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2) >
밖에서는 한창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을 시각.
나는 대기실에서 이번 신곡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
유난히 마음 고생을 하며 만들었던 노래라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애착이 간다.
내 옆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고 촬영하던 강여름이 말했다.
“근데 이번 노래 말이에요. 자꾸 따라 부르게 돼요.”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러라고 쉽게 만들었는데.”
이번 노래를 만드는 데 영감을 준 건,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 송.
한국에서는 ‘도는 도라지의 도♪’로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다.
2/4박자 장조에, 누구라도 따라부를 수 있는 단순한 계율로 메인 코러스를 만들었다.
강여름의 말대로, 아마 다들 쉽고 흥겹게 따라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심음의 경지에 다다르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
그건 바로 음공과 음악은 다르다는 것.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경지를 개척하고 대단한 노래는 만드는 게 아닌.
대중들과 소통하고, 팬들과 함께 노래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대중에게 내 의지를 전달하는 걸 넘어서서.
공연에서 처음 듣더라도 함께 따라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만들어보았다.
이걸 통해서 나와 그들의 관계도 다시 정립하고 싶다.
일방적으로 내공을 담은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구성원으로.
내 설명을 들은 강여름은 카메라를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헤에. 그럼 저랑 같이 노래 부를래요?”
“...떨어지세요.”
“쳇”
지금 찍고 있는 것은 비하인드 영상.
지금 대기실에서의 모습도 찍고, 중간중간 간단한 인터뷰를 추가해서 이번 앨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볼 생각이다.
강여름이 중간중간 인터뷰 질문을 던졌다.
“이번 곡 제목 특이한 거 같아요.”
“뭐, 그렇죠. 천문학 용어니까.”
거리의 사다리.
천문학에서 별과 천체들의 거리를 재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가본 적도 별의 거리를 잴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됐고, 천문학자들은 고심 끝에 ‘사다리 타기’라는 방법을 내놓았다.
다양한 방법들이 서로를 보완해주면서 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내용의 이론이다.
내가 파악한 요점은 이 정도이고,
나머지는 자막 팀이 열심히 공부해서 자막으로 달아놓겠지.
다만 중요한 건 이거다.
“사다리를 타고 별을 향해 나아가는 거죠.”
“오오오올 뭔가 멋있는데요?”
띄어주던 강여름이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어?”
나는 웃었다.
그녀라면 충분히 의미를 알아챌 줄 알았다.
“어어어어? 설마? 그 ‘작은 별’이랑?”
강여름이 말하는 ‘작은 별’은 정규 1집 때 만들었던 팬 송이다.
모차르트 작은 별 변주곡을 샘플링하여, 팬을 작은 별에 비유했던 노래였다.
이번에는 팬에게만 국한시키려는 의미는 없었지만.
“나와 너희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뭐 그런 주제를 가지고 있는 노래라고도 할 수 있죠.”
“우와아앗! 이거 뭔가뭔가한데요!”
강여름이 눈을 반짝였다.
카메라가 나를 향해 조금 더 다가왔다.
“방금 말씀하신 것들 이번 비하인드 필름에 써먹으면 최고겠네요. 뭐 혹시 그런거 더 없어요? 숨겨둔 설정이라던가?”
“.......”
심히 부담스러워지는 건 왜일까.
*
정식 명칭 글래스톤베리 현대 공연 예술 페스티벌
줄여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긴 단순히 음악만을 듣는 페스티벌이 아니다.
5박 6일이라는 시간 동안 필튼 농장 안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종합 예술 페스티벌이다.
간이 영화관부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 요가 클래스 등등 음악 말고도 즐길 거리가 넘쳐난다.
심지어 커다란 텐트에 화려한 조명을 달고 클럽처럼 꾸며 놓은 장소도 있다.
이런 대규모 페스티벌이 처음인 공무원.
그녀는 글래스톤베리의 열기에 흥분했다.
마치 페스티벌이 열리는 이 장소만 세계와 떨어진 느낌이었다.
의욕에 넘친 공무원은 축제가 끝나기 전까지 페스티벌의 모든 것을 즐기겠노라 다짐했고···.
“으아··· 죽겠다.”
단 하루 만에 기절했다.
매일 같이 책상 앞에서 행정 업무만 하던 그녀가 정복하기에 글래스톤베리는 넓고도 넓었다.
“이대로는 천마 무대 즐길 힘도 없겠다.”
결국 공무원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체력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아. 공무원과 같은 텐트를 쓰던 히피 머리 여자.
첫날 이후 공무원은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뭐, 글래스톤베리 경험이 많은지 아는 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아는 것만큼 체력도 엄청 많았고 무엇보다 너무 제멋대로였다!
음식은 어디가 맛있다느니, 이 시간에는 이 무대를 꼭 봐야 한다느니 이리저리 공무원을 끌고 다녔다.
첫째 날 공무원이 기절한 데에는 히피 머리 여자의 지분도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이후 며칠 동안은 적당히 공연을 보고, 적당히 축제를 즐기고.
드디어 찾아온 마지막 날.
공무원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마의 공연이 있는 날.
공무원은 전날 깨끗하게 목욕재계도 하고, 잠도 푹 자서 컨디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무조건 빨리 가서 맨 앞자리 잡아야지. 그리고 죽어도 거기서 죽는다!”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에 도착한 공무원은 맨 앞자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였다.
툭툭-
옆에서 누군가 그녀를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처음에는 그저 옆 사람이랑 몸이 부딪혀서 그런 줄 알았는데.
툭툭툭툭툭툭툭-
그런데 아니었다. 공무원은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히피 머리 여자가 있었다.
공무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히피 머리 여자를 바라봤다.
