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자정이 지나 막 잘 준비를 하던 때, 시계수리공에서 임무가 내려왔다. 이연우는 침대에 누워 채팅을 차근차근 읽었다.
- TPL : 이상기후를 가속하는 원인 중 하나를 찾았네! 원인이 한국에 있으니, CHS에서 조사를 해주게.
기쁜 소식에 흥분했는지 말에 두서가 없다. 하지만 이연우는 침착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 CHS : 자세하게 말해주시죠. 원인이 뭔지, 뭘 조사하면 되는지.
- TPL : 예술가의 도움을 받아 회사 서버 하나를 습격해서 데이터를 빼돌렸는데, 기밀문건 중에 ‘북풍과 태양’이라는 이상개체가 있었네.
멈칫,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에서 정지했다. 이연우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한번 글귀를 읽었다. 그리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아니….”
예술가? 습격? 내가 뭘 읽은 거지? 우리가 이렇게 공격적인….
혼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연우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학살회사나 관리회사에 비하면 아주 온건했으니까.
‘이 정도면 뭐 괜찮지.’
이연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두고, 채팅에 집중했다.
- TPL : 북풍과 태양은 양피지에 쓰인 동화인데, 양피지를 만진 사람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동화의 인물이 되네.
- CHS : 외투를 걸친 나그네가 되는 겁니까?
- TPL : 그렇다네.
이연우는 핸드폰 외곽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북풍과 태양이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벗기는지 내기하는 동화.
- CHS : 이게 왜 이상기후의 원인입니까?
- TPL : 정확히는 이상기후를 가속하는 원인인데.
- TPL : 내기의 결과에 따라 현실의 기온이 변하네. 태양이 승리하면 기온이 상승하고, 북풍이 승리하면 기온이 하강하지.
자기 위해 불을 끈 방 안. 크게 떠진 눈에 핸드폰의 불빛이 맺혔다. 이연우는 다급하게 핸드폰을 두들겼다.
- CHS : 그러면 이걸 이용해서 이상기후를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까!
- TPL : 음. 회사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사고가 났네.
TPL은 기밀문건에서 읽은 실험기록을 천천히 말했다.
이상기후를 인지한 회사는 북풍과 태양의 내기 결과를 조작해서 이상기후를 막기로 했다. 온갖 억지를 부려 북풍이 계속 승리하게 만들어, 기온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 TPL : 처음에는 잘 됐다더군. 그런데, 북풍과 태양이 알아챘네. 자신들이 속았고, 이용당했다고.
- TPL : 그 후, 그들이 분노하여 계속해서 기온이 상승하고 있지. 이제 내기도 하지 않고.
회사가 이상기후에 기여하고 있구나!
이연우는 이마를 탁 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회사를 비판하기에는, 어쨌든 이상기후를 막기 위한 시도였다. 결과는 안 좋았지만.
- TPL : 어쨌든 북풍과 태양이 한국의 크립티드연구동호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자네가 가서 조사해주게.
- CHS : 뭘 조사하면 됩니까?
- TPL : 그건.
채팅이 멈췄다.
이연우는 화면만 보며 뒷말을 기다렸고, TPL은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지시를 내렸다.
- TPL : 크립티드연구동호회의 건물구조, 북풍과 태양의 위치, 보안 상태 같은 것을 조사해서 알려주게.
- CHS : 그건 왜….
- TPL : 멸망주의자든 예술가든 파견해서 빼돌려야지. 이상기후를 유예할 수 있는 이상개체 아닌가.
파괴하여 멸망으로의 가속을 멈추든, 잘 설득해 기온을 낮추든, 시계수리공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이상異常.
이연우도 그 뜻에 동감하여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희미한 희망이나마 찾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단순한 정찰.
이연우가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짤막한 문자를 보냈다.
- CHS : 예. 하겠습니다.
***
기세 좋게 답했지만, 바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다. 무턱대고 찾아갔다가는 보안팀에 잡힐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연우는 밤잠을 설쳐가며 계획을 준비했고, 아침이 오자,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은 몸으로 조사반으로 출근했다.
평소보다 한참 일찍 도착한 사무실.
반장은 먼저 와서 커피믹스를 타 마시다가, 고개를 들어 이연우를 보았다.
“어. 일찍 왔네. 잘 왔다. 여기 쓰레기 좀 내다 버려. 꽉 찼어.”
