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멈춘 세상에서도 이연우의 시간은 흐른다.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 적막한 도시를 달리고, 배고프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꺼내먹고, 목이 마르면 카페에 들어가 막 쟁반에 올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오직 이연우만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를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연우는 시계초침제작소에 도착했다.
‘백범문화연구소랑은 느낌이 다른데.’
도시 한가운데 있기 때문일까. 겉보기에는 오래되어 낡은 5층짜리 상가건물이다.
1층에는 편의점과 카페가 들어와 있고, 그 위로는 이름만 봐서는 뭐 하는 곳인지 모를 사무실들이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최상층에는 페인트가 다 떨어져 나간 시계초침연구소의 간판이 붙어 있다.
‘가자.’
부디 이곳에 단서가 있기를 바라며, 이연우는 김각정 연구원의 사원증을 꼭 쥔 채 걸음을 내디뎠다.
1층. 평범한 상가 건물. 그러나 사람이 없고, 엘리베이터는 고장 표시등이 들어와 있었으며 테이프로 입구를 막아뒀다.
끼이익-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 층계참에 대화를 나누던 자세로 멈춰 있는 보안요원 둘을 지나쳐, 5층까지 단번에 도착했다.
비상구를 나와 5층으로 진입하자, 건물의 낡은 외형과 비슷한 느낌으로 오래된 복도가 나왔다. 이연우의 눈은 복도 끝을 보았다.
[소장실]
마침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 회사원이 있어, 문이 열려 있다.
‘저기부터.’
이연우는 문을 막은 회사원을 옆으로 밀어두고, 소장실로 들어갔다.
소장실은 낡은 건물에 으레 있을 법한 옛날 사무실처럼 생겼다. 큼직한 플라스틱 책상에 잡동사니가 늘어져 있고, 안쪽 자리에는 폭삭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소장 명패 뒤에 있는 노인은, 의자를 돌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도심을 보고 있다. 주름진 눈매와 음울한 눈동자.
“이제….”
이연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적 속에서 이연우의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이연우는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시간정지와 관련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리고, 찾았다.
노인의 옆에 놓인 구식 컴퓨터. 뚱뚱한 CRT 모니터, 하얀 키보드, 공이 들어간 마우스.
이연우는 구식 컴퓨터 앞에서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전자기기가 있었으니까.
***
푸른 배경의 하얀 글씨가 움직인다. 그 문자를 곱씹어 보기를 잠시, 구식 컴퓨터 주변에 놓인 파일철을 통해 정보를 얻은 이연우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고장 난 시계로 시간을 멈췄구나…. 그런데, 왜?’
시간정지를 회사가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회사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안도가 된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단어가, 시간정지까지 일으켜야 할 위기가 이연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구형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마우스가 미끄러지며 화면에 변화가 생겼다. 응답기관이 3으로 변하고, 문자가 사라진 자리에 단순한 디자인의 채팅창이 나타났다.
이연우는 머뭇거리다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다가 엔터를 누른다.
- CHS : 누구 없습니까?
번개같이 곧바로 채팅이 돌아온다.
- ACTR : 아! 드디어! 저 말고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군요!
이연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채팅이 우다다다 연달아 올라왔다.
- ACTR : 지금 상황 아시나요?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고장 난 시계를 가동해 시간을 멈추고 작전권까지 가져갔는데, 그쪽에서는 아무 말도 없어요! 심지어 지금도 비상연락망에 접속해있으면서!
이연우의 눈이 모니터 왼쪽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비상통신망에 접속해있는 기관의 목록이 있었다.
CHS(시계초침제작소 : Clock Hand Studio)
ACTR(시계탑연구학회 : Association for Clock Tower Research)
TPL(시간물리학연구소 : Time Physics Laboratory)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는 세 곳의 기관.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도 활동하는 회사의 부서.
이연우는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 CHS : 저도 모릅니다.
- ACTR : 아….
잠깐 채팅창이 멈췄다. 이연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지 고민되어서, ACTR은 좌절에 빠져서.
하지만 ACTR은 금방 기운을 되찾고 채팅을 보냈다.
- ACTR : 그래도 좋아요. 다행히 움직이는 회사원이 더 있네요.
- CHS :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상황부터 간단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연우의 질문에, ACTR은 대화가 그리웠다는 듯 부지런히 채팅을 쳐서 답한다.
- ACTR :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상경보체계를 확인했는데, 위험레벨 6의 이상사태는 터지지도 않았어요. 고장 난 시계를 작동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 ACTR : 그런데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시간을 멈춘 거예요.
- ACTR : 혹시 실수로 작동하고 수습하는 중일까요? 아니면, 적대집단이 습격한 걸까요?
이연우는 푸른 배경의 채팅창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눈동자에 맺히는 모니터의 푸른빛.
‘그러니까, 시간을 멈출 이유가 없는데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멈췄다는 거지.’
의심스럽다. 시간물리학연구소의 의도와 행동 전부가. 하지만 이연우는 채팅창을 노려보며 차근차근 판단을 내렸고, 곧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신경을 돌렸다.
‘어쨌든 지구가 위험한 이상사태는 없다는 말이고. 지금은 시간물리학연구소가 중요한 건 아니지.’
다시 채팅창을 본다.
- ACTR : 시간물리학연구소! 보고 있죠! 무시하지만 말고 말을 해보세요! 실수한 거면 도와줄 테니까!
이연우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안건을 묻는다.
- CHS : 그보다 시간 정지를 해제할 방법은 없습니까?
- ACTR : 이 정도 규모는 고장 난 시계를 작동한 시간물리학연구소만 가능해요. 시계탑은 기껏해야 지역 범위의 시간만 조작할 수 있어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간물리학연구소는 답도 없고, 고장 난 시계를 멈출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까.