분명 오늘 오틱스의 공연을 보러 간다고 했었는데.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오틱스 공연은 어쩌고?”
그러자 히피 머리 여자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거? 아까 갔다 왔는데 너무 노잼이더라고. 관객 반응도 없고. 그래도 천마 무대는 워낙 유명하잖아.”
그 말을 들은 공무원은 괜히 으쓱해졌다.
“흠흠, 뭐 천마가 무대를 잘하기는 하지.”
공무원은 히피 머리 여자에게 천마 자랑을 좀 하면서 방방 뛰어놀았고, 마침내 그 시간이 다가왔다.
천마의 무대가 시작되는 순간, 공무원의 으쓱거림은 우쭐거림으로 바뀌었다.
옆에 있던 히피 머리는 입을 쩍 벌렸다.
“우와아아아악! 대박!”
근데 그럴 만했다.
일단 무대 시작부터 남달랐다.
지금까지 공무원이 본 페스티벌 무대 시작은 거기서 거기다.
지이이잉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요란한 불빛이 번쩍번쩍하고, 가수가 ‘Glastonbury! Turn that shit up!’이라고 외치면서 등장하는 것.
하지만 천마의 무대는 일단 대규모 퍼포먼스부터 때려 박는다.
무대 꼭대기에서 내려온 거대한 하얀 천이 무대를 덮는다.
피라미드 모양의 배에 돛이 활짝 펴진 것 같다.
이내 하얀 돛 위로 검은 그림자가 비친다.
거대한 함선의 골격, 그 위에 선장처럼 우뚝 서 있는 남자.
“천마다!”
“와!! 천마! 천마! 천마!”
피라미드 스테이지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천마의 이름을 외친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공무원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콘서트에 온 것처럼, 사람들이 천마의 이름을 환호하는 모습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천마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찌이이잉-
거친 베이스 소리가 글래스톤베리를 울린다.
관객들을 향해 출사표를 던지는 듯한 소리.
동시에 거센 바람이 무대를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순간, 무대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천이 하늘로 올라간다.
무대 위에 있는 건 웅장한 함선.
뱃머리에 우뚝 서서, 비뚜름하게 모자를 쓴 천마가 보인다.
둥둥 두웅 둥둥둥
세션들의 연주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히피 머리 여자가 소리쳤다.
“둠둠둠이다!”
공무원은 황당한 눈빛으로 히피 머리 여자를 바라봤다.
“...뭐야? 니가 이걸 어떻게 알아?”
천마 안 좋아한다면서.
“아, 이거? 이때는 천마가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파봤어.”
“.......”
아무렴 그러시겠지.
둠둠둠이라면 천마가 아직 한국에서만 활동할 때 발매한 데뷔곡이다.
그 일관성 있는 태도에 공무원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원곡보다 길고 강렬하게 편곡된 인트로는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아예 무대를 터트리기로 작정을 한 건지, 벌스와 프리코러스는 생략하고.
둠 챌린지로 유명한 둠둠둠의 코러스가 곧장 시작되었다.
- 또 한번 시작해볼까?
replay replay I play once again.
천마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공무원은 기절할 뻔했다.
관객석에서도 괴성에 가까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끼야아아악!!”
“천마!천마아아악!!”
공무원도 목 놓아 소리 지르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슨 성대를 갈아치웠냐고!’
평소에도 천마의 낮고 묵직한 저음은 베이스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거기서 두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가 된 것 같다.
두근거림도 두 배!
열기도 두 배!
공무원은 무대에 푹 빠져들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함선을 타고 같이 여행하는 컨셉도.
출사표 던지는 둠둠둠 부터, 다른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Time Lapse도 적재적소에 쓰였다.
거기에 페니-DJ 커플, LA맨들이 게스트로 나와 신곡을 불러줬다.
이들과 얽힌 천마의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도록.
그렇다. 이번 천마의 무대는 단순히 사람들을 환호시키는 쇼가 아니었다.
무대 위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편곡을 통해 하나로 이어놓은 곡이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둠둠둠으로 처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천마가, Time Lapse로 그간 살아온 삶을 보여주고, 이후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왔는지.
여기에 중간중간 이번 앨범의 컨셉과 관련된 VCR을 활용하며 무대에 하나의 서사가 탄생한다.
조금 전 팬 송인 작은 별을 불러줄 때는 눈물도 찔끔 났다.
천마가 걸어왔던, 멀리 있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공유했던 모든 시간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히피 머리가 넋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무대에 엄청 공들였네. 무슨 페스티벌을 단독 콘서트처럼 하냐. 무대 장치부터 게스트까지 퀄리티 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칭찬에 우쭐거릴 정신도 없었다.
너무 황홀했기에.
그저 이 무대를 즐기기에도 부족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무대 위의 천마가 말했다.
-이제 벌써 마지막 곡이네.
“뭐야? 벌써!?”
말도 안 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지막 곡이라니!
천마는 조용히 웃었다.
- 아쉬워?
“응 너무너무 아쉬워! 100곡만 더 해줘!”
공무원도 히피 머리도 하나 되어 왁왁 소리 질렀다.
아쉬움이 담긴 야유와, 앵콜 소리가 뒤섞였다.
앵콜 앵콜 앵콜!
그리고.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
차선우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보인다.
끝없이, 끝없이.
그는 떠올렸다.
거리의 사다리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의 거리를 재는 모습을.
그렇다면.
너와 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닿을 수 있을까.
가끔은 그런 때가 있다.
상대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때가.
그래서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우리의 거리는.
0이 된다.
심음(心音).
천마가 부르는 노래가,
무수한 거리를 건너뛰어 마음에 닿았다.
<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2) > 끝
ⓒ 연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