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인간
달빛이 밝게 비추는 밤.
녹슨 철사에 긁히지 않게 조심조심 구멍을 통과하고,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아이 거인이 곤히 자는 방을 지나, 이연우와 여자는 까마득한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거인이 오르내리는 계단.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달빛이 닿지 않는 아랫부분은 어둠에 잠겼다.
‘여기를 내려가야 하는데….’
계단 한 칸 한 칸의 높이가 1층 건물처럼 느껴졌다.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담벼락에 매달려 떨어져야 하는 상황.
못할 건 없지만, 오금이 저린다.
이연우가 계단 끝에 서서 망설이는 동안, 여자는 이연우의 옆에 서서 계단 너머를 노려보았다. 소곤소곤 숨죽인 여자의 목소리.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주방으로 갈 거야. 주방 물 나오는 곳에 창문이 있는데, 그 창문이 열려 있거든.”
“…계단, 안 다치고 내려갈 수 있겠어?”
이연우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가 픽 웃었다.
거인이 문을 열 때, 문 닫는 것을 잊었을 때, 아이 거인이 자기 방으로 데려갈 때, 수많은 날 동안 열심히 탈출 연습을 해왔다.
거인이 활발한 인간이라고 속 편하게 웃는 동안 흘린 땀이 얼마나 많았나.
“이미 몇 번 내려가 봤어. 그리고, 야. 이것도 못 하면 밖에 나갈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이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다. 고작 계단 하나 못 내려가는데 어떻게 길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자는 이연우의 등을 가볍게 친 후, 쭈그려 앉아 이연우를 올려보았다.
“잘 봐. 이렇게 내려가면 돼.”
몸을 돌려 두 손으로 계단 끝자락을 붙잡고, 두발로는 계단의 벽을 질질 끌며, 웅크렸던 팔다리를 천천히 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손을 놓고 폴짝 뛰어내린다.
계단 아래에서 여자가 이연우를 올려봤다.
“해봐.”
이연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여자의 행동을 따라 했다.
몸을 돌리고, 손으로 계단 끝을 짚고, 두발로 계단 벽을-
콩-!
팔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이연우의 몸이 그대로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어설프게 착지한 이연우가 신음을 삼키며, 발목을 붙잡았다.
“야, 괜찮아? 아니, 그러게 방에 있지 뭘 돕는다고 나와서….”
여자가 다가온다. 이연우는 발목을 돌려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잔뜩 찌푸렸지만, 발은 멀쩡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겹질리거나 관절이 상하지는 않았다.
“빨리 내려가자. 시간 버리지 말고.”
이연우는 먼저 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고통 속에서 나름의 요령을 얻어, 충격을 덜 받는 방법으로 추락했다. 그때마다 작게 울리는 소리.
여자는 스르륵 소리 없이 계단을 내려와, 이연우를 보았다. 조금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야, 너 너무 시끄러운데.”
이연우가 콩, 콩, 콩, 추락하는 소리는 작았지만, 모두가 잠든 심야의 계단에서 자그마한 인간이 듣기에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느껴진다.
“….”
탈출을 돕겠다고 나서놓고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 이연우는 이를 악물고, 어디선가 보았던 낙법을 흉내 내며 최대한 조용히 착지했다.
그럼에도 작은 소음이 계속되었지만, 다행히도 이연우와 여자가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거인 가족은 깨지 않았다.
***
소파가 놓여 있고 카펫이 깔린 거실.
푹신푹신한 카펫을 가로지르던 여자가 덜컥 멈췄다. 이연우는 잔뜩 지쳐 생각 없이 여자를 뒤쫓다가, 여자의 가방에 부딪쳤다. 이연우가 여자를 보았다.
“왜?”
“쉿. 조용히 해봐.”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쫑긋거린다. 다음 순간, 여자는 이연우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푹신한 카펫을 종종 내달리는 두 인간.
이연우가 입을 열어 뭐라 물어보려는 순간, 이연우의 입도 다물렸다.
쿵- 쿵-
끼익-
거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연우의 발걸음에도 힘이 들어가며, 두 인간은 순식간에 소파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숙이고, 숨소리도 안 나게 입과 코를 틀어막는다.
이연우와 여자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왜 이 시간에 내려오는 거지? 도망치는 걸 눈치챘나?’
