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12화 (12/194)

연수는 빠르게 지나갔다.

백범문화연구소의 행정실과 보안실 등을 돌아다니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경험하였고, 때로는 김 박사가 의욕 없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이상異常의 예시와 분류와 위험, 한국에서 활동하는 적대집단 등등….

그렇게 지난 시간이 벌써 6일.

내일이면 연수가 끝난다.

일정을 마친 이연우와 강열은 침대에 앉아 짐을 정리했다. 내일 바로 떠날 수 있게끔, 옷가지와 생필품 따위를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꾹꾹-

강열은 수건 따위를 각진 벽돌로 만들다가, 문득 말했다.

“연수가 벌써 끝나다니. 뭔가 실감이 안 납니다.”

“그러게요. 사고가 터진 게 엊그제 같은데.”

이연우는 대충 반팔티를 구겨 넣었다. 그 손이 떨렸다. 아직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비릿한 피냄새와, 기괴한 일기장이 사락- 넘어가는 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

참상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짐을 정리하는 소리만 이어지길 잠시.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느닷없이 열린 문 틈새로 하얀 얼굴을 쏙 들이밀었다.

“동기님들. 아직 안 자죠?”

“서연 씨? 무슨 일이십니까?”

강열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일정이 다 마무리되고, 신변정리도 끝난 밤 11시.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이서연은 배시시 웃으며 슬쩍 고개를 빼 복도를 둘러보고는, 얼른 방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부스럭-

품에 무언가를 꼭 안고서.

“그거, 연수 올 때 가져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열이 눈을 크게 뜨고 말하는 동안, 이연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큼직한 봉지 과자와, 이온음료 크기의 페트병 소주가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인다.

다음 순간, 이연우는 짐이 잔뜩 섞인 가방을 뒤져 텀블러를 꺼냈다.

이서연이 강열을 흘겨보며, 빈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양손에 나눠 쥔 과자와 소주를 얼굴 앞까지 올린 후, 흔들어 보였다.

“그래서 안 마실 거예요? 연수 마지막 밤인데? 오늘까지 아껴놓은 건데?”

“그건….”

“전 마실 겁니다.”

“자, 받으세요.”

페트병 뚜껑을 따서, 이연우의 텀블러에 소주를 따른다. 꼴꼴꼴-, 소주 특유의 알콜냄새가 확 퍼진다. 이어 삼분의 일쯤 비워진 소주병이 강열에게 향했다.

“진짜 안 마셔요? 마시기 싫으면 말고요.”

“아닙니다. 마시겠습니다.”

강열의 잔이 채워지는 동안, 이연우는 과자를 뜯었다. 부우욱, 배가 찢어진 봉지에 담긴 새우 과자.

이서연이 장난스럽게 한탄했다.

“자기들은 받았다고, 나는 신경도 안 쓰는 것 좀 봐. 됐어요. 내 잔은 내가 따를래.”

“아니, 그게.”

“늦었어요, 짠, 짠.”

“짠.”

신나는 외침과 함께 서로 다른 텀블러가 모였다가 떨어진다. 각자의 입으로 돌아간 텀블러.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 후, 신음이 터졌다.

“으-. 달다-.”

“크윽.”

세 명이 동시에 손을 뻗어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먹는다. 과자를 삼킨 입에서는 앞으로의 회사 생활 이야기가 술 냄새와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열 씨는 보안실로 간다고 했죠? 부럽다.”

“경력 때문에 뽑혔을 뿐입니다.”

“그래도요. 저도 그런 일 하고 싶었는데. 제가 원래 국정원에서도 데스크에 앉아 행정일만 했거든요.”

이서연은 바로 잔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쓴맛 때문인지, 미간이 찌푸려진다.

“뭔가 특별한 일, 그런 거 하고 싶어서 회사에 온 건데. 또 똑같이 행정계열이야.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게 생겼어.”

그리고는 소주를 꿀꺽꿀꺽 삼킨다.

이연우는 새우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배부른 소리다. 사무직이면 오히려 좋다, 게다가 저렇게 마시면 빨리 취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 이서연의 눈이 흐리게 풀렸다. 취한 동공이 이연우를 보았다.

