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미? 까짓것! (4) >
천마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선곡을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마의 바로 다음 차례에 공연을 하는 밴드도 그중 하나였다.
큐시트를 보던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흠···. 굳이 이런 노래를 선곡해야 했나?”
“에이, 록 70주년이니까 취지 하나는 좋잖아. 우리가 바로 다음 순서인 줄 몰랐나 보지.”
“그래도 안타깝게 됐네. 하필 우리 앞에 하다니.”
천마의 공연은 정확히 그래미의 록 70주년 특별 메들리 바로 앞에 배치되었다.
이번에 드래곤플라이와 핫플레이 섭외에 실패한 그래미는 멤버들을 모두 자국 밴드로 채워 넣었다.
대신 괜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정말 대표성 있는 밴드만 섭외했다.
그렇게 인지도 있는 세 팀이 메들리를 하는데.
어쩌다 같이 엮이게 된 천마는 분명 비교 대상이 될 것이었다.
그들은 다소 아쉬워하며 말했다.
“준비 많이 했을 텐데 분명 묻히겠네. 천마가 록커도 아니고 말이야.”
“혹시 또 몰라. 편곡 실력은 좋다니까 노래를 아예 다른 장르로 바꿨을 수도 있지.”
딱 이 정도가 그들이 천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러나.
천마가 무대를 시작하는 순간.
[Hey, Are you ready?]
단 한마디만으로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뭐지? 저 음색은?”
아니, 방금 저 소리를 단순히 음색이 좋다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하다.
매력적인 음색, 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창법을 넘어.
목소리가 살아 움직여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고작 첫마디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밴드는 무대 준비하는 것도 잊고 홀린 듯이 천마의 무대를 바라봤다.
임팩트 있게 등장했던 군악대가 뒤로 빠지면서 무대 배경의 일부분으로 동화되고,
천마가 전면에 나섰다.
[Come on and Do Not look back]
익숙한 노래의 후렴구.
천마는 이 노래를 프로듀싱할 때, 노래가 모든 사람에게 멀리 뻗어나갈 수 있도록 대중성에 신경 썼다.
그래서 단순하고 쉽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듣고도 따라부를 만큼.
밴드는 따져 묻고 싶었다.
‘아니, 저 목소리로 이 코러스를 부르는 건 사기 아닌가?’
몸이 저절로 들썩거린다.
머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Come on and cannot go back ]
드래곤플라이의 ‘Ode to the path’는 기본적으로 사운드의 스케일이 큰 노래이다.
그런데 천마는 그 규모를 더욱 크게 키웠다
원곡보다 더 신나고, 더 경쾌하고, 더 강렬하게!
그래서인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탁 놓게 만든다.
저항할 수도 없고,
저항하고 싶지도 않다.
그때 계단 꼭대기에서 1층 무대까지 내려온 천마가, 스탠딩 마이크를 잡아챘다.
여기서 더 고조된다.
[Come on and awaken yourself]
그래미 어워즈의 공연.
뮤지션들이 마음껏 뛰어놀라고 무대를 마련하지만, 클럽에서 한바탕 놀면서 공연하는 것과는 그 느낌이 같을 수가 없다.
무대가 가지는 상징성이 아티스트를 가두고, 긴장하게 만든다.
그런데 천마는 달랐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장 해제되는 느낌이다.
다 잊어버리고 미친 듯이 몸을 흔들고 싶을 정도로.
그 순간 밴드는 느꼈다.
바닥이 쿵쿵 울리고, 관객들의 몸이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들도 있다는 것을
“퍼킹! 이게 바로 록이지.”
저항하고.
자유로워져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
이건 어쩌면 락이 아니라 모든 장르의 음악이 뿌리를 두어야 할 정신이 아닐까?
그렇기에 이들 역시 정신줄을 놓기로 했다.
후렴구의 마지막 벌스가 몸속에서 끓어오르며 튀어나왔다.
[Come on and let's get sta—rted!!!]
시상식에 온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천마의 무대에 집중한다.
모두가 이걸 느꼈다.
그건 정말, 진짜 끝내주는 경험이었다!
.
.
.
그리고 5분 뒤.
밴드는 정신을 차렸고.
마침내 진짜 ‘록 특별 무대’를 보여줘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하지만.
- 우와아아아아아
- 천마! 천마! 천마! 천마! 천마!
천마가 들어간 이후에도 그를 향한 함성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밴드는 천마가 선사한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조금(?) 어수선해 보이는 관객석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왜 하필 저 개쩌는 무대 뒤에 하게 된 거지?’
밴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무대가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무대 뒤편에서 군악대 대원들과 세션들 하나하나에게 모두 인사를 했다.
함께 무대를 한 인원이 워낙에 많다 보니, 인사니 정리니 일이 다 끝나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제서야 무대의 열기가 가라앉았다.
‘와. 진짜 엄청 뛰어다녔는데?’
무대 위에서 흘린 땀만 한 바가지다.
나는 얼마 전 드래곤플라이와 연락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자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다.
- 뭐? 우리 노래를 시발 그래미에서 부르겠다고? 이거 완전 또라이잖아?
‘그래서 하지 마?’
- 아니, 존나 좋아!! 가서 다 박살 내버리라고. 원한다면 동생 새끼를 백보컬로 데려가도 돼.
···아무래도 박살을 내달라는 게럴드 형제의 주문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특별 무대까지 끝나고 커머셜 브레이크가 시작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나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
진작 도망갔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경공을 펼칠까 고민한 순간, 늦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직원, 동료 뮤지션, 음반산업 관계자 등 종류도 다양했다.
