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월드컵 (4) >
불쑥 내밀어진 손.
나는 주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손호민 아니야?’
갑작스런 등장에 내가 깜짝 놀란 사이.
손호민은 내 손을 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아니, 천마 님이 어떻게 여기에? 이야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분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하하핫.”
“제가 더 반갑죠. 여기서 손호민 선수를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요.”
그쪽이야말로 한국 축구계의 스타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나도 마주 잡은 손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나도 한때는 축구 선수를 꿈꿨다. 이건 모든 초등학생의 로망 아니던가.
스포츠 중에서는 축구를 가장 좋아하고, 무림에서도 마교 월드컵 비슷한 걸 할 정도였다.
바쁜 와중에도 이번 월드컵 예선도 꼬박꼬박 챙겨 보았고.
“예선에서는 대단하시던데요? 일본 놈들 박살 낼 때는 제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하하,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천마 님 방송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네? 제 방송을 보세요?”
“제가 집돌이거든요. 훈련이나 경기 없으면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티비를 보는데, 요즘에는 예능보다 천마 님 채널이 더 재밌어요.”
손호민 선수 왈, 내 채널에서 한때 했던 스포츠 종목별 <도장 깨러 갑니다>로 입문했다고 합니다.
“천마 님도 완전 우리 과이시던데? 참, 친구들 중에서도 천마 님 구독자가 꽤 있어요.”
“친구들이요? 설마 동료 선수?”
손호민은 지금 영국의 토트넘 FC 소속이다.
그럼 거기 선수들도 내 뉴튜브를 본다는 건가?
손호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드래곤플라이 때문인지 천마 님 인기가 영국에서 엄청납니다. 친구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너가 같은 한국인이니 싸인 좀 대신 받아달라고···.”
한국인이라면 전부 천마를 만나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슨 논리냐며, 손호민이 투덜거렸다.
아무튼.
손호민은 나를 만난 것을 신기해했고, 나도 손호민을 만났다는 게 신기했다.
‘오늘 국대 선수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손호민이랑 이렇게 사적으로 이야기할 시간이 날 줄이야.’
손호민 선수가 소탈한 덕에 우리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유럽에서 내 인기도 전해 들었고, 손호민 선수가 겪었던 타지 생활에 대한 고충 등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는 자연스레 월드컵으로 넘어갔다.
이제 경기가 한 달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경기가 얼마 안 남았네요. 컨디션은 어때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참고로 한국은 개막식에서 미국을 상대한다.
개최국인 미국을.
손호민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휴, 이제 비행기만 타면 피곤합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몸이 예전 같지는 않네요, 하하.”
하긴. 한국 나이로 35살.
손호민은 이제 노장이다.
이런저런 부상까지 겹치면서 예전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공으로 손호민의 몸을 스캔해보았다.
‘흐음···.’
부상과 노화로 인해 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곳이 많았다.
지역 예선을 치른다고 비행시간도 길었고, 현지 적응 때문에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심적으로 부담도 크겠지.’
본인의 마지막 월드컵이기도 하고, 첫 상대가 하필 개최국인 미국이다.
미국 대표팀은 개막식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하기 위해 칼을 갈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 개막전에서 발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내가 개막 무대를 하고 그 뒤에 한국이 패배하면 아무래도 기분이 썩 좋을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럼 조금 도와줘 볼까.’
국가대표에 정식으로 고용되지 않고 마사지를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그냥 가벼운(?) 안마를 하도록 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호민의 뒤로 갔다.
“주장 완장 달고 뛰느라고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가 어깨를 좀 주물러 드릴게요.”
“어어어?”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손호민은 당황했다.
“어유,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아니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내 눈으로 한국 팀이 개막전에서 이기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서 그런다.
내가 어깨는 잡고 힘을 주자, 손호민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어어?”
손호민이 당황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몸 구석구석 내공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5분도 안 되는 사이, 얽혀있던 기혈을 모두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손호민은 신세계를 경험한 듯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와··· 이건. 찐이네요. 소속팀 마사지 트레이너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안마받고서 몸이 가벼워진 건 또 처음입니다.”