“연우 씨도 부러워요. 한국지사로 가잖아요. 그것도 이름부터 멋있어 보이는, 이상조사반이라면서요.”

“글쎄요. 뭐 하는 부서인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래도 저보다는 재밌지 않을까요? 이상異常도 막 만날 거 같은 이름인데.”

이연우는 텀블러를 매만지다가 작게 답했다.

“마주쳐서 뭐가 좋을까 싶습니다. 다른 두 분 돌아가신 거 봤잖아요.”

“아. 그건 그렇죠….”

잠깐 침묵.

이서연이 말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동했던 허창성 씨와 송시우 씨를 위하여.”

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건배사가 돌아간다.

“우리의 회사생활을 위하여!”

강열이 외치고.

“큰 사고 없이 안전하고 평안한 회사생활이 되기를 바라며.”

이연우가 소망했다.

그렇게 텀블러 셋이 또 부딪치는 순간.

딱-!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플라스틱 막대끼리 강하게 부딪치는 듯한, 그러면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리.

텀블러를 입에 가져가던 자세로 멈춘 신입사원이 서로 눈을 마주친다. 의문 가득한 눈뿐이다. 이연우가 의심스럽게 말한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습니까?”

“저도 들었습니다. 텀블러 부딪치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꼭, 슬레이트 치는 소리 같았는데. 막 영화나 드라마 촬영할 때 쓰는 그거.”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린다. 신입사원 셋이 화들짝 놀라며 텀블러를 숨기려고 하나, 도리어 급한 손길에 남은 소주가 쏟아지면서 알콜 향이 확 퍼진다.

바닥에 쏟아진 소주가 흥건하게 퍼지는 가운데, 그 위로 슬리퍼가 철퍽 떨어진다.

김 박사의 슬리퍼다. 김 박사가 술에 취한 이서연을 내려본다. 이서연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다.

“아, 그러니까, 제가 술 가져온 거고, 제가 마시자고 한 건데요.”

“여러분.”

말을 끊는다. 김 박사가 손을 파닥거리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무사히 연수를 마친 것을 기념해 공연이 준비되었습니다. 얼른 보러 가시죠.”

“예…? 이 시간에요…?”

이연우가 무심코 창가를 본다. 창 옆의 시계는 12시를 향해 달리고, 창밖은 깜깜하다. 가로등조차 없는 산골, 달도 뜨지 않은 심야다.

이연우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다. 하지만 제멋대로 손이 움직인다. 짝, 짝짝, 짝짝짝, 박수를 치는 손바닥. 세 명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박수 위로 말소리를 더한다.

“그거 너무 기대되네요! 얼른 보러 가죠!”

“갑시다!”

“세상에! 노래 한 소절로 사람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는, 그 전설의 가수! 레오나르도 다 서울(Leonardo da Seoul)이라니! 이건 꼭 들어야겠는걸!”

누군지도 모르는, 김 박사가 말하지도 않은, 처음 듣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다. 아니, 입만이 아니다.

덜컥- 끽-

발이 멋대로 움직여 슬리퍼를 신고, 몸이 멋대로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난다. 이어, 보이지 않는 실이 잡아당기는 듯, 다리가 교차하며 뻣뻣하게 걸어간다.

이연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

“레디!”

딱-!

“액션!”

***

0. 오프닝

자막 :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이 세계를 감동시키는 예술이라면 더. - 자유예술가협회

1. 중산골 정류장 / 밤

내리쬐는 달빛이 정류장 표지판과 아래 있는 레오나르도와 감독을 밝게 비춘다. 감독이 주먹 쥔 팔을 치켜든다.

감독 :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예술을 억압하는 회사를 타도하자! 예술을 검열하고, 창고에 가둬 먼지만 먹이고, 때로는 파괴하는 회사를 타도하자!

레오나르도 : (귀찮다는 듯) 아저씨, 일이나 후딱 마치고 가자고요.

레오나르도가 등에 멘 기타 케이스를 툭툭 친다.

감독은 주먹 쥔 팔을 부르르 떨고는 자기 가슴을 쾅쾅 친다.

감독 :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험난한 길이었다! 세계를 감동시키는 예술만 모아두는 회사의 창고를 찾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 조그마한 나라를 찾고, 또 이 연구소를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세계를 떠돌던 그 여정은 시나리오만 수십편!