이연우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깼을까? 밤중에 깬 김에 인간이 잘 자나 보러 왔다가, 인간이 철망을 뚫고 나간 것을 눈치챘을까?
두 인간은 소파 아래에서 좁은 틈새로 계단을 보았고, 아들 거인이 졸린 눈을 비비며 흔들흔들 걸어오는 것 또한 보았다.
“목말라….”
부엉이가 그려진 유리컵을 양손으로 꼭 쥐고 주방으로 걷는다. 두 인간도 아들 거인을 쫓아 더 잘 보이는 소파 뒤쪽으로 움직였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이 보인다.
오븐과 가스레인지, 그릇을 올려두는 선반, 싱크대가 놓여 있는 주방. 그리고 싱크대 옆으로 열려 있는 창문.
다행히 탈출을 눈치챈 것은 아니다.
후우-
이연우와 여자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컵에 물을 받아 마신 아들 거인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까치발을 들어 창문에 한 손을 올렸다. 거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참. 창문 닫아두라니까. 벌레라도 들어와서 우리 잉잉이들 물리면 어떡해.”
드르륵-
아이가 낑낑거리며 창문을 닫는다. 꽉 닫힌 창문. 아들 거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잠금쇠까지 확실하게 올렸다. 그리고는 착한 일을 했다며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쿵- 쿵- 쿵—
아들 거인이 계단을 올라간다. 기척이 사라졌음에도 여자와 이연우는 움직이지 못했다.
탈출구가 닫혔다.
소파 아래에서 멍하니 닫힌 창문을 보기를 잠시. 여자가 애써 기운차게 말했다.
“오늘은 망했네. 다음에 하자!”
“다음 언제?”
“내일도 좋고. 내일모레도 좋고. 저 창문 말고 다른 방법도 생각하고.”
여자가 고개를 숙여 그림자로 표정을 감췄다. 가방을 고쳐 매며 몸을 돌린다.
이연우는 그녀를 보다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손을 당겼다. 여자가 고개만 돌렸다.
“…왜?”
“오늘 가야지.”
이연우가 생각하기에 오늘이 아니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철망이 뚫린 것을 알아채고 더 튼튼한 문으로 바꿀 수 있다. 주방 창문에 꽂힌 아들 거인이 매일같이 창문을 닫을 수도 있다. 새끼를 낳으라며 좁은 상자에 둘을 가둘 수도 있다.
이연우가 여자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여자는 반문했다.
“어떻게 나가라고? 창문 열겠다는 건 아니지? 잠겼기도 하고, 안 잠겼어도 저거 엄청 무거워.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안 해.”
“방법이 있어.”
주사위를 열심히 굴리면 유리창은 깰 수 있겠지. 대실패만 안 나오면 문제없고, 대실패는 쉽게 안 나올 것이다.
이연우가 성큼 걸었다.
***
싱크대 옆으로 길쭉한 나무 화분이 있었기에, 나무줄기를 기어오르고 잎사귀에서 멀리 뛰어 도착한 싱크대.
이연우와 여자는 나이프를 공성추처럼 좌우에서 들고는 닫힌 창문을 노려봤다. 문득 여자가 말했다.
“이게 될까?”
인간의 힘은 약하다. 체급이 햄스터다. 유리창을 밀어 열지도 못하고, 유리를 깨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여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지만, 이연우는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연수 첫날,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실험실. 소방관 출신 신입사원이 유리창을 어떻게 깼던가.
‘뾰족한 철제도구로, 유리창 모서리를 쳤지.’
전문가의 손길을 떠올린 후, 눈을 뜬다.
“하나, 둘, 셋 하면. 알지?”
“안 될 거 같은데…. 일단 알았어.”
“하나, 둘, 셋.”
우다다 달려 온몸의 무게를 실어 유리창을 치는 순간. 이연우는 주사위를 불렀다.
‘깨져라!’
데구르르-
꽝!
끼익-
나이프가 유리창에 흠집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는 둘.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봐. 안 돼.”
“다시, 하나, 둘, 셋.”
여자가 마지못해 따라서 나이프를 내지르고, 주사위가 굴렀다. 결과는 같았다.
꽝!
끼익-
흠집이 조금 깊어졌나. 자세히 보아도 잘 모르겠는 유리창. 이연우는 이를 갈았다.
‘주사위 새끼야.’
