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이연우 씨, 일어나세요.”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며 이연우가 일어났다. 이연우는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야.’
거짓말이 들통났다. 금괴로 조종까지 당하는 상황, 좋게 넘어가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이연우는 최후의 수단부터 불렀다.
‘주사위.’
짧은 순간 가속하는 사고. 주사위에게 빠르게 의지를 전했다.
‘금괴인지 뭔지 저항하고, 저놈들 사고 일으켜, 총기도 고장 내고, 철창에 친구들 깨우고, 철창도 열고-’
이상異常에 저항하고, 부조리의 악마를 흉내 내고, 아무튼 온갖 수단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데구르르-
주사위가 신난 듯이 펄쩍 뛰어올랐다. 춤추듯이 구르기를 잠시. 첫 번째 판정, 금괴에 저항하기의 결과가 나왔다.
꽝!
그리고, 두 번째로 구르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연우 씨, 멈추세요. 굴렸으면 중단하고, 앞으로도 굴리지 마세요.”
“예.”
주사위가 시무룩하게 멈췄다. 금괴에 강제되어, 이연우가 굴리기를 취소했다. 판정은 못 뒤집어도 결과가 나오기 전에 취소는 되었다.
새로운 사용법을 알았음에도, 이연우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철제 책상을 스쳤다. 이연우가 직접 주사위를 보고한 문서.
남자는 이연우의 표정과 보고서를 번갈아 본 뒤,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이연우 씨, 방금 주사위 굴렸습니까?”
“예.”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이연우 역시 침착한 눈으로 남자의 시선을 받아쳤다. 당황할 필요 없다.
‘주사위에 집착하지 마.’
주사위는 비장의 카드일 뿐. 주사위는 도구지, 이연우가 아니다. 시험부터 오류까지 오직 몸 하나만 가지고 살아남았다.
냉정하게 가라앉는 정신과 칼날처럼 벼려지는 본능.
남자는 날 선 표정의 이연우를 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뭘 굴렸습니까? 결과는 어땠고요?”
“금괴에 저항하기. 실패했습니다.”
이연우는 질문을 왜곡하여 해석해서, 진실을 감췄다. 사고 같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결국 다른 것들은 구르기 전에 저지당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금괴를 과신한 남자는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저항? 어설프네요. 신입답다고 해야 하나. 하긴, 그 주사위로 로또나 주식도 안 했죠. 참 순수해서 보기 좋아요.”
이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고,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하면 좋았을 텐데.”
남자가 총을 챙겨 정장 안주머니에 넣고, 여자가 슬슬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내가 뭐랬어. 설득 못할 거라고 했잖아.”
“이제 회사원도 아닌데, 사람이라도 포섭해서 가면 좋잖아.”
“실패했잖아, 멍청아.”
“그럼 사람은 포기하고, 다른 거라도 가져가는 거지.”
남자는 두 손을 넓게 펼친 뒤, 흩어진 서류를 대충대충 하나로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순서나 분류 따위 상관없이 뭉친 서류 묶음이 서류 가방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총을 품에 숨기고, 녹슨 캐비닛을 순서대로 열기를 반복했다. 고막을 긁는 마찰음이 이어지기를 잠시, 그녀가 혀를 찼다.
“여기는 언제 버려진 거야. 챙길 게 없네.”
“그래도 수확이 제법 커.”
남자가 책상 밑으로 들어간 의자를 드르륵 당겼다. 그곳에는 유치장의 열쇠와, 정보부 요원의 신분증과 보안 카드, 노트북, 자그마한 기계장치, 그리고 외장 하드가 쌓여 있다.
남자는 그 중 유치장 열쇠를 들어, 이연우에게 가볍게 던졌다.
“받으세요.”
이연우가 손을 뻗었으나, 열쇠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연우가 몸을 숙여 열쇠를 줍는 동안, 도망칠 준비는 마친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서서 이연우를 보았다. 가장 큰 수확이 그곳에 있다.
기대와 욕망을 품은 눈이 반짝인다.
남자가 말했다.
“이연우 씨. 그 주사위. 우리한테 넘길 방법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정말요? 최선을 다해 생각해보세요. 못 떠올리면 당신 죽으니까.”
남자가 사제 권총이 들어가 불룩 솟은 가슴팍을 툭툭 친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라고 굳이 죽일 생각은 없어. 그런 짓하면 적대등급 올라가니까. 그런데 네가 협조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 왜? 정신에 기생한 이상개체는 보통 숙주가 죽으면 실물을 드러내니까.”
“이연우 씨, 이해해주세요. 회사에서 도망치는데 주사위 정도는 가져가야지 않겠습니까.”
주사위에는 적대등급 상향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연우는 시선을 내리깔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주사위 굴려보면 될 듯합니다.”
“아하. 소유권 이전 같은 걸로? 하세요. 딴 걸로 굴리지는 말고.”
남자의 명령에 따라, 이연우가 주사위를 굴린다. 데구르르, 회전하는 주사위. 이연우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주사위를 보았다.
