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불타오른다. 붉게, 주홍빛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사방으로 불씨를 휘날리며.
흐으윽- 히이익-
이제 기억은 중요치 않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남았다. 불길을 피해 내달리는 짐승의 질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다. 뛰다 죽더라도, 달려야 한다.
“연우, 씨! 정신, 차려요!”
“흐으, 괜찮, 괜찮지, 않은데!”
진작에 지쳐 쓰러졌을 텐데, 이연우는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힘으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뜀걸음과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이연우의 뒤로, 최재민과 유지유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최재민이 뚝뚝 끊어지는 호흡으로 외쳤다.
“아저씨! 여기! 내려가는 길! 맞아요?!”
“몰, 라!”
“아니, 씹! 그러다가 이상한 길로! 가면 어쩌려고!”
“너, 또 욕하지!”
유지유가 손을 치켜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뒤통수를 때릴 여력도 없다. 다시 시선을 산길에 고정하며 달리는 데 집중했다.
그때였다.
“악!”
우당탕-
이연우가 돌부리에 걸리며 앞으로 세차게 넘어졌다. 허우적거리는 손이 가까스로 땅을 짚었지만, 그대로 힘이 빠져 무너진다. 쿵, 흙바닥에 내려 찍힌 얼굴.
“연우 씨!”
“아저씨!”
뒤따르던 두 명이 순식간에 이연우의 곁에서 멈췄다. 이연우는 다급하게 손으로 땅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파들거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경련하는 손을 애매하게 들어 올렸다.
“부축, 부축 좀.”
“어서 일어나세요!”
“아저씨, 빨리!”
양쪽에서 이연우의 팔을 잡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두 발로 선 이연우는 휘청이며 바로 발을 떼었다. 얼굴에 묻은 흙도, 입에 들어간 흙도 털어낼 시간이 없다.
- 끄에에엑!
끔찍한 외침이 뒤편에서 들려왔다.
“달려!”
“흐으억!”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봐봤자 소용이 없다. 발아래를 살피기도 힘들었다.
붉고, 하얗고, 까만 세상.
노을과 안개와 연기가 어지럽게 뒤섞인 시야는 모호하게 뭉개져,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메케한 연기 냄새. 강풍에 파도치는 나뭇잎의 소리, 불에 놀랐는지 쉴 새 없이 도망치는 산새와 산짐승의 소리가 사방에서 몰아친다.
투득- 타다닥-
그때 안개를 뚫고, 무언가가 그들 앞으로 툭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최재민이 냅다 주먹부터 들어 올릴 때였다.
“뭐야!”
“다람쥐야! 그냥 계속 달려!”
걸음이 느려진 최재민의 등을 밀며, 유지유가 재촉했다. 그 말대로 자그마한 다람쥐가 바쁘게 달렸다.
순식간에 다람쥐한테 추월당한 이연우는 어질어질한 머리로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들린 괴성은 두 번. 최소한 그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고, 두 번이면 비교하기에 충분했다.
“저거! 아까보다, 가까워진 거 같은데!”
“뭐요! 괴물이요?”
“어!”
순간 최재민과 유지유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숨을 헐떡이는 유지유가 발아래만 살피던 시선을 조금 들어, 전방의 안개를 노려봤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많이 내려온 거 같은데, 산 입구까지 얼마나 남았을까요?”
“모르지! 애초에 내려가는 길인지도 모르잖아!”
“…내려가도, 주차장이라고, 안전할까요?”
문득 이연우가 달음박질을 멈췄다. 최재민과 유지유도 따라서 멈추어 섰다. 이연우는 호흡을 고르며, 그들을 보았다.
“산불이 났는데도, 괴물은 우리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불을 지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안개를 흩어버리기 위해,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사람이 죽은 골짜기를 피하기 위해.
효과가 있는지 그럭저럭 기억은 멀쩡한 듯했고, 위험한 골짜기로부터 멀어졌지만. 괴물은 오직 그들만 쫓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아저씨, 그래서 뭐 어쩌자고요? 설마, 싸우자고요? 뭔지도 모르는 괴물이랑?”
최재민이 고개를 재빠르게 내저으며, 이연우를 제치고 나아갔다.
