고, 수백 번이나 병원을 들락거렸을 때도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뭔가 달라진 게 있었나?’
단언컨대 없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의 일상에 새로운 게 있을 리가 없지.
'아니군, 천마를 만났지.'
프랭크 리의 일상에서 바뀐 거라고는 천마를 만났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 삶이 놀랍도록 바뀌었다.
마치 천마에게 신비한 힘이라도 있는 듯이.
‘누가 들으면 진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프랭크 리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는 인생에서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이건 진짜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차선우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프랭크 리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언제 다시 정신이 나가버릴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정신이 멀쩡할 때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마지막 작품을 만들어야지.”
혼을 갈아 넣은 마지막 작품.
그걸 완성시키고 싶었다.
마침 프랭크 리의 머릿속에는 영감을 주는 것이 있었다.
꿈인지 환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그림이 있었다.
프랭크 리는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전에 보았던 환상을 복기했다.
그건 거의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수십 개의 봉우리가 솟아오르고, 산을 감싸며 강줄기가 굽이친다.
아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험준한 산세에도, 사람들은 기어코 그곳에 건물들을 지어 올린다.
비탈진 등성이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깎아내고 비동을 뚫는다.
거기에는 전율이 이는 장엄함이 있었다.
그 순간 멜로디가 바뀐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공간을 가득 채우던 목소리는 다이나믹하고 경쾌하게 고조된다.
동시에 풍경도 바뀌었다.
카메라가 줌인하듯, 프랭크 리를 풍경 더 가까이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는 비슷한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방금 전까지는 건물을 올리던 사람들이,
연무장에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날이 잘 선 칼날에 햇빛이 쨍하고 흐른다.
수백 개의 칼날이 빛무리를 만든다.
빛.
프랭크 리가 평생을 쫓던 것이 천산을 뒤덮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프랭크 리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본 것을, 떠오른 영감을 스케치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환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보여줄 것이 있다는 듯 프랭크 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거대한 연무장의 끝자락.
거기에는 계단이 있었다.
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듯 끝없이 솟아오르는 계단을 따라 프랭크의 시선도 올라간다.
그리고 계단의 끝.
태양과 가까운 그곳에.
천마가 있었다.
모든 것을 굽어보며 천마가 있었다.
“허어!”
프랭크 리는 탄식을 뱉으며 눈을 떴다.
인생 만세(Viva la vida)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프랭크 리는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마지막··· 나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구만.’
프랭크 리는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언제 다시 정신을 놓을지 모른다.
프랭크 리는 곧바로 옆에 있는 펜과 종이를 집어 들었다.
*
프랭크 리는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영국 왕실에서 훈장을 받은 적도 있고, 그의 건축물은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이다.
그런 건축가가, 몇 년 동안 완전히 활동을 접어서 이제는 은퇴를 한 줄 알았던 사람이.
마지막 건축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 천마타운. 그건 제 마지막 역작이 될 겁니다.
영국 언론은 난리가 났다.
[현대건축의 거장 프랭크 리, 마지막 족적은 한국에서]
[프랭크 리의 선택···'어째서' 천마여야 하는가?]
[(포토) 프랭크 리와 천마의 만남 포착, 정말 마지막 건축이 천마타운이 되는가?]
그리고 덩달아 천마의 이름도 뉴스에 오르고 있었다.
천마는 유명하기는 했다.
한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뮤지션이며,
일본에서는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으며,
미국에서도 얼마 전 빌보드 1위를 하며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게 만들었다.
그럼 천마가 최정상급 월드 스타냐?
그 질문에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빌보드 1위를 달성했던 사람이야 일년에도 열 명이 넘게 나온다.
무엇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권에서는 천마의 이름이 널리 퍼지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영국 사람들은 프랭크 리가 갑자기 천마의 신사옥을 건축해주겠다고 나서자 놀랐다.
유명 문화예술재단의 미술관도 아니고, 디즈니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콘서트홀도 아니고.
한국 뮤지션의 회사 사옥이라니!
그것도 거장의 마지막 건축으로!
도대체 천마의 무엇이 그리 끌리게 만들었을까?
프랭크 리의 발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영국에 있는 수많은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언론의 앞에 나선 프랭크 리는 딱 한 마디를 남겼다.
- 천마는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단초를 주었습니다. 집대성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겠군요.
그 말만 남겨둔 프랭크 리는 칩거했다.
거장의 모든 걸 하나로 집대성하다니.
기자들은 더욱 애가 달았다.
하지만 건축 디자인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한 프랭크 리는 기자들이 아무리 졸라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 대신 기자들이 공략한 건 바로 천마였다.
그럼 차선우는 뭘 하고 있냐?
“아오 진짜. 귀찮아 죽겠네.”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
“이놈의 기자들은 다 똑같냐.”
한국이나, 미국이나, 영국이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 데 도가 튼 모양이다.
대체 개인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스마트폰이 끊임없이 울린다.
이미 집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차선우가 영국에 와 있다는 걸 아는 뮤지션들도 차선우에게 끊임없이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는 차선우가 영국을 떠나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허허허. 이상하게 자네가 옆에 있으면 정신이 말짱해진단 말일세.”
“.......”
안타깝게도 차선우는 영국을 떠날 수 없었다.