‘뭐가 나와도 괜찮아.”
주사위가 멈췄다.
꽝!
“꽝입니다.”
“다시 굴리세요.”
데구르르-
꽝!
“꽝.”
“다시.”
데구르르-
실패!
“실패입니다.”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말했다.
“…거짓말 아니죠?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결과 속였습니까?”
“아뇨.”
이연우는 떳떳하게 가슴을 폈고, 마른 입술을 핥은 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러다가 대실패라도 나오면 저 죽여도 못 가져갈 겁니다.”
“…그럼 지금 죽이고 가져가야겠네요.”
“그것도 힘들 겁니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인다. 이연우는 주사위를 얻었을 당시를 말했다.
“대성공이 나오고 기생 당했습니다. 대성공 전까지는 못 가져갈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대실패가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요.”
이연우가 서류 가방을 힐긋 보았다. 남자는 이연우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위상학적 차원이동까지 일으켰던 주사위를.
그리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을.
남자와 여자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여자가 몸을 돌렸다.
“포기하자. 시간 없어.”
“슬슬 이상한 걸 알아차릴 때가 되긴 했지.”
남자는 의자에 놓인 자그마한 기계장치를 보았다. 정보부 요원의 위치를 파악하고, 일정주기로 통신하는 기기가 붉게 깜빡였다.
그 옆에 놓인 외장하드를 서류 가방에 넣은 남자가, 서류 가방을 여자에게 휙 던졌다.
“이거라도 챙기고, 차 시동 걸고 있어.”
“넌 뭐하게.”
“글쎄. 화풀이?”
“멍청아, 시간 없다니까.”
“장난이고, 대충이라도 현장 조작해두게.”
“빨리와. 늦으면 알지?”
여자가 마지못해 계단을 오른다.
이연우는 긴장을 놓지 못하고 그들을 보다가,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가 이연우의 손을, 그 손에 잡힌 유치장의 열쇠를 가리켰다.
“이연우 씨. 유치장 문 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죽이세요.”
남자가 빙그레 웃는다.
“조사를 받다가 발각되어서 정보부 요원을 죽인 이상개체 느낌으로.”
***
식은땀이 뚝뚝 흐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며 유치장으로 다가간다. 낡고 녹슨 지하실에서도 여전히 튼튼한 쇠창살이 가까워진다.
이연우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아니, 선배님. 꼭 이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뭐, 고마워하셔도 됩니다.”
“예? 아니, 뭘-”
“살인도 경험 아니겠어요?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뭔 개 같은 소리를!”
철컥- 철컥-
벌벌 떨리는 손이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잠금쇠에 열쇠를 꽂아, 빙글 돌렸다. 뻑뻑한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유치장이 열렸다.
죽은 듯이 자는 두 명의 남녀.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입니다, 농담. 큰 효과는 없겠지만, 당신이 누명 쓰면 그만큼 회사의 인력이 분산되지 않겠어요? 우리 쫓는 것도 늦어지고.”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이연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소리를 질렀다. 피라도 토할 것처럼 악을 써, 잠자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
이연우의 눈이 간절함을 품고 두 명의 남녀에게 향했다.
정장을 빼입은 정보부 요원.
가까운 거리의 남자 요원은 대자로 누워 자고 있고, 조금 먼 거리의 이서연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아기처럼 색색 숨 쉬고-. 이연우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서연? 다리 잘렸을 텐데?’
분명히 절단된 다리가 멀쩡하게 있다. 정장 바지와 양말과 구두에 가려서 피부가 보이지 않아, 의족인지 뭔지 모르겠다.
이연우는 의문을 품을 시간도 없었다. 이 순간에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몸은 움직였다.
이연우가 할 수 있는 건, 죽이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뿐.
‘패 죽인다. 죽어라 패면 일어나겠지. 일어나야 해.’
정보부 남자 요원의 위에 올라타 두 주먹을 번쩍 치켜들고, 내리쳤다. 번갈아 가면서 연타하는 주먹.
그리고, 남자 요원과 눈을 마주쳤다.
“….”
잠자는 사람처럼 호흡을 유지하며, 아주 가늘게 뜬 눈. 잠에 취한 눈에 초점이 잡히며,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요원이 와락 일어서며 이연우를 밀쳐냈다. 종이인형처럼 밀려나, 창살에 머리를 박는다.
“윽!”
찰나의 빈틈.
남자 요원은 이서연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다리를 뽑았다. 양말을 신고 구두를 신은 의족이 쑥 뽑혀 나온다.
의족을 치켜든 요원이 외쳤다.
“꼼짝마! 움직이면 터트린다!”
이연우가 당황한 눈으로 보며, 여전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어설 때였다. 남자가 벼락 같이 외쳤다.
“멈춰!”
이연우가 일어서던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멈췄다. 언뜻 남자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의족에 폭탄을 박아?”
“내 몸에도 폭탄이 심어져 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둘 다 터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