“와우! 천마, 공연 끝내줬어요. 같이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네. 근데 일단 여기서 나가고 봅시다.”
“방금 들은 곡은 미쳤네요! 코러스부터 시작하는 편곡은 죽여줬어요.”
“네, 저도 압니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수십 명과 인사를 나누고,
“천마 다음 일정은 어떻게 돼? 나는 근처 호텔에 묵고 있는데, 이따가 밤에 내 방에 올래?”
어느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윙크를 보내는 순간 임계점에 도달했다.
‘다 꺼지라고 할까?’
그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페니 로페즈였다.
“천마 님! 여기에요 여기!”
오. 핑계가 생겼다.
“잠시만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나는 인파를 뚫고 페니를 향해 다가갔다.
페니는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끌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을 용케 찾아낸 페니는, 착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아까 시상식 시작할 때부터 표정이 별로 안 좋더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입장할 때 아버지인 로페즈 회장과 같이 있었는데.
그때 잠깐동안 대화를 나눌 때도 지금처럼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때는 기자들과 보는 눈이 있어서 눈치라도 챙겼지, 지금은 대놓고 표정이 안 좋았다.
한 가지 짐작 가는 일이 있기는 하다.
‘설마 로페즈 회장이랑 아직도 사이가 안 좋은 건가?’
몇 달 전 리스닝 파티에서 만났을 때, 페니가 남자친구 문제로 아빠랑 싸우고 집을 나갔다고 했었는데.
그 이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궁금해진 내가 먼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하지만 페니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뱉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프로듀싱 앨범이요. 저도 거기에 참여할게요!”
“...아 그거?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잠시 쉴 거라고 하지 않았어?”
얼마 전.
나는 페니에게도 LA맨에게 한 제안을 똑같이 했다.
페니는 2년 전 내가 장르 변경을 해준 이후, 컨트리 팝 부문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컨트리 씬에서 페니의 독특한 이미지가 제대로 먹히는 중이었다.
부족한 것 없는 재벌집 딸내미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걸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서,
혼자 바닥부터 시작해서 기어 올라온 건 꽤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니까.
2년 전 나와 함께 작업했던 앨범 ‘The Real’이 성공한 이후 페니는 계속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최고의 신인상과 컨트리 송 퍼포먼스 부문에서 동시 수상하며 입지를 확고히 했다.
다만, 한창 잘 나갈 때인데 무슨 이유인지 잠시 휴식기를 가질 거라고 했다.
번아웃이 오는 뮤지션도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 마음이 바뀐 모양이다.
‘물론 페니라면 컨트리 팝이나 포크 팝을 확실하게 소화할 수 있겠지만···.’
컨디션이 괜찮을지 걱정되기는 했다. 그래서 물었다.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가도 괜찮은 거야?”
페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실 저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 뭐든 말해봐.”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페니는 종종 앨범과 관련해서 내 의견을 물었고, 나는 언제나 그녀에서 좋은 대답을 해주곤 했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이겠지.’
음악과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못 해줄 건 없지.
하지만,
“우리 아빠가 남자친구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거든요···.”
“...!?”
음악 상담은 개뿔.
“솔직히 아빠가 뭐라 하든 저는 신경을 하나도 안 쓰거든요? 괜찮다고 하는데도 남자친구가 그걸 되게 불편해해요. 으아아. 이제 슬슬 결혼도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 아빠는 진짜 도움이 하나도 안 돼!”
연애 상담이라니.
이건 내 전공 분야가 아닌데?
*
나는 페니의 연애 상담까지 끝냈다.
정신적으로 탈진된 기분이다.
‘어떻게 된 게 상담해주는 게 무대 뛰는 것보다 힘드냐.’
그래도 몇 년간 뉴튜브에서 천마의 고민 상담소를 운영한 짬바가 있다.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조언을 들은 페니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돌아갔다.
겨우 자리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헤이. 너 재밌는 거 한다며?”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봤다.
당장 공대에서 수업을 들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흰 티에 청바지.
트레이드 마트인 두꺼운 안경 때문에 얼핏 보면 너드같은 느낌마저 드는 남자.
다름 아닌 맥 로스웰이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진짜지.’
헐렁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이 녀석이야말로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팝스타다.
드래곤플라이가 전설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고,
토비와 하이포닉이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라면.
‘맥 로스웰은 지금 커리어의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달까?’
통기타 하나만을 덜렁 들고 올라와 루프 스테이션을 이용해 거대한 그래미 무대를 꽉 채우는 모습만 봐도, 그 실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맥 로스웰이 주최한 리스닝 파티에서 인연이 생겨, 이제 인별그램에 좋아요 정도는 누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거라니?”
무슨 소식을 듣고 온 걸까?
맥 로스웰은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벤져스 어셈블”
“······.”
“맞지?”
“···틀린 말은 아니지.”
어쩌다 보니 앨범에 참여하는 아티스트가 모두 그래미 수상자가 됐으니까.
그나저나 맥 로스웰이 관심이 있을 줄이야.
뜻밖의 수확이다.
만약 그가 들어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앨범의 무게감이 한 차원 올라갈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를 낮춰서) 프로듀싱 앨범에 대한 설명을 해줬고, 맥 로스웰 역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나도 참여해도 될까?”
“당연히 되기는 한데···.”
그런데 무슨 비밀결사라도 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존나 부끄러워지니까.
.
.
.
그래미 시상식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참고로.
아직 한 발 남았다.
< 그래미? 까짓것! (4)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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