타닥타닥- 탁-
- CHS : 그러면 영원히 이렇게 멈춘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 ACTR : 연구소에서 고장 난 시계의 작동을 멈추거나, 고장 난 시계의 시간동력이 다하지 않는 한….
답이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연우의 시선이 저절로 주사위로 갈 때, ACTR에서도 차선책을 말했다.
- ACTR : 하지만 만약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끝까지 답이 없으면, 여기 런던의 시간만이라도 재생하려고 해요.
- CHS : …그러면 이쪽에서도 제한적으로 시간을 재생하겠습니다. 마침 시도해볼 방법이 있어서요.
주사위로 사람 한 명 한 명의 판정을 굴리거나, 거리나 지역 범위로 굴리거나, 리스크는 크지만 시간정지 자체의 판정을 굴릴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연우는 진짜로 그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접속자 명단의 시간물리학연구소를 보았다.
‘뭘 하는지 몰라도, 시간 재생을 바라지는 않아 보여.’
말하자면 협박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반응이 돌아올 것이었다. 이연우와 ACTR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시간물리학연구소에서 첫 메시지를 보내왔다.
- TPL : 멈추게. 지금 시간을 재생하면 안 돼.
- ACTR : 이제서야 답을 하다니! 상황부터 설명하세요! 아니, 그 전에 그쪽은 누구죠? 연구소 사람은 맞나요? 점령당한 건 아니죠?
이연우는 몸을 뒤로 빼서 그들의 채팅을 유심히 보기만 했다.
- TPL : 연구소장이네. 그리고 우리는.
메시지가 올라온다.
- TPL : 지구를 포기하지 못 한 사람들일세.
그 말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란 힘들었다. 위험한 이상사태가 터졌다는 말인지, 아니면 연구소장이 적대집단의 일원이라는 건지.
이연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키보드를 두들겼고, ACTR에서도 물음표가 잔뜩 달린 메시지를 보내왔다.
- CHS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ACTR : 이상경보체계에 올라온 이상사태는 없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혹시 이적행위인가요? 그러면 여기서도 더 못 기다립니다!
TPL의 답은 단순했다.
- TPL :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읽는 게 낫겠지. 문서를 보내줄 테니 읽어보게.
그와 동시에 몇 개의 문서가 첨부되어 연속으로 올라온다. 그 제목을 본 이연우는 고개를 모니터로 바짝 기울였다. 호기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는 문장의 나열.
[지구멸망시나리오 : 이상기후異常氣候]
[인류보존계획 1차 기획안]
[이주지 탐사보고서]
[보존계획 진행상황]
***
[지구멸망시나리오 : 이상기후異常氣候]
우리는 이상기후의 원인도 모른다. 인간의 무절제한 개발의 결과인가, 지구의 자연스러운 순환인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이상異常의 영향인가. 어쩌면 모두인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현실뿐.
평균기온의 상승, 해수면의 상승, 식수와 농작물의 감소로 인한 식량난, 홍수와 가뭄과 폭염과 한파로 극단화되는 날씨….
그동안 회사와 우호집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아왔으나, 이제는 한계다.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짧으면 15년 길면 30년 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문명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고, 아스팔트 도로는 수해에 쓸려 내려갈 것이다.
지구종말시계는 끝내 자정을 가리켰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다.
회사는 멸망을 대비하라.
***
심장이 쿵쾅거린다. 손이 떨린다. 마우스 커서가 주체할 수 없이 움직이지만, 이연우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문서를 열었다.
***
[인류보존계획 1차 기획안]
아쉽습니다. 우리에게 별의 순환을 조작할 기술이 없다는 사실이. 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분명 이런 현실을….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핵전쟁 위기 후, 그리고 두 번의 지구종말위험을 막아낸 후 묻어두었던 인류보존계획을 실행합시다.
보존해야 할 인간의 숫자는 100만 명씩 다섯, 500만 명입니다.
기원전 8000년쯤 인간의 숫자는 500만 명이었다고 추산되죠. 우리의 힘이라면 100만 명의 인구로 더 짧은 시간 안에 문명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 최후의 쉘터를 건설하여 100만 명의 생존자를 남겨두고, 화성기지에 100만 명을 수용하여 지구의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올 날을 준비합시다.
또한 인간 친화적인 환경의 이차원 두 곳에 100만 명씩 인류를 이주시키고, 마지막 100만 명은 멸종방어장치 : 방주에 넣습니다.
지금부터 회사는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 추가
적대집단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들도 이 사실을 알아요. 지금 설치는 놈들은 잔챙이에 불과합니다.
진짜 위험한 멸망주의자는 우울증에 걸려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이면 지금까지 뭘 한 거냐고. 진짜 멸망한다는 말에 회사로 넘어온 사람들도 제법 있고요.
자유예술가협회는 멸망 후에도 예술작품을 남기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짓는 중이고, 악마숭배자는 악마의 힘으로 악마자치구를 만들어 생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골드버그 클럽은 지하도시를 건설하느라 바쁘고요.
다른 집단들도 비슷비슷합니다. 모두 대형사고를 칠 여력이 없어요.
***
더 이상은 읽을 수가 없다. 마우스를 잡은 손이 미끄러져, 책상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작 짤막한 문서 두 개를 보았을 뿐인데, 이상異常에 당한 것처럼 전신에 힘이 빠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귓가에서는 이명이 울리는 듯하다. 이연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시계초침제작소의 소장이 음울한 눈으로 보던 창가. 이연우는 휘청휘청 걸어, 창가에 서서 도시를 내려보았다.
그곳에는 지구가 있었다. 회사가 포기한 지구가. 머지않은 미래에 멸망할 지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