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월드컵 (2) >
누군가 제안한,
‘우리랑 관계없지만 상징성은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건 어떻겠습니까?’라는 의견.
거기에 동의한 위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쪽과 관계가 없어 보이면서도, 이득을 챙겨갈 수 있는 방법을.
유럽과 아시아 이민자들이 많은 캐나다.
캐나다의 위원들은 생각했다.
‘우리는 유럽이나 아시아로 고개를 돌려봐야겠군. 유럽 쪽에서 할 만한 사람은 넘치고, 아시아 쪽에서는··· 할 사람이 있던가?’
다음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2번째로 큰 음악 시장을 가진 멕시코.
멕시코의 위원들도 생각했다.
‘우리랑 비슷한 라틴 음악을 하는 스페인 쪽을 밀어볼까?’
각자 자신들과 커넥션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고민하는 와중에,
헌트 회장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이거 천마가 딱인데?’
일단 천마가 주제가를 맡는다면 헌트 그룹에 이득이다.
헌트 그룹과 천마가 함께 하고 있는 사업만 벌써 2개고, 앞으로도 차차 늘려나갈 계획이다.
사업들은 대부분 천마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천마의 위상이 높아진다면 자연스럽게 헌트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업의 경쟁력이 높아진다.
무엇보다 천마는 아시아를 대표하지 않는가?
명분도 충분하다.
헌트 회장은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무작정 천마를 언급하기 전에 분위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래미 대표는 무조건 반대하겠군.’
이 자리에는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장이자 음악계의 저명인사인 그래미 대표도 함께하고 있었다.
천마가 지난 그래미 시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린 전적이 있는 만큼, 그래미 대표도 천마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다행인 것은 그래미 대표 외에는 특별히 반대할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트 회장은 마음속으로 위원들을 설득할 거리를 떠올리며 운을 띄웠다.
“흠흠, 혹시 천마는 어떨까요?”
역시나.
옆에 앉아 있던 그래미 대표는 곧바로 반문했다.
“천마를요?”
어디 급도 안되는 놈을 추천하냐는 듯한 뉘앙스.
그러나 반대는 이미 예상한바.
헌트 회장은 당황하지 않고 준비한 이유를 말했다.
“천마는 지금 비서구권에서 배출한 최고의 팝스타입니다. 이정도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천마의 퍼포먼스 실력은 최고죠. 위원님도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끄응.”
그래미 대표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반감이 있는 그래미 대표조차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퍼포먼스가 떠올랐다.
마치 영화에 한껏 몰입했을 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천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천마가 보여주는 장면이 펼쳐지는데···그건 마치 감미로운 폭력과도 같았다.
그래미 대표는 헌트 회장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천마에게 주제가를 배정해준다면, 배알이 꼴리기도 하고 왠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려보았다.
“너무 한 사람을 특정하지 말고 조금 시야를 넓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특히 유럽 쪽에는 뛰어난 뮤지션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헌트 회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론 유럽에 뛰어난 뮤지션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저도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유럽 역시 서양에 포함되는데. 또 서양 뮤지션을 끼워 넣으면 저들만의 축제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할 것 같습니다만. 월드컵 사상 최초로 3개의 국가가 공동 개최를 하는 만큼, 천마를 이용해 화합이라는 주제를 확실히 보여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헌트 회장이 강력히 주장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는 록홀 재단 회장도 있었다.
‘일리가 있군.’
헌트 회장의 말마따나, 천마만한 적임자가 없다.
중립적이면서도, 화합이라는 주제에 딱 맞는 인물.
개막식의 분위기를 화끈하게 띄울 수 있는 실력도 겸비하고 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른 위원들은 완전히 헌트 회장의 말에 넘어가는 눈치였다.
어차피 모두 각각 한 자리씩 가지고 가서, 이미 각국 음악팀이 지지고 볶는 중이다.
적당한 후보가 나타난 이상, 마지막 자리에 굳이 열을 올려가며 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호재지. 이쪽도 천마의 위상이 높아지면 좋으니까.’
11월에 있을 헌액 축전에서 천마가 연사를 하는 건 이미 확정된 일이다.
그전까지 커리어에 한 줄이라도 추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고로.
록홀 회장도 천마에게 찬성표를 던졌다.
“그럼, 마지막 주제가는 천마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결론이 났다.
헌트 회장의 희희낙락한 표정과,
잔뜩 찌푸려진 그래미 대표의 얼굴이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
그래미 이후.
내 명성은 급격하게 올라갔다.
그에 따라 계획하는 일의 스케일도 커지고, 들어오는 제안의 규모도 거대해졌다.
팬텀 스틸러 팀과 함께 내 노래를 이용한 뮤지컬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헌트 테마파크에서는 내가 만든 IP를 가지고 어트랙션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록홀에서는 드래곤플라이와 함께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아, 그래미 아티스트들과 프로덕션 앨범을 만들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월드컵 주제가까지 추가되었네?
하나하나 아티스트라면 눈 뒤집혀 달려들 만한 사안들이다.
“흐음···.”
하지만 나는 작업실에 어지러이 쌓여있는 작업물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최근에 너무 일을 많이 벌인 건가?”
앞선 네 가지 업무에 월드컵 주제가까지 하자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멈춰서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헌트 어트랙션이야 당장 내가 할 일은 없고, 그다음으로 덩어리가 큰 건 영화인가?’
이번 뮤지컬 영화에서 맡은 직책은 공동 음악 감독.
영화에 들어갈 사운드트랙 총 16곡을 직접 편곡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사운드트랙 전부 내가 작곡하고 불렀기 때문에, 편곡도 내가 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다행히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네.’
