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ck 06. 음공이 아니라, 음악 (2) >
천산 빌딩.
한국에 도착한 나는, 작업실에 자리 잡고 키보드를 뚱땅거렸다.
화면에 복잡한 점이 찍혔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게 뭐지?’
고민의 고민이 꼬리를 물던 와중.
다시 한번 드래곤플라이가 해줬던 조언이 떠오른다.
- 그래? 나는 뮤비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은데.
그래서 뮤비도 다시 한번 봤는데 딱히 얻은 건 없었다.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어쩌면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이 더 명확하게 볼 때도 있거든.
- 너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는 게 더 도움이 되는 법이지.
흠. 밖에서 보면 뭔가 보인다는 건가?
지견수목 불견삼림(只見樹木 不見森林).
마치 숲 안에 들어온 사람은 숲이 보이지 않는 이치인가 싶기도 하고.
드래곤플라이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
아니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곡을 써봐?
생각들이 얽히며 헝클어진다.
‘심음··· 심음이라.’
무언가가 내 가슴 한쪽을 콱 막고 있었다.
조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조급해졌던 걸까.
이번 앨범에 모든 걸 동원했으니 나도 그에 걸맞은 경지에 올라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작업실에 있다가는 계속 고민만 많아질 게 분명하다.
어쩌면 심마가 불쑥 찾아올지도 모르고.
나는 1층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장소를 이동했다.
이번에 새로 꾸민 라운지.
직원이 늘어나고 휴게공간이 부족해지면서, 아예 한 층을 더 임대해 라운지로 꾸몄다.
편안한 카우치 쇼파와 안마 의자, 넓은 책상과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테리아.
여기에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뷰까지.
직원들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아티스트들은 여기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은잠술을 썼다.
그다음 라운지의 가장 구석진, 파티션이 쳐진 공간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조용하던 라운지에 시끌해지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길성진과 유니트론이었다.
‘저 둘은 요즘 계속 같이 다니나 보네.’
어제 근처 식당에서도 두 사람이 같이 밥 먹는 모습을 봤는데.
오늘도 여전히 같이 다니고 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잔뜩 심란해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유니트론이 천마신교에서 강호행을 한 지 벌써 두 달.
내 예상대로 천재병 걸린 길성진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유니트론은 강호행을 하면서 좀 바뀌었으려나.’
일전에 헌트 회장이 유니트론을 천마신교에 맡기면서 나를 꼭 집어 잘 부탁한다고 하길래, 왜 꼭 나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 나는 유니트론이 자네와 참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
‘...제가? 유니트론이랑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유니트론은 헌트 뮤직그룹에서 ‘만들어낸 아티스트 (industry plant)’이고, 그의 음악은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헌트 회장은 껄껄 웃었다.
- 둘 다 미학적인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나. 사람들이 듣기에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있지.
- 거기에다 장르 불문하고 대중적으로 곡을 만들어내는 데다, 앉은 자리에서 뚝딱 곡을 써낸다는 것도 비슷하고.
‘뭐, 그건 틀린 말은 아니네요.’
- 아무튼, 앨범 준비로 바쁜 건 알지만 유니트론을 잘 좀 부탁하네. 나도 자네 영화에 신경쓰도록 하지.
‘시간 나면 봐줄게요.’
일단 유니트론에게 도움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진짜 시간이 나지 않았다.
요즘 너무 바빠서 나도 한국에 거의 두 달 만에 들어온 상황이니까.
내가 헌트 회장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길성진과 유니트론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대화가··· 흥미로웠다.
나는 고민은 잠깐 접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유니트론이 한국에 온 지도 벌써 2달이 흘렀다.
다행히 적응은 어렵지는 않았다
일단 그의 성격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었고, 천마신교에서도 전담 매니저를 포함해 숙식에 필요한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딱 한 가지 적응하기 어려운 게 있었는데.
바로 길성진이다.
6월 말.
온도는 30도를 넘나들고, 슬금슬금 습도가 높아지는 초여름.
땀에 푹 젖은 유니트론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천마신교 라운지에 도착했다.
‘...왜 3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몇 시간 동안 돌아온 거지?’
이게 다 길성진 때문이다.
길성진은 갑자기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매니저도 없이 길을 나섰다.
신촌에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시설을 구경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조금 걸어서 2호선을 타면 천마신교가 있는 합정까지 금방 갈 수 있는데, 길성진은 굳이 버스를 타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유니트론은 항의했다.
‘지도 어플을 보면 최단 거리는 지하철이야. 지하철로 가자.’
그러니 길성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항상 효율적이고 빠른 게 옳은 건 아니야.’
‘그럼?’
‘돌아가더라도 멋진 길을 가는 게 중요하지.’
‘.......’
‘버스를 타면 차가운 지하철에는 없는 풍경을 느낄 수 있거든. 이왕 한국에 온 김에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게 좋잖아?’
유니트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으로 강호행을 왔고,
강호행 선배(?)이기도 한 길성진이 그렇게 말하자 의심쩍지만 따랐다.
‘음. 그럼 알겠어.’
물론 사람 가득한 만원 버스에서, 에어컨이 고장 나고, 출퇴근 시간에 걸려 평소보다 세 배는 더 걸려서 천마신교에 도착할 줄 알았다면 절대 반대했을 거다.
유니트론은 과연 이게 멋진 길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느새 길성진의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시원한 단호박 식혜 -한국에서 제일 마음에 든 음료다- 한 잔을 빨며 라운지로 올라왔다.
아늑하고 조용한 라운지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강호행이 끝나고 길성진이 냈었던 앨범 수록곡이었다.
