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머리가 하얗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연우는 창가에 서서 정지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도시. 짧으면 15년, 길면 30년 안에 붕괴할 도시. 서른 살인 이연우가 중년의 나이에 마주할 멸망.
흔하게 보았던 뉴스나 다큐 따위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이상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는 땅, 바다 아래로 잠긴 땅, 쏟아지는 폭우와 폭설, 바닥을 드러낸 강바닥, 꺼지지 않는 산불,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을 오가는 계절….
사람 한 명은커녕 회사가 나서도 막을 수 없는 지구적 재앙.
충격과 무력감에 휩싸인 이연우를 깨운 건,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꼬르륵-
이연우의 시간은 흐르고 있기에 생체활동 역시 평소와 같다. 이연우는 굶주림에 정신을 차리고는, 구형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배고픔은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다.
눈과 손이 구형 컴퓨터로 향했다. 동공에 푸른빛이 맺힌다.
‘TPL이 방법을 찾기 위해 시간을 멈췄어. 막아낼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나라도 피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채팅창은 TPL의 문자를 마지막으로 멈춰 있었다. ACTR도 충격에 빠졌는지, 더는 채팅을 올리지 않는다.
이연우는 남은 문서를 열었다.
***
[이주지 탐사보고서]
인류가 이주하기에 적합한 이차원을 탐사한 보고서입니다. 위상학적 차원이동장치와 이상異常을 이용한 탐사결과를 보고합니다.
- 차원 001 : 조사원 사망.
- 차원 002 : 조사원 사망.
- 차원 003 : 이상탐사결과 부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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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결과 : 2곳의 적합차원 발견함. 해당 차원에 이주지를 건설할 것.
추가탐사결과
- 차원 092 : 조사원 제임스 콩이 보고함. 사람 살 곳이 아니다. 조사원 이연우의 보고를 검토한 결과, 원주민과 강도 높은 갈등 가능성 높음. 이주지로서 부적합.
- 차원 093 : 조사원 한스 레이븐이 보고함. 조그만 인간의 세상. 검토 결과, 이주지로 부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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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탐사결과 : 2곳의 적합차원과 5곳의 예비차원 발견.
***
[보존계획 진행상황]
이주지 탐사 결과가 긍정적이라서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차원에 이미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군요.
민들레 씨앗처럼 차원 곳곳에 뿌리내린 인간. 보존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인류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다.
그와 별개로, 보존계획에 반대하는 직원이 많다는 사실은 부정적으로 보이는군요. 우리 고위급 직원들이 그렇게 의욕이 넘칠 줄은 몰랐습니다. 지구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니.
여러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사한다고, 독립한다고 생각하세요.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이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지구라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 새집으로 이사 가는 겁니다. 쓸모없고 위험한 잡동사니는 지구에 두고, 새 출발을 하자고요.
어찌 되었든 보존계획은 순항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쉘터는 완공되었고, 화성기지는 열심히 증축 중입니다. 두 곳의 적합차원에 이주지를 건설하는 중이고, 방주도 점검종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보존인원도 선별이 끝났고, 먼저 이주한 회사원도 많습니다.
모두 10년만 더 힘을 냅시다. 제한시간 안에 보존계획을 100퍼센트 실행하도록.
***
이연우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지금 울고불고, 좌절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런다고 현실이 변하지도 않는다.
‘TPL. 그리고 보존계획.’
최선은 아닐지라도 방법은 있다.
이연우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좀처럼 타자를 치지 못하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키보드를 눌렀다.
- CHS : 방금 읽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 TPL :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네. 회사는 지구를 포기했어.
연구소장에게서 돌아온 확답.
- CHS : 그러면 대책은 있습니까? 시간까지 멈췄지 않습니까.
- TPL : 아직은 없네.
- TPL : 하지만 시간을 멈춰두고, 지구를 포기하지 못 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연구하면. 비록 희미한 희망일지라도 가질 수 있겠지.
답이 없어서 시간을 멈추고 방법을 찾는다는 말. 확실하지 않은 낙관.
이연우의 손이 다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연우는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사이에 TPL이 보내온 메시지가 보인다.
- TPL : 회사와 우호집단과 적대집단. 인간과 이상異常.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가능성은 있지 않겠는가?
그 말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듯하다.
확실하지 않은 희망은 이연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연우는 보존계획과 이주지 탐사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 CHS : 500만 명의 생존자는 이미 명단이 정해진 겁니까?
지구가 망하더라도 살 방법이 있지 않나. 이연우는 꼭 지구에 연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TPL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 TPL : 인원선정은 끝났고, 인사이동도 데드라인에 맞춰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지. 선정된 인원은 이상기후 시나리오를 알고 있고.
이걸 몰랐던 이연우는 보존인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
결국 이연우가 이상기후를 피할 방법은 없다.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 차마 키보드를 때리지는 못하고 키보드 조금 위에서 부들부들 떨린다.
몸을 잔뜩 웅크린 이연우가 벌떡 일어나, 뛰듯이 걸어 소장실을 나갔다. 가슴이 답답해,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다.
***
소리 없는 도시.
도로 1차선의 자동차 본네트에 기대앉은 이연우는 햄버거를 손에 쥔 채, 도로를 내다봤다. 피로에 절은 얼굴과 어두운 눈.
멀리 사거리의 신호등은 파란불이지만 모든 차량이 일제히 멈춰 있는 도로의 가운데에서, 이연우는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우적- 우적-
평소 좋아하던 햄버거였건만,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이상기후를 피할 온갖 방법이 떠돌았다.