레오나르도 : (짜증스레) 아, 적당히 좀 하시라고요.

돌아선 레오나르도가 혼자 백범문화연구소로 가는 산길로 나아간다. 그 뒷모습을 노려본 감독이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

길 너머로 멀어지는 둘.

타이틀 ‘예술회수대작전’이 떠오른다.

***

“컷!”

그 말과 동시에 조명처럼 내리쬐던 달빛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산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잘만 걷던 레오나르도와 감독이 멈추어 섰다.

“아저씨요. 촬영 다시 시작하죠? 이래서는 길도 못 찾겠는데.”

“안 돼! 이딴 건 ‘예술회수대작전’에 필요 없는 씬이야! 지루하고, 재미없고, 의미도 없잖아!”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그러다 회사 놈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조심하느라 핸드폰조차 켜지 않았는데, 고함이 웬 말이냐. 기타 케이스를 고쳐 맨 레오나르드는 조심스럽게 길을 찾아 발을 옮겼다. 입에서는 투덜거리는 말이 속삭이듯 나왔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에요? 달도 없어서 걷기도 힘든데.”

“그건 내 작품, ‘백범문화연구소 염탐대작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오래 걸렸고, 또 훌륭한-”

“아, 됐어요. 안 봐요, 안 봐.”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 어찌어찌 문화연구소에 가까워졌다. 머지않은 거리에,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이 둘. 흐린 어둠이 내려앉은 정문에는 사람 그림자가 보이는 듯도 하다.

둘은 나무 뒤로 숨은 후,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어째요? 저는 공연만 하면 된다면서요.”

“레디.”

이글거리는 목소리와 눈. 연구소 건물을 노려보며 감독이 작게 중얼거린다. 직후.

딱-!

슬레이트 치는 소리가 허공 어디선가 들려오고, 감독이 큐사인을 마쳤다.

“액션.”

***

2. 백범문화연구소 정문 / 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야간근무를 서는 보안직원 둘이 시시덕거린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보안직원1이 고개를 돌려 길 너머를 본다.

보안직원1 : 지금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누가 오나?

보안직원2 : 이 밤중에 누가 와요. 오면 적이겠죠.

보안직원1 : 그렇지? 일단 경계해.

보안직원1이 테이저 건을 쥐고, 보안직원2가 무전기를 입 앞에 대면서 길에 시선을 고정한다. 어두운 길 너머에서 사람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진다. 무전기의 통신버튼 위에 올린 손가락.

레오나르도 : 고생하십니다. 오늘 공연 초청받은 레오나르도 다 서울입니다!

레오나르도가 밝게 웃으며 꾸벅 인사한다. 보안직원이 무전기와 테이저 건을 놓는다.

보안직원2 : 와! 레오나르도 다 서울! 팬이에요! 꼭 한번 직관하고 싶었어요!

보안직원1 : 한 번 들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는 레오나르도 다 서울이잖아! 이건 무조건 검문하지 말고 통과시켜야겠는걸?

보안직원1이 닫아둔 정문 철창을 연다. 레오나르도가 철창을 지나, 백범연구소로 진입한다. 보안직원을 지나친 레오나르도가 멈추어 선다.

돌아선 레오나르도가 박수를 짝 친다.

레오나르도 : 맞다! 일 하나만 부탁드려요.

보안직원2 : 무엇이든 부탁하세요! 뭘 해드릴까요?

레오나르도 :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면서) 저기 두 건물 사이에 공터 있죠?

보안직원이 고개를 돌린다. 3층 건물과 2층 건물 사이의 공터. 달빛이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둥글게 내리쬔다. 레오나르도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레오나르도 : 저기서 공연할 거니까, 여기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아주세요.

보안직원2 : 네! 지금 바로 움직이죠!

보안직원1 : 레오나르도 다 서울의 공연! 이건 못 참지! 다들 신나서 나올 게 분명해!

보안직원 둘이 각자 3층 건물과 2층 건물로 달려간다. 레오나르도는 공터로 간다. 달빛의 중심에 서서 관객을 기다린다. 까딱이는 머리와 경쾌한 콧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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