길성진은 자신의 노래를 듣더니 강호행의 추억에 잠겼다.
“이야, 이 노래가 나오네. 이거 만들 때 진짜 힘들었는데. 말은 안 통하지, 매일 공연하는 건 너무 지치지, 음식은 또 왜 그렇게 달고 짠지. 네가 뉴욕 퀸즈에 있었댔지? 거기는 LA랑 음식이 다른가?”
유니트론은 뉴욕과 LA의 음식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달랐던가?
고민 끝에, 프랜차이즈를 주로 다녀서 특별히 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길성진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강호행 덕분에 철이 팍 들어버린 거 아니겠어? 강호행 아니었으면 아직도 애송이 티를 못 벗었을 거야.”
“그런가?”
유니트론 자신도 강호행을 하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길성진의 말이 와닿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효능(?)이 있길래 그렇게 강호행을 찬양하는 건지.
그러나 길성진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야. 트론아. 내 1집 앨범이랑 2집 앨범 한번 생각해 봐라. 확실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지지 않냐?”
“그렇지.”
“솔직히 1집에서는 허세가 좀 있었지. 나도 그때는 왜 그런 게 멋있어 보였는지 참.”
유니트론은 길성진의 앨범을 둘 다 들어봤다. 그것도 한-영 번안된 가사까지 참고해가면서 말이다.
그런 입장에서, 강호행을 다녀온 후 만든 2집이 훨씬 낫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었다.
1집에는 쓸데없는 기교가 많아서 완성도를 떨어뜨린다고 해야 하나?
그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뽐내기 위해 만든 노래 같았다.
길성진은 강호행을 추억하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강호행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게 있거든. 기교보다는 솔직담백한 고백이 훨씬 멋있다는 거지.”
유니트론은 지금 나오는 길성진의 노래를 들으며, 영어로 번역된 가사를 곱씹었다.
장르로 구분하자면 컨트리와 유사한 노래.
자주 가는 카페의 알바생에게 고백을 했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이후 실연을 달래고자 쓸쓸하게 이별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
그저 눈물 한 방울로만 사랑을 떠나보내는··· 그런 내용의 노래였다.
“우리의 청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표현하는 거, 멋있지 않냐? 생각해 봐. 딱 우리 나이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거잖아.”
길성진은 그럴싸하게 포장했다마는, 세간에서는 ‘특유의 찌질함이 공감된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외국인인 유니트론이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침 가사도 한-영 번역된 덕분에 찌질함이 반감되기도 했고.
길성진은 믿음직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강호행을 하며 얻은 깨달음이 있었다.
유니트론 눈을 감고 길성진의 노래를 제대로 감상했다.
곡의 구조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자동반사적으로 자신이라면 어떻게 노래를 뜯어고쳐야 할지 떠올랐지만.
이전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변화도 없겠지.
‘이런 진행을 통해서 길성진이 담고 싶었던 마음이 뭘까?’
고민해보니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반부에 과하게 박자를 쪼개고, 그에 맞춰서 가사도 분절시킨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알바생과 화자가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메이저곡으로 진행하다가 별안간 마이너 코드를 사용하고, 그조차도 한 옥타브 위를 바로 찍어서 뜬금없이 느껴지던 전개도.
오히려 화자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다.
노래는 톡톡 튀는 길성진의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처음이군.’
유니트론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탐구해보기로 했다.
“그렇군. 그럼 방금 노래는 어떻게 만든 거지? 경험담을 이용한건가?”
그 말에 길성진은 펄쩍 뛰어올랐다.
“겨, 경험담이라니!”
*
유니트론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유니트론도 바뀌는군.’
세상에 유니트론이 감성을 찾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게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음을 구하면서까지.
지금껏 내가 아는 유니트론은 수학과 논리의 세계로 음악을 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방금 대화를 들으며, 나는 녀석의 세계가 넓어지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깐만.’
뭔가 스쳐 지나갔다.
“세계가 넓어진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쳐다봤지만,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천마 님이군요.”
“어라? 언제 거기에 있었어요?”
나를 발견한 유니트론과 길성진이 부르는 소리까지 무시하고, 바로 작업실로 올라갔다.
- 그래? 나는 뮤비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은데.
드래곤플라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했다.
작업실에 도착한 나는 곧장 인트로덕션 필름을 재생했다.
경계선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아포칼립스의 근원지인 잠마동이 있다.
잠마동은 무림을 상징한다.
소설 ‘음공천마’를 읽고 끌려가 수십 년을 살았던 그 세계.
잠마동에서 한 남자가 나와 경계선을 넘어간다.
경계선 너머에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아포칼립스 기운에 물든 세상.
이는 아직도 무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그래. 나는 이전에 쌓아놨던 ‘음공’을 가지고 노래를 했었지.’
헌트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 둘 다 미학적인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나.
헌트 회장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 거 같다.
음공은 본질적으로 무공이다.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무공.
그러나 무공은 ‘혼자’서 쌓아가는 것.
‘하지만 음악은 음공과 달라.’
나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경계선에 있던 남자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음악이 시작된다.
커플이 보여준 사랑이 있고.
아집을 접어두고 뭉친 밴드가 보여준 이야기도 있고.
각자의 노래로 빈민가를 바꿔보려던 두 래퍼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관계가 있고, 흐름이 있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나에게 모자랐던 것은 단 한 걸음.
벽을 뛰어넘기 위해, 한 번의 도움닫기면 충분했다.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깨달음들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잠마동을 벗어난 남자가 가야 할 길은 정해졌다.
음공을 넘어선 음악.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 Track 06. 음공이 아니라, 음악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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