각 넘버가 어떤 장면에 들어갈지는 이미 얘기가 다 됐고, 그 방향성에 맞춰서 편곡하면 되는 터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1차 편곡이 완료되어가고 있었고, 현장을 담당할 킹 음악 감독이 그걸 받아 뮤지컬 영화에 어울리게 수정할 예정이었다.
이제 두어 곡 정도만 더 끝내면 본 촬영 전까지 내가 할 일은 끝낸 셈이다.
그럼 영화에 대한 건 여기서 마무리하고.
‘록홀 헌액 축전은 연말에 있다고 했었지?’
아직 한참 남았군.
그거는 내 앨범 활동을 마무리한 뒤에 준비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앨범인데.
‘이것도 슬슬 마무리 단계군.’
1~3번 트랙은 진작에 녹음이 끝났고, 드래곤플라이는 며칠 내로 녹음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엔딩곡과 지금 촬영하고 있는 뮤비 정도?
‘뮤비도 내가 당장 촬영해야 하는 부분은 없으니까.’
프로듀싱 앨범인 만큼 피처링한 아티스트 위주로 촬영이 들어갈 예정이다.
촬영 현장에서 진행 상황을 체크해야하기는 하겠지만, 딱 그정도면 충분하다.
정리를 끝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기에 월드컵 주제가 정도를 추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
조금 바빠지기는 할 테지만.
월드컵이라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월드컵이라 하면 세계 최고의 이벤트다.
지금 나의 인지도는 아시아와 북미 시장이 메인.
드래곤플라이 덕분에 영국에서의 인기도 오르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유럽과 다른 국가에서는 한끗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월드컵은 전 세계가 집중하지.’
세계 인구의 절반이 보는 그 무대에서.
내 노래로 한바탕 뒤집어 놓는다?
여기에 국대 팀에 음공 버프까지 먹이···아니, 여기까지는 너무 갔나?
아무튼.
누구라도 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날,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월드컵 주제가가 추가되었다.
*
시간이 흐르고 5월이 되었다.
그리고 5월이라 함은, 천마의 앨범 발매까지 두 달을 남겨둔 시점이다.
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개 얽히면서 판이 커졌고, 천마가 지금까지 준비하던 일의 성과도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덕분에 천마 전담팀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강여름은 방금 올라온 외신의 헤드라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국 국민 밴드 드래곤플라이,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입성!]
“와, 결국 오늘 발표가 나왔네. 타이밍 한번 죽인다.”
옆에 있던 옥수진도 해당 기사를 모니터링했는지 말을 받았다.
“그쵸? 마침 이번 주 금요일에 두번째 리드 싱글 발표인데, 누가 보면 짜기라도 한 줄 알겠어요.”
아직 천마가 축하공연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선다느니, 헌정 연설을 맡는다느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드래곤플라이가 록홀에 입성한다는 것만으로도 천마가 함께 주목받고 있었다.
사실상 해체한 드래곤플라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온 게 천마였으니.
기분이 하늘 끝까지 올라간 드래곤플라이의 팬들은 천마의 SNS에 찾아와서 한마디씩 남기고 갔다.
- 내 10대와 함께했던 밴드가 비극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결국 영광까지 보게 해줘서 고마워요!
- Cheonma is FIFTH MEMBER (천마는 다섯 번째 멤버지)
- Frankly you also have your own share of this. you also deserve it and more. thanks!
(솔직히 너도 여기에 몫이 있잖아. 함께 축하받을 자격이 있어. 넘치고말고. 고마워!)
- My favorite musician after Dragonfly (하트) (드래곤플라이 다음으로 최애)
- forever grateful (압도적 감사)
- i wish for u all the best fighting (브이)
드래곤플라이 팬들은 고맙다고 하고, 또 천마 팬들은 축하한다고 화답하고.
영국과 한국 사이에 이런 뜨거운 우애가 있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드래곤플라이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선공개 곡이 공개된다?
‘심지어 이번에는 뮤비까지 있지.’
지난번에 공개된 것은 1분 남짓한 인트로덕션 필름뿐이었지만, 이번에는 뮤비까지 풀공개된다.
그것도 확실한 퀄리티를 가지고,
뮤비 최종본을 떠올리던 옥수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번에는 어떤 반향을 이끌어낼까?’
천마와 일하는 건 여전히 즐거웠다.
천마가 만들어낸 음악적 결과물로,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는 건··· 매번 적응되지 않는 벅차오름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 천마와 함께하기로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진성전자 디자인 팀으로 갔다면, 이런 순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그때 만약 진성전자로 들어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일을 체크하던 와중, 강여름이 옆에서 물었다.
“참. 팀장님. 팝업 스토어 건은 어떻게 됐죠?”
아, 이번에는 특별히 앨범 발매와 맞춰 팝업 스토어를 열기로 했다.
아무래도 앨범 세계관이 독특하다 보니 관련 굿즈와 공간 인테리어를 잘해놓는다면, 젊은 세대를 후킹할 재미있는 놀거리로 부상할 수 있다.
참고로 옥수진이 졸업한 곳은 디자인학과이다.
그래서 팝업 스토어에 들어갈 제품 디자인 의뢰는 그녀가 전담했다.
옥수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인회사 업체에 맡겼어요. 마침 그쪽에 학교 선배들이 있더라고요. 잘됐죠.”
직장인과 알바생··· 아니, 인턴이 다니는 그 회사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몰려오고 있었다.
< 2026 월드컵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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