지구 귀환은 하루에 한 번이면서, 핸드폰을 찾거나 유리창을 깨는 일은 여러 번 돌아가는 건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다. 규모가 다르지 않나. 드는 힘이 다르겠지. 어쩌면 사소한 일도 무한히 시도하지는 못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상황 자체가 참을 수 없이 짜증 났다.
‘검사 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어. 그냥 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돌아갔잖아. 그래서 이딴 세상에 던졌잖아.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딴 것도 성공을 못 해?’
이상異常이고 주사위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도 의미 없음을 안다. 거기에 기껏해야 두 번 돌렸다. 꽝 두 번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갈 곳 없는 울분이 치솟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연우가 나이프를 옆구리에 꽉 끼었다. 랜스 차징을 하는 기사처럼.
“다시. 하나, 둘-”
“야. 그만하자. 어차피 안 될 거 힘 빼서 뭐 해. 저기 카펫에서 잠이나 자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돌, 아니, 시도해.”
“…마지막이야.”
이연우의 오른쪽 대각선 뒤에 선 여자가 이연우처럼 나이프를 옆구리에 꼈다. 둘은 최대한 뒤로 빠져서 나이프를 수평으로 내세웠다.
“하나, 둘, 셋.”
발걸음까지 함께하여 둘이 뛰는데 한 사람의 발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나이프의 끝이 유리창과 충돌하는 순간.
데구르르-
성공!
돌연 불어온 강풍에 창문이 덜컥 흔들리며 스스로 나이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이프의 끝이 유리창을 찍고, 바람이 몰아쳐 창틀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
“….”
“….”
뻥 뚫린 유리창.
나이프로 깼다기보다는 바람 때문에 깨진 유리창을, 두 명은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연우가 여자의 등을 툭 쳤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거인 가족이 깰 것이다.
“가.”
“어? 아. 어. 아니, 이렇게 깨진다고?’
여자는 허리에 둘둘 만 끈을 풀고, 끈 끝에 달린 갈고리를 창틀에 건 뒤, 유리가루가 묻은 창틀을 넘었다
창틀 뒤에서 여자가 머리만 삐죽 올렸다. 달빛이 비친다.
“야. 너 진짜 탈출 안 해?”
“안 해. 체력 봤잖아. 나갔다가는 죽어.”
이연우는 스스로가 어이없어 웃었다.
집 안에서 이동하기도 힘들었다. 저 야생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불확실한 도전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여자가 말했다.
“그건 내가 도우면 되지. 내가 길에서 오래 살았어. 너 정도는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
“됐고. 그 도시 도착하면 일 하나만 해줘.”
“…어떤 일?”
이연우는 하나의 단어를 말했다.
“인류보호회사. 이 회사 사람 있는지 알아봐 줘. 그리고 회사 사람이 있으면.”
인간을 파는 가게에서 봤던 제임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말도.
“조사원 제임스 콩이 보고함. 이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다. 조사원 이연우가 요청함. 구조 바람. 이렇게 전해줘.”
여자는 그 말을 작게 되뇐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기억했어. 그런데 그게 네 이름이야? 제임스? 이연우?”
“이연우.”
쿵- 쿵-
거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창틀 너머로 사라졌고, 기대와 열망과 자유 따위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은 단델리온이야! 할아범이 무슨 꽃 이름이라고 했는데-”
“빨리 가기나 해. 저 새끼들 온다.”
“나중에, 도시에 도착하면 꼭 데리러 올게!”
그렇게 단델리온은 달빛이 내리쬐는 창 너머로 갔다. 이연우는 집에 남아 깨진 창문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나쁘지 않아.’
어차피 자신은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몸이다. 거인 가족의 손에 해를 당할 일은 없다.
느긋하게 매일 주사위를 돌리며 대성공을 기다리면 된다. 어쩌면 성공만 떠도 돌아갈 수도 있고.
그리고, 단델리온.
단델리온이 진짜로 인간의 도시에 도착하고, 그 도시에 인류보호회사가 있으면, 구조하러 올 수도 있다.
쿵-
“누구야! 나와!”
아빠 거인이 몽둥이를 들고 내려왔다. 그 뒤로 계단에는 아들 거인이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이연우는 생각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단델리온을 도와 그녀를 탈출시켰기 때문일까. 주사위가 타이밍 좋게 성공을 띄웠기 때문일까. 조금은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