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42)화 (42/194)

시간

꾹-

PPT가 넘어가며, 연구원의 증명사진과 간단한 이력이 나온다.

“저는 시계초침제작소의 연구원 김각정입니다. 오늘은 이상시간학을 가볍게 소개하는 강연을 진행하겠습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았다. 강의에 관심을 가진 회사원들은 연구원과 PPT를 보았고, 출장을 핑계로 쉬러 나온 사람들은 계속 핸드폰을 보았다.

연구원은 반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리모컨을 꾹 누르며, 강의를 진행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물리법칙의 시간이 아닌, 이상한 세상의 이상한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을 조작하는 이상異常은 어떻게, 어떤 원리로, 우주가 허락하지 않는, 불가능한 일을 일으키는가.”

꾹-

PPT가 넘어갔다.

PPT에는 만화풍으로 그려진 아이작 뉴턴의 일화가 있었다. 사과나무 아래, 떨어지는 사과에 머리를 맞는 아이작 뉴턴.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하죠. 우리는 사과에서 하나의 법칙을 더 파고들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닌, 과거에서 미래로 떨어지는 사과. 바로 시간.”

핸드폰을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끄고 스크린을 본다.

꾹-

PPT가 다시 넘어갔다. 고전만화풍의 캐릭터가 옆으로 걷고, 앞으로 달리고, 위로 점프하는 슬라이드가 나왔다.

“시간은 좌표입니다. XYZ 좌표와 같은. 왼쪽에서 오른쪽, 뒤에서 앞, 아래에서 위,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

이연우는 좀처럼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드는 것을 보았다.

“질문 있습니다.”

중년의 교수. 연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하시죠.”

“시간이 좌표라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재에서 과거로도?”

“예. 시간 분야 이상異常이 그렇고, 회사의 시간 관련 부서가 연구해서 결실을 맺었죠.”

“그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관련 학문을 공부한 사람일까. 질문자가 크게 당황하여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연구원은 제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우로, 앞뒤로 움직이는 연구원.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돌연 폴짝 뛴 연구원은 금방 무대로 떨어졌다. 콩, 발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위아래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력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에요. 하지만, 우리는 중력을 이겨낼 수 있지요.”

꾹, PPT가 넘어갔다.

미사일부터 인공위성, 우주선, 비행기, 점프 팩 같은 것의 사진이 나왔다. 모두 중력을 이겨내는 장치다. 대지를 박차 하늘로 향하는.

고개만 돌려 PPT를 보던 연구원이 다시 무대 아래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미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미래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력 같은 무언가가. 어쩌면…. 아니, 아닙니다. 너무 깊은 이야기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연구원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넘어간 슬라이드에는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슬라이드를 좌우로 나눈 사진.

왼쪽은 흑백사진으로 콘크리트 건물의 한 방인데, 텅 비어 있다.

오른쪽은 고화질 컬러 사진으로, 실험실의 난잡한 방이다. 방 중심에는 A4 용지가 있다.

“엔진의 힘을 빌려 중력을 이겨내듯, 우리는 강력한 타임 엔진의 힘으로 시간의 중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이 그 예시입니다.”

꾹-

누름과 동시에 두 장의 사진이 동영상이 되어 재생되었다.

우우우웅-

오른쪽의 고화질 동영상. A4 용지가 푸른 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지고, 왼쪽의 흑백 동영상에서 하얀 광채에 휩싸인 A4용지가 나타났다.

미래에서 과거로 문서를 보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제한적인 수단으로 시간 좌표를 제한적으로오오오오-”

갑작스럽게, 연구원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늘어지다가 멈춘다.

아니, 연구원만이 아니다. 강당의 소리가 뚝 끊겼다. 모든 사람이 멈췄다. 강의를 경청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던 자세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던 자세로.

깜빡이던 눈꺼풀이, 핸드폰을 누르기 위해 나아가던 손가락이, 말하기 위해 벌린 입이 석상처럼 멈췄다. 기계나 물건, 벌레조차 그러하다.

정적. 숨소리조차 존재하지 않는 지하강당.

시간이 멈췄다.

**

이연우도 예외는 아니다.

찾아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찾아, 강당을 두리번거리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심장 박동조차 들리지 않아, 박제된 인간처럼.

그리고, 주사위가 굴렀다.

데구르르-

꽝!

변함이 없다. 정지된 시간 속에 박제된 이연우는 석상이었고, 지하강당은 여전히 고요하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죽어버린 세상.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도 주사위의 시간만이 홀로 흘렀고, 대기시간이 끝난 주사위가 다시 한번 굴렀다.

데구르르-

꽝!

시간정지에 저항하기.

차원이동만큼이나 버거운 판정.