‘100년쯤 시간이 멈춘다면.’
적어도 이연우는 재난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 죽을 수 있다. 도시에는 이연우가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자원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멈춘 이때 쉘터나 방주나 이주지를 찾아 들어간다면.’
시간이 재생된 후 회사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사위로 협박하면 자리 하나쯤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존 준비를 한다면.’
생존을 위한 이상異常을 확보하고, 생존 쉘터를 지어, 그 안에 온갖 자원을 넣어둔다면.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무얼 선택하든 지금과 같은 삶은 다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이 붕괴할 테니까.
바스락-
햄버거 포장지가 입가를 문댔다. 생각에 빠져 있어, 다 먹은 줄도 몰랐다.
“….”
햄버거 소스를 입가에 잔뜩 묻힌 이연우는 말없이 포장지를 보았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추억으로만 되새길 음식.
꾸깃-
햄버거 포장지가 손아귀 안에서 공처럼 구겨진다.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을 준 이연우는, 포장지를 도로에 내다 버린 후, 몸을 일으켰다.
“일단, 시간물리학연구소를 돕자….”
다른 방법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면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지금, 가능성은 낮지만 TPL을 도와 이상기후를 막아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터벅- 터벅-
이연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시계초침제작소의 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연우가 떠난 자리, 던져진 쓰레기가 떨어지다 말고 허공에 멈춰 있다.
***
이연우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채팅창은 멈춰 있지 않았다. 문서를 읽은 ACTR과 대답을 기다린 TPL은 대화를 나누었고, ACTR은 TPL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 ACTR : 지구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시계탑에서는 뭘 도우면 될까요?
- TPL : 방해만 하지 않아도 충분해. 그래도 돕겠다면, 지구의 재생에 필요한 이상異常이 있나 확인해주게.
- CHS : 저도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계획부터 설명해주십시오.
돕기 전에 상대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연우가 묻자, TPL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메시지를 보내왔다.
- TPL : 고장 난 시계로 10년의 시간을 멈췄네. 그 이상은 동력이 부족해. 그래서 10년 동안 회사, 적대집단, 우호집단을 가리지 않고 모든 기술과 이상異常을 이용해 지구를 복원할 방법을 찾을 걸세.
고작 10년. 결과를 확신하기에는 짧은 시간.
구형 컴퓨터 앞에서 이연우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천천히 키보드를 쳤다.
- CHS : 제게 주사위가 있습니다.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으나,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온다. 이연우가 이동하며 치고 지나간 사람부터, 자전거와 먹고 마신 흔적이 있지 않나.
- TPL : 어떤 이상異常인가?
이연우가 짧게 주사위를 설명하자, TPL은 곧장 답을 보내왔다.
- TPL : 도박이군.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네.
- TPL : 그보다는 시계초침제작소의 관측결과를 알려주게. 그곳에는 시간물리학적인 수치를 계측하는 도구가 많지. 지금도 작동할 거야. 그러니 시간 에너지의 변동 추이와 시간 저항값, 그리고-
- ACTR : 그것만이 아니라 임계값부터-
이연우는 멀뚱히 채팅창을 봤다. 뭐라뭐라 채팅은 계속 올라오는데,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결국 그들에게 몇 번이고 되묻고, 그들이 보내주는 사진과 자료를 받아, 시계초침제작소를 구석구석 뒤진 끝에야, 답을 보내준다.
- CHS : 마지막으로 임계값? 93입니다.
- TPL : …확실한가?
- ACTR : 다시 확인해주세요.
이연우는 눈을 돌려, CRT 모니터 옆에 내려놓은 잡동사니 중 온도계 같은 물건을 보았다. 잠깐 채팅 치는 동안 붉은 액체가 조금 올라가, 94가 되어 있다.
타닥타닥-
- CHS : 방금 올라서 94가 되었습니다. 안 좋은 겁니까?
- TPL : 안 좋지. 임계값이 100이 되면 고장 난 시계로도 시간을 막을 수 없으니까. 이러면 생각보다 여유가 없는데. 10년은커녕 한 달도….
임계값이 너무 높다. 이대로면 연구는 시작도 못 한다.
채팅이 멈췄다. 시간을 멈췄는데도 그들의 시간은 없다. 그 사실 앞에서 그들은 고민하다가, 이연우를 찾았다.
- TPL : 그 주사위, 리스크가 얼마나 크지?
- CHS : 대실패가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연우는 그가 겪었던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그들에게 말했다. 차원이동과 총기폭발과 시간정지의 저항.
채팅창은 한참을 멈춰있다가, 우울한 감정을 잔뜩 품고 올라왔다.
- TPL : 위험이 너무 크군…. 주사위는 포기하지.
지구를 재생하기 위해 시간을 멈췄다. 그런데 까딱 잘못하면 지구가 영원토록 멈출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들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당할 수 없었다.
- TPL :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어.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이연우는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내려봤다. 이상기후를 막지 못한다면, 자기 살길부터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생존은 쉽다. 생존 준비를 하는 김에, 다른 일을 도울 여력은 충분하다.
고개를 든다.
- CHS :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회사가 예견한 멸망은 15년에서 30년 사이. 지구를 포기하지 못 한 사람들의 연구는 그 시간 안에 결과를 보면 된다.
모두가 노력한다면, 어쩌면 자정을 가리킨 지구종말시계가 다시 자정부터 움직일 수 있다.
- CHS : 그 연구, 멀쩡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계속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