나는 어깨를 붕붕 돌리는 손호민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깨만 풀린 게 아닐 거다.
한 달 동안 내가 밀어 넣은 내력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면서 전체적으로 회복을 시켜줄 거다.
여기에 전문 의료진들이 달라붙을 테니 그 효과는 더 좋겠지.
마음 같아서는 국대 팀 전부를 잡고 안마를 해주고 싶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으니 에이스인 손호민이라도 챙겨줘야지.
‘이제 컨디션이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테니, 팀 멱살 잡고 캐리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
손호민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대로 헤어지기 좀 아쉬운데. 어떻게, 제가 선수들 좀 소개해 드릴까요? 방금 훈련이 끝나서 다들 쉬고 있을 거예요.”
어?
이거 설마?
‘단체로 버프 먹일 기회인가?’
*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단체로 신묘한 변화(?)를 겪을 무렵.
이곳 한국에서도 격변을 맞은 사람이 있다.
바로 강여름의 남동생, 강한솔.
군복을 입은 강한솔이 씩씩하게 말했다.
“병장 강한솔은 2026년 6월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소대원들에게 헹가래까지 받은 강한솔은 웃으면서 위병소를 나섰다.
그는 유독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던 22사단 56연대 2대대의 입구를 보며 생각했다.
북한에서 미확인비행물체를 날려서 완전군장으로 뺑이쳤던 일.
GOP 근무 중 옆 섹터에서 귀순자가 나와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근무를 했던 일 등.
“좆같았다 진짜. 이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말아야지.”
함께 나온 알동기들은 한껏 들떠 말했다.
“야 오늘 너 집 가면 뭐하냐?”
“건대에서 술 한잔 고?”
강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오늘 선약 있어.”
“어? 혹시 그 면회 자주 왔던 그 여자분이냐?”
“응. 이제 여자친구지.”
강한솔이 인정한 순간.
주위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오오오오오~ 강한솔!”
“뭐야? 고백은 또 언제 했대? 존나 부럽다 새끼야.”
“어쩐지 그렇게 자주 면회올 때부터 알아봤어.”
강한솔은 손사래 쳤다.
“아 뭔소리야. 지난번 면회 때는 아직 사귀기 전이었어. 그때는 그냥 친구였지.”
“이거 완전 개소리죠. 그냥 친구가 면회를 그렇게 자주 온다고?”
“그건 그냥 걔가 강원도에 살아서 그런거고.”
“강원도 살기는 개뿔. 원주랑 고성 졸라 멀거든? 야. 그럼 언제 고백했냐? 엉? 형님이 연애 꿀팁 좀 줄까?”
아무래도 이대로면 동기들의 취조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강한솔이 말했다.
“아무튼 다들 고생했다. 우리 조만간 꼭 술 한잔하자. 나 먼저 간다!”
온갖 야유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강한솔을 재빠르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한국 대학교 앞 국밥집.
강한솔을 휴대폰의 셀카 모드로 머리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구레나룻과 뒷머리가 휑한 게 자꾸 신경 쓰인다.
“왁스라도 바를 걸 그랬나.”
“뭐, 안 발라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때 뒤에서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솔이 뒤를 돌아보자 거기 있는 건.
천마의 여동생인 차소미였다!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에도 종종 같은 교양을 듣곤 했다.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다.
그리고 강한솔이 복무하던 고성에 차소미는 몇 번 면회도 와주었다.
친누나인 강여름은 한 번도 안 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말출 나왔을 때 강한솔이 먼저 고백한 것으로, 두 사람은 사귀게 되었다.
식당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순대국밥과 소주를 주문했다.
강한솔을 속을 뜨끈하게 채우는 찐한 국물에 감탄하다 차소미를 힐끗 보았다.
차소미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채,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달라보이네.’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털털한 여자 사람1이었고, 같이 공부하며 밤을 새울 때도 화장기 없는 모습만 봤는데.
살짝 웨이브 진 머리에, 투명한 메이크업이 더해지니 세상 청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이걸 왜 몰랐지?’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다.