“괴물이랑 어떻게 싸워요!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요!”
“아니야. 해볼 만해. 왜냐면-”
그 순간.
- 끄에에에엑!
괴성이, 확연하게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이연우가 말했다.
“…못해도 해야 해. 얼마 안 가 따라잡혀. 아니, 지금 당장 싸울 준비해. 온다!”
그것은 소리로서 다가왔다.
딱- 따닥- 콱-!
나뭇가지를 연달아 부러뜨리며, 날카로운 무언가를 처박는 소리를 내며, 등산로가 아닌 비탈길에서. 흙바닥이 아닌 나무 위에서!
콰악! 콱! 뚜둑!
안개 너머,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는 높이에서, 카운트다운처럼 점점 커지는 소리.
“이, 씨발!”
최재민이 교복 상의를 주먹에 돌돌 감는다. 유지유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짤막한 나이프를 꺼낸다. 이연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두터운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이연우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이길 수 있어. 쫓아오는 속도를 보면 신체능력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아. 그리고 숫자. 우리는 세 명이고 저건 하나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번에도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 여기서 죽지 않아.’
나뭇가지를 꽉 말아쥔다. 거친 나무껍질과 잔가시 같은 것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쓰라린 고통이 번졌다. 고통과 탈진 때문에 줏대 없이 흔들리는 나무 몽둥이.
따닥-!
다음 순간, 소리가 멈췄다.
바람조차 멈춘 고요한 살길. 그 많던 산짐승과 산새는 어디로 갔는지 일대가 적막하다.
“….”
“허억, 흐윽.”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
그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바짝 긴장했다. 극도로 확장된 눈이, 마지막으로 소리가 들려온 지점을 노려봤다.
오른쪽, 나무 그림자 위의 어딘가.
교복을 두른 주먹을 바짝 들어 올리고, 나이프를 몇 번이고 고쳐 잡고, 나무 몽둥이를 야구 배트처럼 머리 뒤로 당긴다. 그렇게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지만.
이연우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목을 꺾어 올려본 머리 위 하늘.
“위! 떨어진다!”
탁한 안개를 뚫고, 사람 형상의 시꺼먼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셋의 가운데로-
***
***
“…아?”
고통이 머리를 저민다. 시야가 붉다. 이연우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닦았다. 피가 묻어나왔다. 머리에서 흐르는 듯했다. 아니, 머리만이 아니다.
나무 몽둥이는 어쨌는지, 텅 빈 두 손이 새빨갛다. 순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세상이 멀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연우는 멀어지는 의식을 어떻게든 붙잡았다.
“그러니까, 괴물하고 싸우려고 했는데, 이게, 기억이 지워진 건가? 그럼 어떻게 된….”
흐린 시야와 사고가 또렷해진다. 이연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유지유.
“…아, 뭐지? 끝난 건가?”
그녀도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앞으로 멘 가방이 찢겨 있고, 찢어진 트레이닝복과 아래의 피부에 붉은 혈선이 그어졌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그런 유지유의 앞에는, 이상한 것이 누워 있었다. 사람 형상이지만, 사람이 아닌 괴물.
살점이 묻은 날카로운 손톱, 목에 꽂혀 있는 나이프. 움직이지 않는다. 죽은 것이 분명하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긴장이 탁 풀어지며, 이연우는 아예 자리에 누웠다. 안개 낀 하늘이 어둡게 물들지만, 마음이 편하다.
“아, 살았다.”
“네, 저희가 이겼나 봐요.”
바스락거리며 일어난 유지유가 이연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연우의 팔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봤다.
“팔뚝에 살점이 뜯겨 나갔어요. 응급처치만 하고 내려가야 해요.”
“아.”
아픈 줄도 몰랐다. 그냥, 조금 어지럽고, 졸음이 쏟아질 뿐.
“그렇죠. 쉴 시간이 없죠. …이럴 줄 알았으면 불은 안 질렀을 텐데. 괜히 했네.”
“지나간 일은 넘어가자고요. 살았으면 된 거죠. 재민아! 너 그거 교복 줘봐! 붕대로 쓰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유지유가 눈을 깜빡였다.
