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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불타오르듯 붉게 물든다. 노을이 지는 하늘, 안개가 석양의 주홍빛을 받아 물들었다. 안개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빨갛게 익었다.
허으억- 흐으윽-
이연우가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반나절 만에 늙어버린 듯, 핼쑥한 얼굴과 죽으려는 낯빛. 숨을 뱉을 때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밀어 넣고, 말을 꺼낸다.
“저희, 왜, 아직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유지유도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이 목이며 팔 따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끈적한 손바닥에 잡힌 핸드폰은 까맣게 죽었다.
“핸드폰 전원이 나갔어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요.”
“나도 곧 꺼질 듯.”
최재민은 교복 상의를 벗고, 하얀 티만 입었다. 교복을 주먹밥처럼 구겨 쥔 최재민이 반대쪽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배터리 잔량 3퍼센트.
절전에 들어가 어두운 화면, 언뜻 보이는 지도와 현재 위치. 그 위치는.
“여긴. 여긴.”
유지유가 다급하게 가방을 앞으로 멨다. 지퍼를 몇 번이고 헛손질한 끝에 꺼낸 것은 보고서. 몇 번이나 꺼내 쥐었는지, 손땀으로 젖고, 주름진 종이.
힘겹게 종이를 넘긴 유지유가 그대로 멈췄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린다.
“우리는 왜, 여기로…?”
“여기가, 어딘, 데요.”
“골짜기. 사람이 죽은 골짜기.”
“여기가? 여기가 그 골짜기라고? 누나, 놀리지 마.”
최재민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핸드폰 화면을 본 후, 주변을 향해 손을 뻗어 말했다.
“에이. 아니잖아. 깊게 들어오긴 했는데. 봐봐. 여기가 어떻게 골짜기야?”
비탈길은 보이지 않는다. 하얀 안개 때문에, 평범한 등산로 정도만이 보인다. 아무리 봐도 발 한 번 헛디딘다고 사람이 죽어 나갈 만큼 위험한 길이 아니다.
“잠깐만 기다려.”
유지유는 후우-, 호흡을 규칙적으로 반복했다. 눈을 감고,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기를 잠시. 눈을 뜬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잘 안 보이지만 근처에 비탈길이 있어. 나무뿌리라도 잘못 밟아 넘어지면, 안 돼. 알겠어? 조심하란 말이야.”
“진짜라고? 아니, 진짜.”
띠링띠리링-
그 순간 최재민의 핸드폰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꺼졌다. 최재민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딸깍딸깍, 전원버튼을 연타해도, 배터리가 다한 핸드폰은 켜지지 않는다.
“안 돼. 이게 없으면.”
“진정해. 그냥 발밑만 조심하면-”
유지유가 최재민에게 다가가 진정시키려는 때였다. 이연우가 툭 끼어들었다.
“아뇨. 발만 조심할 게, 아닙니다.”
유지유와 최재민이 이연우를 본다. 고개를 숙인 이연우는 핸드폰을, 메모를 보고 있었다.
- 12시 35분 : 기억상실 확인. 조심해서 내려갈 것.
- 12시 50분 : 길을 잘못 들었다. 내리막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지도의 현재위치를 유심히 보며 계속 방향을 확인할 것.
- 13시 30분 : 배터리가 충분할까. 다 떨어지면 어쩌지. 필기구는 없는데. 뭔가 기록할 것이 필요해. 나는 핸드폰을 최대한 아끼고.
- 14시 55분 : 기억상실 확인. 뒤늦게 시간이 뛰었음을 확인함. 그것도 모르고 걷다가 다른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로 빠짐. 지도는 멀쩡한데, 산길을 찾을 만큼 산에 익숙한 사람이 없다.
- 15시 20분 : 인기척이 느껴진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흔들리는 나뭇가지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과민한가?
- 16시 50분 : 분명하다. 무언가 있다. 고라니 같은 울음소리. 진짜 고라니일까?
- 18시 10분 : 안개 속의 그 그림자. 그것은 사냥하듯 우리를 몰아넣는다.
두 번의 기억상실이 있었다. 기억상실이 아닌 위험의 기록이 있었다.
“무언가가 우리를 이곳까지 유도했습니다. 앞서 죽은 사람들도 사고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건, 지금 우리 주변에 우리를 죽이려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씨발, 좆된 거잖아요!”
어느새 다가와 이연우의 좌우에서 메모를 본 둘이 발작하듯 사방을 경계했다. 안개를 지나,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위험레벨 2면 진짜 위험해. 사람을, 우릴 죽이는 것이 있다고.”
“아. 진짜. 오늘 오기 싫었는데.”
발을 떨고, 고개를 계속 돌린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들이 있는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사락- 딱- 스스슥-
낯선 산. 불길한 산. 안개가 자욱한 산.
수풀이 바람결에 몸을 비비는 소리가, 나뭇가지와 솔방울이 꺾여 떨어지는 소리가, 벌레나 개구리나 뱀 따위가 오가는 소리가, 평소에는 상쾌했던 산의 소리가.
섬뜩한 암시를 품고, 사람의 정신을 뒤흔든다. 평소 같은 사고가 불가능하다.
치명적인 죽음의 위기를 세 번 넘긴 이연우가 지친 몸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제 생각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셋 정도 있습니다.”
“뭔가요? 빨리 말해보세요.”
이연우는 말하기 전에 챙겨온 물병을 꺼내 입을 축이려다가, 물병을 집어던졌다. 언제 마셨는지 텅 빈 물병이 텅, 터텅,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그 소리는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하다.