프랭크 리가 차선우를 인간 토템 취급해버리며···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후··· 앞으로 딱 한 달 만입니다.”
설계가 끝날 때까지 차선우가 24시간 365일 붙어 있을 수는 없다.
천마신교에 밀려있는 업무를 처리하고, 한국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참 남아있다.
그래서 딱 한 달 동안.
프랭크 리가 설계의 기초 스케치를 끝내는 동안에만 옆에서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차선우는 정신줄을 놓으려고 하는 프랭크 리의 몸에 내공을 불어 넣으며 생각했다.
‘그냥 한방에 고쳐지면 좋으련만.’
아무리 차선우라 해도 유전자 속 단백질 구조나, 노화로 인한 뇌세포의 파괴까지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대신 기존에 있는 염증을 완화시키고 뇌혈관계의 회복에는 내공이 직방이다.
‘한 달 동안 내공을 때려 박으면 확실히 증상이 완화되기는 하겠네.’
정확하게는 몰라도, 이 정도라면 적어도 1년은 버틸 수 있겠지.
사실 차선우가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는 데에는 금전적인 문제도 걸려 있었다.
프랭크 리는 내공이니 뭐니 하는 건 전혀 모르지만, 적어도 차선우가 무언가를 하면서 자신의 몸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따라서 프랭크 리는 그 대가로 설계에 대한 비용은 일절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프랭크 리가 자체적으로 세운 기술 연구소에서 개발한 특수 금속 패널을 재료비와 인건비 정도만 받고 제공해주기로 약속했다.
이쪽에서 돈 들어갈 구석을 확 줄였다고는 하지만, 건물을 짓는 게 차선우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돈이 들어갔다.
‘이 정도면 최소 천오백 억 원은 들어갈 것 같은데.’
특히 아파트나 주택 같은 일반적인 형태의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시공 단계에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회수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판을 기존보다 더 크게 벌려야겠군.’
단순히 신사옥을 짓는 걸 넘어서 큰 판을 벌여야 한다.
차선우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계획이 그려졌다.
천마신교가 있는 곳은 합정동, 즉 홍대 쪽이고, 버스킹의 성지라고도 불린다.
천마타운 본관이 랜드마크가 되고,
홍대에 있는 버스킹 시설과 공연장을 정비해서 뮤지션들을 끌어들인다.
또 마침 이곳에는 천마신교와 펄 엔터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이 있으니, 캐스팅하기도 쉽다.
‘만약 이걸 천마타운 근처에 이걸 모조리 끌어올 수 있다면?’
대중음악의 메카로 자리잡을 수 있겠지.
근데 이걸 천마신교 혼자서 만들기는 힘들다.
먼저 서울시 쪽과도 얘기를 나눠야 하고, 무엇보다 진성그룹 김소현의 힘을 빌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마침 잘됐네.’
이 아줌마 마침 나한테 진 빚이 좀 있잖아?
*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김소현은 여전히 표정이 불편했다.
“내가 책임지고 프랭크 리를 연결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차선우는 알아서 정신이 나간 프랭크 리를 깨웠고, 설계를 받는 중이었다.
차선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당사자인 김소현은 자신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정말 진짜 엄청 신경 쓰였다.
선물을 주겠다고 해놓고 정작 선물을 구하지도 못했고.
선물을 받기로 한 당사자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
더군다나 이건 선물이 아니라, 정당한 계약의 이행에 관한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무조건 만회해야 해.’
김소현은 차선우에게 다른 무언가를 해줄 게 없을까 필사적으로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래. 그게 있었지!’
그녀의 머릿속에 ‘진성 메가 콘서트’가 떠올랐다.
진성 메가 콘서트는 진성 카드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획한 공연이다.
진성 카드에서 메인 스폰서를 하고 있지만, 아티스트의 섭외나 기획, 운영은 진성 문화예술재단에서 도맡아서 하고 있다.
물론 천마를 메가 콘서트 무대에 올려주겠다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메가 콘서트는 ‘해외 뮤지션의 내한’에 초점을 맞춘 공연이다.
그리고 정말 역사를 썼다고 할 수 있는 최정상급 뮤지션들 위주로 초청하고 있다.
지금까지 초청한 뮤지션으로는 킹(KING), 핫플레이, 벌룬 파이브, 라디오 가가 등이 있으니까.
‘대신 이번에 섭외한 사람을 소개해줄 수는 있지.’
김소현 이번에 메가 콘서트의 15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히 신경 써서 섭외했다.
영국 90년대 대중음악을 평정했던 록밴드 드래곤플라이.
그들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드래곤플라이는 게랄드 형제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밴드인데, 동생 쪽이 사회적 물의를 많이 일으켜서 해체 직전까지 갔다가··· 아직까지 해체는 되지 않고 다만 10년 동안 활동이 없었다.
그런데 김소연이 그들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사실이 발표되면서 수많은 락 팬들의 낭만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심지어 드래곤플라이의 해외 팬들이 한국에서 티켓팅을 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아무튼.
김소현은 본인의 아이디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양쪽에 한번 의사를 물어보고 약속을 잡아봐야겠군.”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소현은 몰랐다.
천마와 드래곤플라이, 두 아티스트가 만나서 무슨 짓을 벌일지.
< 우리 건축가가 이상해요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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