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시간이 지난다.
바람에 깨진 유리창은 새로운 창문으로 바뀌었고, 철망의 구멍 앞뒤로는 철망 조각과 천 자락이 덧대어졌다. 아이들은 노랑이의 빈자리에 슬퍼하여, 부모 거인은 좀처럼 새로운 여자 인간을 사지 못하였다.
이연우는 때때로 창가를 보며 단델리온을 떠올리기도 했고, 그녀가 회사원과 함께 창틀을 넘어오는 광경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 오면 방에 홀로 남아 집으로의 귀환을 기도했다.
달이 뜨고 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
이연우는 창문을 통과하여 네모나게 비치는 달빛 아래에서 짐을 정리했다.
거인이 입혀주는 인형 옷이 아니라, 자신이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고, 전원이 나가버린 핸드폰과 홀쭉한 지갑과 인간자격증을 주머니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끌어안았다. 철망을 끊는 데 사용한, 거인 세계에 방문했다는 증거.
밤마다 반복했던 일과. 이연우가 기대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사위….”
꽝과 실패만 계속 나오는 주사위. 실패를 반복한 이연우는 가끔씩 단델리온을 따라 나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였다.
험난한 길거리겠지만, 단델리온의 경험과 자신의 생존능력이 더해진다면 의외로 살만하지 않았을까. 또 의외로 보람차고 재밌지 않았을까. 거인의 집에서 사육되는 삶보다는….
언제나 그렇듯 우울하게 가라앉는 생각을, 이연우는 고개를 저어 뿌리쳤다.
“집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주사위의 결과에 일희일비하기에는 제법 많이 굴렸다. 이제는 아무 생각도 기대도 없다. 그저 일과를 끝마치는 습관이다.
데구르르-
주사위가 굴렀다.
그리고, 멈췄다.
대성공!
잠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연우가 멍하니 있다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
인간을 키우는 방에서, 이연우가 이사한 복층 원룸의 방으로.
그가 거인의 세상에서 떨어졌을 때와 같이,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
“….”
이연우는 천천히 원룸을 둘러보았다. 하룻밤도 잔 적 없는 새집이 낯설다. 먼지가 쌓였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였다. 발자국이나, 짐이 풀어져 있거나.
무엇보다 거리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배에서 내리면 육지가 울렁거리듯, 거대한 세상을 보던 감각이 후유증처럼 남았다.
이연우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 방충망까지 전부 열고는, 부산스러운 대낮의 도시를 보았다.
“돌아왔네….”
분주히 도로를 달리는 차량과, 빽빽한 콘크리트 건물과, 자그맣게 보이는 사람의 무리.
이연우의 입에서 흐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웃음이 뚝 멈췄다.
‘주사위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
대성공이나 대실패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직접 겪지 않았나. 위험이 너무 크다.
주사위의 소유를 포기하기 위한 판정을 굴리든, 회사에 요청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든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아.’
이연우는 차 키를 찾아 챙기며, 머릿속으로 할 일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거인의 세상에서 귀환만을 바라며 준비한 리스트.
‘회사에서 의심하지 않게 바로 조사반으로 가서 보고하기. 제임스의 말 전해주기. 거대한 세상과 인간의 도시에 관해 물어보기. 그리고, 핸드폰 충전하고, 카페 가고, 햄버거도 먹고-’
이연우는 쉬지도 않고 바로 현관문을 나서면서, 경쾌하게 뛰었다.
***
벌컥-!
이상조사반의 문을 활짝 연다. 이연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발을 들였고, 반장과 유지유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 침묵.
이연우가 어색하게 인사하려는 때였다.
벌떡-!
“너, 너! 뭐야! 왜 왔어!”
반장이 컴퓨터 모니터를 번쩍 치켜들어 당장이라도 던질 자세를 취했다. 유지유도 슬그머니 일어나, 의자를 무기처럼 쥐었다.
이연우는 거인의 열쇠를 안은 채로 손바닥만 위로 올리는 시늉을 했다.
“반장님, 유지유 선배님. 제가 이상한 세상에 떨어졌었는데,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한 달은 넘었는데….”
반장은 이연우의 얼굴과 거대한 열쇠를 번갈아보다가, 천천히 모니터를 내려놓았다. 이연우도 가까운 데스크에 거인의 열쇠를 내려두고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말해도 괜찮을까요?”
“…해봐. 문은 닫고.”
이연우가 발로 문을 천천히 밀어 닫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반장과 유지유의 경계 속에서, 이연우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주사위를 얻은 날부터 귀환한 오늘까지.
“…그래서 오늘 돌아왔습니다.”
“있을 법한 일이긴 한데.”
반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의심이야 있지만, 정확한 사정은 정보부가 파악할 일이다.
타닥타닥-
반장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겼다. 이연우의 귀환을 신고하고, 이연우의 실종과 관련한 문서를 다시 확인했다.
검사과의 직원 앞에서 사라진 이연우를 수배자로 올리냐, 이상異常으로 올리냐, 등록하면 적대등급은 어떻게 하냐, 검토하고 토의하는 중이라는 문서.
반장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연우가 정식으로 복귀하려면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다.
반장이 말했다.
“신입아. 일단 너 조사는 받아야겠다. 그리고 그 주사위랑 거인? 그쪽 세상에서 겪은 거 다 보고서로 자세히 쓰고.”
