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연우의 말에 대답이 돌아온다.
- TPL : 당연히 계속해야지.
독단적으로 종말방어장치까지 가동했다. 잠깐은 좌절해도, 아예 꺾일 정도로 의지가 약하지 않다.
이연우가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보았다.
- TPL : 임계값의 추이를 보니, 우리에게는 한 달 정도 남았어. 그 시간 동안 조직을 정비하고, 대략적인 행동지침을 세우지.
한 달이란 시간.
연구를 이어가기에는 짧기에, 그들은 시간이 재생된 후 무엇을 할지부터 정하기로 했다.
- TPL : 우리의 목적은 지구의 재생. 그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 CHS : 모든 집단의 기술과 이상異常을 동원하여 방법을 찾는다. 맞습니까?
이연우가 묻고, TPL이 답한다.
- TPL : 맞아. 쉽지는 않을 걸세. 강탈과 협박은 필수일 거야.
그 뒤로 TPL은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보내왔다. 여러 집단에서 소유한 이상異常. 각 집단에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중요자원.
골드버그 클럽의 황금만능주의, 자유예술가협회의 지구화地球畫, 레드 등급 수배자의 지우개 등등….
총 들고 협박해도 건네주지 않을 이상개체. 그것을 읽은 이연우는 의문을 가졌다.
- CHS : 우리라고 했는데, 누가 있습니까?
- TPL : 많지는 않아. 회사원 중 내 뜻에 공감한 몇, 안면이 있는 이런저런 집단 사람 몇. 그리고 자네 둘.
- ACTR : 진짜 조금이네요….
그럴듯한 집단이라기에는 시간물리학연구소의 소장이 지인을 끌어모은 동아리 수준이다.
- TPL : 그래도 해봐야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시계 톱니바퀴처럼 자길 할 일을 한다면, 지구종말시계를 다시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연우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쉽지가 않다. 모두가 힘을 합친다길래, 동맹이라도 맺은 줄 알았더니.
물론 그래도 돕기야 하겠지만….
- CHS : 저는 뭘 할까요? 조사원인데요.
- TPL : 훌륭하군. 조사 중에 우리 목표에 필요한 이상개체를 발견한다면, 따로 챙겨주게.
일전에 골드버그 클럽이 했던 제안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연우의 대답은 달랐다. 이연우는 고개를 까딱이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어차피 생존에 필요한 이상개체면 적당히 숨기려고 했어.’
- CHS : 가능하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 TPL : CHS가 한국에 있지. 이제부터 자네는 한국지부의 지부장일세. 한국에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탁하지.
- TPL : 그리고 가능하면 한국지사의 회사원을 포섭해주게.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한다.
- CHS : 한국에 조직원이 있습니까?
- TPL : 자네뿐일세.
- CHS : 그러면 지원은요?
- TPL : 지원까지 하기에는 우리 역량이….
일만 있고, 지원도 대가도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나마 받은 건 허울뿐인 직위고. 그야말로 열정 하나뿐이다.
TPL도 민망한지 뒤늦게 채팅을 올렸지만, 이연우의 의욕은 이미 바닥을 친 뒤였다.
- TPL : 그래도 회사에서 간섭하지는 않을 걸세. 그럴 여유도 없고,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는 부분도 있고. 필요하면 내가 다소의 금전적 지원도 가능해.
- CHS : 예, 알겠습니다.
이연우는 적당히 얼굴을 찡그리고 대답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돕는다. 그뿐이다.
‘1순위는 내 생존이야.’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을 길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TPL을 돕는 일은 적당히 여유가 있을 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 ACTR : 그런데 조직 이름은 뭐예요?
- TPL : 지구를 포기하지 못 한 사람들의 모임이면 충분하지 않나?
- ACTR : 네? 그건 너무 촌스럽잖아요! 새로 지어요!
- TPL : 직관적이고 좋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바꾸겠다면, 좋은 이름 있나?
ACTR과 TPL이 이름을 두고 다툰다. 이런저런 이름을 내밀지만, 서로 의견이 달라 채팅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연우는 끼어들지 않았다. 이름이야 중요하지 않다.
그저 느슨한 자세로 앉아 허공을 노려보며, 생존 준비를 어떻게 할까 고민할 뿐.
‘생존을 돕는 이상개체를 확보하고, 이주지나 쉘터로 잠입할 방법도 찾아보고. 최후에는 주사위 도박도 나쁘지 않겠지.’
주사위로 차원이동을 일으켜 이주지로 가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러는 동안 이름이 정해졌다. 이연우는 모니터를 보았다.
- ACTR : 그러면 시계수리공으로 해요.
자정을 가리킨 지구종말시계가 멈추지 않고, 00시 01분부터 움직이게 고치는 사람들.
- TPL : 알겠네, 알겠어.
- ACTR : CHS도 동의하죠?
- CHS : 이름은 신경 안 씁니다.
그렇게 이연우는 시계수리공의 한국지부 지부장이 되었다.