비탈이 근처에 있었다.
이연우는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살길을 찾아 치열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첫째는 제가 119나 112에 전화하는 겁니다. 아직 20퍼센트 정도 배터리가 남아서 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와봤자 이상異常 때문에 기억을 잃고 길을 잃을 거예요.”
유지유가 안개 너머의 그림자를 계속해서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원으로서의 업무태도를 말했다.
“그리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민간인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행위는 인사평가에 악영향을-”
“생존이 우선 아닙니까. 안전제일. 선배님이 말하셨습니다.”
“…그건 맞지만, 부른다고 우리가 살아남지는 못해요.”
유지유가 말했고, 이연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전문가가 필요했다. 경찰관이나 소방관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연우는 다음 방법을 말했다.
“불을 지르는 건 어떻습니까? 안개든 괴물이든 산불 앞에서도 버틸 수 있을 같지는 않습니다.”
“맞아요! 아저씨, 제가 옛날에 학교에서 배웠는데! 뜨거운 건 위로 떠오른다던데요. 안개도 다 날아갈 게 분명해요!”
최재민이 어깨를 들썩이며,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터보 라이터다. 당장이라도 불을 붙이려는 듯, 나뭇가지를 찾아 움직이는 머리.
유지유가 그런 최재민의 뒤통수로 손을 휘둘렀다.
빡-!
“악! 왜! 불 지르면 괴물이고 뭐고 다 뒤질 거 아냐!”
“우리도 죽겠지! 길도 모르는데 산불을 피할 수 있겠어! 그리고 너는 왜 라이터를 가지고 있어! 학생인데 담배 펴?”
“아니, 그건.”
최재민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연우는 핸드폰을 켜서, 마지막 해결책을 꺼냈다.
“신고도 안 되고, 방화도 안 되면 하나밖에 안 남습니다.”
“뭔가요?”
“회사에 지원요청하죠. 위험레벨 2의 이상異常을 확인했다고.”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 위험을 보고하면 구조대든 특전대든, 진짜 전문가가 출동하지 않을까.
이연우가 희망을 담아 버튼을 꾹꾹 눌렀다. 최재민과 유지유도 희망을 품은 눈으로 이연우를, 핸드폰을 바라봤다.
이연우가 스피커폰을 켰다. 뚜렷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뚜르르르- 딸깍-
- 어, 신입아. 또 왜.
“반장님. 신입사원 이연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안개가 아닌 이상개체를 확인했고, 해당 개체의 위험레벨이 2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원요청을 원하는데-”
- …신입아. 그거 아까 말했잖아.
“예?”
이연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화면을 바꿔 확인했다. 보고도 무심코 지나친 통화기록.
[최근 통화]
- 반장님 (발신 통화 / 30분 전) : 2분 23초
또, 기억에 없는 통화.
사라진 기억 속에서, 이연우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했다.
“아.”
- …신입아, 이거 다 들리게 켜라.
“예, 예. 켰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이연우는 기계적으로 반장의 명령을 수행했다. 이미 스피커 폰을 켰다는 것도 잊고, 스피커 폰 버튼을 누르려다가, 가까스로 깨닫고 손가락을 구부려 마이크를 툭 친다.
반장이 말했다.
- 똑바로 들어. 한국지사에서 드론 날려서 안개 채집하고, 환경 파악했단다.
“그러면…?”
희미한 희망의 줄기를 붙잡고 말한다.
- 기억소거제 재료로 쓸 수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 이상異常 건들지 말라고 권고하더라. 씨부랄 놈들. 너희가 확인한 이상異常이 안개를 유발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보존해야 한다고 아주 지랄을 하는데.
“아.”
- 후우. 연구팀 편성하고 해수대응중대를 파견한다는데, 그건 나중 일이야. 당장 너희 도우러 갈 인력은 없어.
반장은, 인류보호회사는 위험에 빠진 조사원의 희망을 싹둑 잘랐다.
반장이 낮게 말했다.
- 조사원은 자기 목숨 자기가 챙겨야 해. 회사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해.
이연우는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자기가 살길은 자기가 개척해야 한다고.
“…예. 알겠습니다.”
이연우는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세 명의 시선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이연우가 말했다.
“구조는 없습니다. 저희끼리 뭐든 해야 합니다. 설령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도.”
최선이 불가능하면 차선을, 그마저도 안 된다면 차악을. 이상異常에 살해당하는 최악만 피할 수 있다면.
“그렇네요. 물불 가릴 때가 아니죠….”
한숨을 내쉰 유지유가 최재민에게 손을 까딱였다. 최재민이 움찔 물러섰다.
“뭐, 왜.”
“담배 내놔.”
“뭐, 뭐래, 나 담배 안 피워. 학생이야.”
“씁. 얼른.”
최재민이 마지못해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유지유는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는, 칙,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는 호흡. 담배연기가 안개 사이로 섞인다.
탁-!
담뱃불을 털어낸 유지유가 많이 남은 담배를, 이연우가 물병을 던진 자리로 집어 던졌다. 비탈길로 던져진 담뱃불.
“아무리 기억을 잃고, 괴물이 내몰아도 화재현장으로 가지는 않겠죠. 일단 이 골짜기부터 멀리 피하자고요.”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 그들은 산을 불태웠다. 바짝 마른 낙엽을, 나뭇가지를, 보고서를 장작 삼아.
진정으로 불타는 안개 속에서 괴성이 울린다.
- 끄에에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