“재민아? 뭐해?”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이연우가 머리만 돌려 최재민을 봤다.
최재민은 볼살을 푸들푸들 떨어대며, 이빨을 잘게 부딪쳐댔다. 어디 다친 곳도 없는 게 셋 중 제일 멀쩡한 행색이면서, 두려움에 벌벌 떨며 그것의 시체를 본다.
“재민아? 왜 그래?”
“누, 누나. 아저씨. 이거, 이거.”
“이거 뭐? 죽었잖아?”
“그게 아니라.”
머리를 돌린 최재민의 눈동자가 유지유와 이연우를 동시에 담았다. 하지만 공포에 질릴 대로 질린 눈은 둘이 아니라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거, 엄마랑 아빠가 둘 다 있는데, 지금 엄청, 엄청 화가 났다고-”
동시에, 산을 뒤흔드는 비명이 처절하게 터져 나온다.
- 끄아아아악!
- 끄에에에에에엑!
끝도 없이 메아리치는 비명이 둘.
‘이건 싸우면 죽는다. 잡혀도 죽는다. 아.’
이연우가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세상이 울렁울렁 파도쳤다. 그럼에도, 흙을 그러쥐고, 나무둥치를 끌어안아 가며 어떻게든 일어섰다. 하지만.
“아. 이거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피를 흘려서일까. 지금도 피가 멎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끝내 체력이 다해서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를 흔들고 있자니, 유지유가 다가와 최재민의 교복상의로 다친 팔을 꽉 묶었다.
“빨리! 빨리 가요!”
“아뇨, 아. 저 못 걸을 거 같은데.”
몇 번 걸음을 떼려고 해봤는데,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나무를 껴안고 있는데도 그랬다. 억지로 걸으려고 움직이다가는, 그대로 넘어져 비탈길로 굴러떨어질 듯한 느낌.
‘이러면 살 방법이….’
어떻게 생각해봐도 죽는 장면만 떠올랐다. 실족사, 출혈사, 이상異常의 손에 살해….
‘그건, 안 돼. 죽기는, 싫어.’
이연우가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디뎠으나, 그대로 발이 미끄러져 자빠졌다.
“연우 씨!”
“아….”
그렇게 눕고 나니, 더는 일어설 수가 없다. 눈꺼풀이 무겁게 닫히고, 졸음이 쏟아진다….
‘죽기 싫은데. 진짜, 이렇게.’
먹먹한 귀로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늦어. 등에 업는 건.”
“누나, 비켜봐. 내가 해볼게. …안 돼! 못 들어!”
이연우를 살려보려는 소리와 손길.
이연우가 힘겹게 눈을 떴다. 도망치지도, 이연우를 구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최재민과 유지유가 보인다.
그리고.
콰앙! 우지끈! 쾅!
점점 커지고, 선명해지는 소리가 그들이 지나온 길을 따라 가까워졌다. 나무를 후려치고, 나무가 꺾여 쓰러지고, 바위를 깨부수는 굉음.
그 괴물의 부모가 미친 듯이 질주하며,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전부 때려 부수는 모양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온다.
이연우는 흐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요.”
“같이 돌아가야-”
“불가능하잖아요. 그냥 가세요.”
살 수만 있다면, 염치 불구하고 민폐를 끼쳐서라도 들러붙었을 것이다. 목숨을 맞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둘을 죽여서라도 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굳이 여럿이 함께 죽을 이유가 없다.
“안전제일이라면서요. 가세요. 저거 금방 여기까지 올 텐데.”
“…미안해요.”
“아저씨.”
최재민과 유지유는 입술을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인영.
홀로 남은 이연우는 잠깐 하늘을 보다가, 다가오는 이상異常을 기다렸다.
“개 같은 새끼….”
요란하게 다가오기에 접근을 놓칠 수가 없다. 과연 그것들은 머지않아 다가왔다. 시꺼먼 그림자, 사람보다 크고, 나무보다는 작은 그림자가 둘.
“끄아아아악!”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괴물의 형상이 느릿하다. 죽음을 앞두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의외로 주마등은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연우는 멍하니 보기만 했고.
하늘에서 그물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