***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임계값이 99까지 치솟았다. 앞으로의 연락은 메신저 어플로 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시간이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터벅- 터벅- 풀썩-
지하 강당으로 돌아온 이연우는 김각정 연구원에게 사원증을 돌려준 후,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가만히 무대를 본다.
이상소유자진신고기간 현수막이 걸려 있고, 김각정 연구원은 한창 강의하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 모두가 그대로이건만, 이연우만이 바뀌었다. 이연우는 눈을 감았다.
‘한 달 동안 나름대로 할 일은 했어.’
시계초침제작소의 기밀문서를 찾아 읽었다. 모르던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고, 골드버그 클럽의 총기제작장이 이 도시에 있음을 알아내기도 했다.
이연우가 가슴을 매만지자,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제 권총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금괴 같은 건 없었지만, 권총만으로도 충분하지.’
골드버그 클럽의 총기제작장에서 사제 권총 몇 자루를 훔쳐 왔다. 총탄도 넉넉하게.
계속 조사원으로 일할 몸이라 차마 회사 비품은 건들지 못했지만, 적대집단은 거리낄 것 없다.
‘이상개체를 확보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리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다, 소음이 쏟아져 내린다.
핸드폰을 툭툭 치는 소리, 무수한 숨소리, 바스락거리는 인기척, 소근거리는 잡담, 연구원의 목소리.
“-오오오 이이동할 수 있습니다.”
김각정 연구원이 눈을 꿈뻑거린다. 뭔가 변했는데, 뭔지 모르겠다.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연구원이 강의를 계속했다.
스피커를 타고 뻥뻥 터지는 소음.
소리가 낯설다. 한 달가량의 시간을 정적 속에서 살았던 이연우는 몸을 웅크렸다.
‘금방 적응할 거야.’
예민한 귀가 고통을 호소하지만, 감각은 빠르게 무뎌졌다. 과연 강의가 끝날 즈음이 되자, 이전과 같아졌다.
“강의는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시계초침제작소의 연구원 김각정이었습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이연우도 박수를 치다가,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하 강당을 벗어났다.
1층의 데스크 앞.
이연우를 붙잡았던 보안요원이 데스크 밑에서 에코백을 꺼내, 이연우에게 건넸다.
“여깄습니다, 사우님.”
“예, 감사합니다.”
이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와 하나가 되어 건물을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던 보안요원은 대기하던 자리로 돌아와 혀를 찼다.
“미신 맞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
이상조사반의 사무실.
이연우는 차근차근 보고서를 작성했다. 강연 후기라는 제목으로 시간이 정지한 동안 무엇을 했는지 쓴 보고서.
‘TPL의 연구소장은 회사가 무시할 거라고 말했지.’
그 말대로 되었다.
보고서를 올린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회사 상부에서는 따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인지, 그들도 지구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못 본 척 슬쩍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늦여름의 나른한 오후.
반장이나 유지유나 이연우나 의자에 늘어져 있는 가운데, 유지유가 발끝으로 바닥을 차 의자를 돌렸다.
지이익-
발끝이 끌리며 의자가 이연우가 있는 방향에서 멈췄다. 이연우는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다.
“뭘 그렇게 봐요? 여자친구 생겼어요? 요즘 핸드폰 엄청 보던데.”
이연우가 움찔 놀라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시계수리공의 채팅방이 사라지고, 까만 화면으로 돌아온다.
“예? 아뇨. 그냥 요즘 신경 쓰이는 게 생겨서….”
유지유가 짓궂은 미소를 띠고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이연우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날씨가 심상치가 않잖아요. 지구 망한다는 말도 많길래. 걱정되더라고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유지유와 반장을 살핀다. 그들이 이상기후를 알고 있는지.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유지유가 풋 웃음을 터트리고, 삐죽 튀어나온 반장의 정수리가 절레절레 움직였다.
“연우 씨, 그런 거 믿어요? 회사원이면서?”
“신입아. 진짜 그렇게 위험하면 회사가 뭐든 한다. 이상한 걱정하지 마.”
회사원이기에 가지는 낙관과 자신감.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연우는 슬며시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도 보다 보면 재밌더라고요. 생존주의? 서바이벌? 그런 것도 조사원 일에 도움되겠다 싶고.”
그들을 포섭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이상기후 시나리오라도 알려줄까 고민했지만, 답도 없는데 괜히 걱정만 안겨주는 듯하여 아직 말하지 못했다.
잠깐의 잡담이 끝났다.
유지유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반장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이연우가 시계수리공의 채팅방을 구경할 때.
똑- 똑-
누군가 이상조사반의 문을 두드렸다. 조사원들이 문을 보자, 두 명의 정보부 요원이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정보부에서 나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갑동과 이서연.
심문 때 본 두 요원이 허리를 숙였다가, 핀다. 반장은 졸린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정보부? 거기서 왜?”
이연우가 긴장했다. 혹시 시계수리공 때문일까. 핸드폰을 쥔 손이 식은땀으로 젖는다.
두 요원이 넓고 텅 빈 데스크를 둘러보다가, 이연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우 씨 도움이 필요해서, 지원받으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