주사위가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꽝을 뽑고,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실패하고, 구르고, 꽝을 뽑고, 구르고, 꽝을 뽑는다.

얼마나 시도했을까. 그 무수한 구름 끝에, 주사위는 마침내 성공을 띄웠다.

성공!

파르르-

이연우의 몸에 생명이 돌아온다. 심장이 박동하며, 혈액이 혈관을 따라 휘돌기 시작한다. 눈꺼풀이 떨리고, 개미가 기어가듯 천천히 움직이는 고개가 원래의 속도를 되찾는다.

이연우가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 멈춰버린 강당과 성공을 띄운 주사위가 보인다. 상황 파악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연우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적대집단인지, 이상異常인지 모르겠고, 뭐에 당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이연우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비상구로 걸었다. 비상구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작다.

이연우의 작은 읊조림이 닫히는 문 틈새로 들려왔다.

“…고맙다.”

주사위 덕분에 움직일 수 있음을 안다.

***

은밀하게 움직인다. 지하 강당을 나와, 숨을 죽이고 계단을 올라, 데스크 아래에서 에코백을 돌려받고, 정문을 지난 후.

정문 앞에서 이연우는 멈춰 섰다.

“어….”

도시에는 소리가 없다.

멸망이 찾아온 세상처럼, 사람의 인기척이,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없다.

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 멀쩡하게 존재하는데, 세상이 죽었다.

이연우는 멍하니 거리를 둘러보았다.

길을 걷는 사람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도. 가로수의 나뭇잎도, 날아가는 비둘기도. 태양을 집어삼키러 몰려오는 먹구름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도.

모두 멈춰 있다. 사진처럼, 일시정지한 영상처럼.

“이게, 이게.”

이연우가 다급하게 주머니로 손을 쑤셔 넣어 핸드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연타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반응이 없었다. 전원이 다 떨어졌을 때처럼 새까만 화면. 그 위로 식은땀이 뚝 떨어졌다.

‘이 정도 규모면 못해도 위험레벨 4.’

오류 확산과 같다. 더 질이 안 좋은 까닭은, 원인도, 해결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망이 답이다!’

이러면 범위 밖으로 도망치는 게 우선이다.

이연우는 거리를 내달리며 마네킹처럼 멈춰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충격을 못 이기고 밀려났으나, 곧 밀려난 자세로 멈췄다.

이상한 자세로 정지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달린다.

정적이 내려앉은 도시에는 이연우의 숨소리가 유일했다. 자동차가 멈춰 있는 도로를 지나, 도심의 언덕을 올라, 이연우가 숨을 멈췄다.

언덕의 정상.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이연우는 하얗게 질렸다.

‘…도시가 멈췄어. 아니야, 도시가 아니야. 이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멈췄다. 이연우는 몸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태양이 있었다.

오전 9시쯤.

한창 하늘의 정중앙을 향해 나아가야 할 태양이 여전히 먹구름 앞에서 멈춰 있다. 이연우가 달리는 동안 조금은 움직였어야 할 태양이, 조금은 기울어야 할 그림자가 미동도 없다.

시간이 멈췄음을 이연우는 깨달았다.

***

도대체 왜 이 지랄이 난 건지, 어떤 이상異常이 이런 일을 벌였는지, 회사가 대응할 수 있을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연우는 서둘러 지하 강당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단서가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터벅- 터벅-

소리 없는 지하 강당에 이연우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무대 위로 이연우가 올랐다.

조명 아래에서 이연우는 김각정 연구원을 보았다. 마이크를 입 앞에 대고, 강의를 진행하던 연구원이 숨도 쉬지 않고 멈춰 있다.

‘시계초침제작소. 시간 관련 이상異常을 연구하는 곳이겠지.’

그곳이라면 지금 사태의 단서가 있을 터.

이연우가 연구원의 품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낡은 지갑에는 카드, 지폐, 영수증, 신분증과 사원증, 그리고 명함이 있었다.

명함과 사원증을 꺼내, 읽는다. 그곳에는 시계초침제작소의 위치가 있었다. 이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이 도시에 있어.’

아예 먼 도시에 있으면 이동만 해도 끔찍한 고통이었을 텐데, 조금은 멀어도 같은 도시에 있다.

이연우는 지갑을 돌려주고, 연구원의 사원증과 명함을 챙겨 지하 강당을 나섰다.

목적지는 시계초침제작소.

‘걸어가기는 힘든데.’

거리에서 두리번거리던 이연우는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를 밀어 넣던 사람을 찾아냈다. 다행히 자물쇠가 걸리기 전이다.

“…빌리겠습니다.”

자전거 주인을 길에 앉혀 두고, 자전거를 꺼내 안장에 올랐다.

자전거가 멈춰버린 세상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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