국밥에 소주 한 잔 걸치며 두 사람은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내 강한솔의 군대무용담이 시작되었다.
군대에서 본 멧돼지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사격을 했는데 20발 만발을 꽂았다느니.
몇 번이고 들었던 레퍼토리를 또다시 들어주던 차소미가 문득 물었다.
“그래서, 너 이제 뭐할거야?”
“글쎄. 아직 학기 시작하려면 시간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지금은 6월.
대학교는 이제 막 방학을 시작했고, 강한솔은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할 예정이었다.
덕분에 3달이라는 여유시간이 생겼다.
강한솔은 차소미의 눈치를 보며 밑밥을 깔았다.
“이참에 여행이나 좀 다닐까 싶기도 하고. 너랑 바람 좀, 크흠, 쐬러다녀도 좋을 거 같아서.”
아. 강한솔은 돈이 좀 많다.
예전에.
그러니까 펄 엔터 인수 전쟁이 일어났을 때로 돌아가서.
코코넛과 천마신교가 경쟁적으로 주식을 쓸어 담으면서 펄 엔터의 주가가 폭등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전에 펄 엔터의 주식을 풀매수 했던 강한솔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군대에서 받은 월급도 차곡차곡 모아놓은 상태고.
돈도 있는데, 시간도 있겠다.
이참에 소미랑 같이 해외로 자유여행 한번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 1순위였다.
‘사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여행 얘기를 한번 꺼내볼까?’
강한솔이 운을 떼려는 바로 그때, 차소미가 파우치에서 티켓 2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잘됐네. 내가 마침 이번 월드컵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미국 여행 갈래?”
“뭐???!!!”
강한솔은 화들짝 놀랐다.
확인해보니 그냥 표도 아니고 개막식 표다.
이번 개막전 매치가 한국과 미국이라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더욱 흥분되는 건 차소미와 단둘이 가는 미국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눈이 동그래진 강한솔이 물었다.
“이거 어떻게 구한 거야? 나랑 같이 가도 돼?”
“흠흠, 별거 아니고. 나도 우연히 구한 거야. 그냥 너 군대 갔다 오느라고 고생했으니까. 같이 휴식도 할 겸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
강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차소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야, 진짜 너 진짜 와···. 나 이거 진짜 보고싶었는데. 내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니까.”
갑자기 다가온 강한솔의 손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직 그 흥분과 온기가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차소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강한솔이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오빠한테 머리 숙여 부탁한 보람이 있었다.
‘딱히 기대하고 오빠한테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차소미는 지난달 오빠와의 정기통화를 떠올렸다.
강한솔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건 진작에 파악했다.
오빠가 마침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혹시나 티켓을 구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본 건데.
‘월드컵 표? 마침 몇 장 가지고 있는게 있기는 하지.’
‘헐 진짜? 오빠아앙···.’
‘...토 나오게 애교 부리지 마라. 대신 ‘공손하게’ 부탁하면 고민 정도는 해볼게.’
그날 차소미는 정말 오랜만에, 오빠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덕분에 비행기도 퍼스트클래스로 얻어낼 수 있었지만.
무척이나 굴욕적이었는데.
강한솔이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때 국밥집에서 틀어놓은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천마, 북미 월드컵 D-7 출격···개막식 공연 확정!]
차선우가 월드컵 개막식에서 노래는 부른다는 소식이 마침내 한국을 강타했다.
한국이 월드컵에 진심인 만큼, 국밥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술렁였다.
“미친. 천마가 월드컵 주제가를 부른다고?”
“야야, 방금 봤는데 피파 공식 채널에 오피셜 떴다.”
일순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흥분에서 밥을 먹다 말고 폰을 확인하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강한솔도 머리끝까지 흥분이 차올랐다.
“와 씨 대박! 개막식에 천마가 온다고?”
방금 개막식 표를 구했는데, 천마가 여기서 공연한다?
이런 미친 우연이!
모두가 들썩거리는 와중, 차소미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렇게 생색내더니. 자기 공연 티켓이었어?’
< 2026 월드컵 (4) > 끝
ⓒ 연태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