“알겠습니다.”
이연우는 순순히 자기 자리로 가서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먼지가 쌓인 책상을 정리했다.
유지유는 조금 떨어져서 의심하는 눈으로 이연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연우 씨. 정말 이상異常 아니죠? 테러리스트나 스파이도 아니고요?”
“정말 아닙니다.”
컴퓨터가 켜졌다.
이연우는 거짓 없이 그가 겪은 일들을 쓰기 시작했고, 조사원 제임스 콩의 전언을 적은 뒤, 마지막으로 거대한 세상에 있다는 인간의 도시로 보고를 마무리했다.
오류부터 시작하여 그가 오늘까지 겪은 일이 담담하게 나열된 보고서.
“….”
이연우는 새삼 감상에 젖어, 빽빽한 문자들을 보았다.
‘진짜 잘 살아남았다.’
그걸 클릭하여 업로드한다. 이연우는 반장을 향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반장님. 보고서 올렸습니다.”
“그래? 그러면 정보부에서 답 올 때까지는 대기하자.”
이연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답은 일주일이 지난 후에 왔다.
산자락에 위치한 안가로 와서 정보부의 조사를 받으라고.
***
산자락의 갓길에 낡은 경차가 멈춰 선다. 시동이 꺼진 경차에서 이연우가 내렸다. 이연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산을 올려보았다.
안개 괴물을 보았던 괴백산은 아니지만, 어쨌든 산이라 느낌이 좋지가 않다. 조사를 받으러 온 몸이라 그런지 더.
“별일 없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정보부의 조사라는 이름이 무겁게 다가왔지만, 이연우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날 수배자 취급했으면 이렇게 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체포팀이라도 보내서 끌고 갔겠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오르기를 잠시. 나무가 우거진 산골 사이로 폐가가 하나 보였다. 정보부에서 오라고 한 안가였다.
이연우가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안가로 접근했다.
폐가에 가까운 안가. 깨진 창문과 잡초가 잔뜩 있고, 창 너머로 보이는 집 내부도 엉망이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쿵-! 쿵-!
이연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벌레나 쥐 따위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기척을 빼면 딱히 인기척이 없다.
이연우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쾅-! 쾅-!
“계십니까! 오늘 오라고 한 사람인데요!”
뒤늦게 집 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지런히 걸어오는 발소리. 폐가의 잔해를 짓밟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이연우는 깨진 창문으로 남자와 여자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유리 파편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그들이 웃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아래에서는 소리가 잘 안 들려서. 이연우 씨 맞죠?”
“예, 맞습니다. 오늘 조사 받으러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죠.”
안경 쓴 남자가 문을 열고는 집 안을 향해 손을 뻗어 이연우를 반겼다. 이연우는 집 안으로 들어가며, 선한 미소를 짓는 남자와 탐탁지 않은 표정의 여자를 보았다.
그들을 지나쳐 집 내부로 들어왔다.
이연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가라고 보기에는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다. 퀘퀘한 냄새와 벌레와 쥐 따위의 시체, 곰팡이와 습기.
남자가 웃으며 이연우를 어느 방으로 안내했고, 여자는 이연우의 뒤를 쫓는다.
“엉망이죠? 원래 여기가 버려진 안가였는데,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돈 들여서 새단장하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네요.”
“그렇군요.”
이연우는 조사원답게 주변 환경을 파악하느라, 남자의 말을 흘려들었다.
밀폐된 방.
그나마 깨끗하지만, 어둑한 조명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때문에 분위기가 음산하다.
남자가 선뜻 앞서 걷고 여자가 뒤에서 분위기로 강요하였기에, 이연우는 지하로 내려갔다. 이제 와서 도망치기도 늦었고.
타박- 타박-
헐벗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가기를 잠시.
그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백열등이 천장 중앙에서 늘어져 있고, 그 아래로 테이블과 네 개의 의자가 있다. 벽면에는 녹슨 캐비닛과 구형 모니터 따위가 나열되어 있었고, 계단 반대쪽에 유치장이 있었다.
“….”
꿀꺽-
이연우가 침을 삼켰다. 유치장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
그의 입사동기, 이서연. 닌자의 칼질에 한쪽 다리가 잘리고 정보부로 간 그녀가, 유치장에 누워 있다. 유치장에 고정된 시선.
안경 쓴 남자는 쾌활하게 웃었다.
“아, 저 사람들. 그 뭐야, 테러리스트예요. 정보부에서도 우리 과가 하는 일이 이런 사람 심문하고 수사하고 그런 거라.”
“…그렇습니까?”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른다. 지하의 서늘한 한기가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테러리스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적대집단에서 스파이로 투입되었다면 조금은 속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탈취자나 운전자 같이 테러를 일삼는 수배자라니.
이연우가 최대한 침착하게, 동요를 내색하지 않는 모습으로 남자를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와 목소리.
하지만 여자가 계단을 막으며 말한다.
“걸렸어, 멍청아. 애초에 입사동기인데 속겠냐. 그것도 조사원이?”
“아. 그런가? 그래도 뭐.”
남자가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꺼냈다.
철컥-
사제권총이 백열등 아래에서 거무튀튀한 빛을 자랑하며 이연우를 겨눴다.
“이연우 씨? 거기 앉아서 대화나 합시다. 당신한테도 유익할걸?”
이연우는 가장 깨끗한 의자를 찾아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