반장이 넘칠듯한 쓰레기통을 향해 고갯짓을 한다. 이연우는 무시하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유지유는 출근하지 않았다. 평소 출근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30분은 더 있어야 한다.
둘뿐이니 말을 꺼내기 딱 좋다.
이연우가 침을 꿀꺽 삼키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진지한 목소리.
반장이 흠칫 굳었다. 그리고는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퇴직하려고?”
그동안 겪은 사건사고만 해도 심각한데, 탈모까지 왔으니 퇴직을 생각할 만도 하지. 달달한 커피믹스를 마셨건만,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돈다.
반장은 굳이 말리지 않고 요청을 들어주려고 할 때. 이연우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예? 아뇨. 회사를 왜 그만둡니까.”
이상기후를 깨달은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이다. 회사원의 신분과 인맥과 정보와 기억을 잃으면 살아남기 힘든데 지금 퇴직을?
이연우와 반장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마주쳤고, 반장은 곧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아니야? 아니구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혹시 이상기후 시나리오와 보존계획을 아시는지 여쭤보려고요.”
이연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반장을 시계수리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처음 듣는다. 회사 프로젝트 같긴 한데.”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반장은 고개를 저었고, 이연우는 이야기를 압축하여 말하였다.
시간 정지, 이상기후, 보존계획, 시계수리공, 지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방법을 찾아 찢어진 파벌과 회사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반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이 바짝 마르는지 커피믹스를 다 마시고, 물까지 몇 번이고 마셔가며, 묵묵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반장은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과거와 미래를 더듬어 보는듯한 흐릿한 동공.
“그래서 회사 꼬라지가….”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목소리.
이연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얌전히 서서, 반장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후, 반장이 고개를 내려 이연우를 보았다.
“그래서. 나보고 너희 파벌 들어가라고?”
“예. 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반장은 초점 잡힌 눈으로 이연우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반장님.”
“신입아, 들어봐라. 나는 회사의 조사원이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똑같이.”
반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오래된 이상조사반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낀 천장.
이상기후가 찾아오더라도, 몇십 년은 가뿐히 버틸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천장.
“이상기후가 찾아와도 인류는 멸종하지 않을 거다. 지금과 많이 다르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반장은 이상기후가 덮쳐온 미래를 그렸다. 아마 살기가 쉽지 않을 거다. 현대 문명은 분명 붕괴하겠지.
하지만 문명이 붕괴하고 지구가 망가지더라도, 인류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시 사회로 회귀하고, 소규모 집단으로 분산되겠지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면, 인류보호회사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있으면 회사도 있다. 회사가 별거냐? 이상異常으로부터 사람을 지키면 그게 회사지. 나는 계속 회사원으로, 조사원으로 살 거다. 다른 일은 몰라.”
반장은 예정된 멸망을 받아들였고, 망가진 세상에서도 회사원으로, 인류보호회사로 남기로 했다.
반장이 흐릿하게 웃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새로 뭘 시도하기가 힘들어. 그냥 살던 대로 살란다. 물론 머리카락은 내가 너보다 젊지만 말이다.”
농담으로 말을 마무리한 그는, 어려운 표정을 지은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겠습니다.”
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연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어깨를 꽉 쥐었다. 두꺼운 손가락이 정장에 깊은 주름을 남겼다.
“따로 너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으마. 젊으면 이것저것 도전하고 그래야지. 그리고, 반장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은 내가 도와주마.”
“아.”
어깨를 잡혀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던 이연우가 얼굴을 활짝 폈다.
“그러면 일 하나만 도와주십쇼.”
“어, 어? 지금?”
“예. 크립티드연구동호회로 갈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저 혼자 찾아가기 힘들지 않습니까.”
반장이 조금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눈감아줄 일은 눈감아주고, 커버칠 일을 커버치겠다는 뜻인데.
이연우는 밤새 생각했던 계획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이상감사 명목으로 함께 갈 수 있을까요?”
반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돕겠다고 말한 직후, 못하겠다고 뒤로 빼는 건 멋 없는 짓이었으니까.
그들이 한창 사무실을 나설 준비를 하는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유지유가 출근했다.
유지유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요?”
“어. 연우랑 출장 간다.”
“그럼 저 혼자 사무실 지키고 있어야겠네요?”
어딘가 기쁜 기색으로 말하는 유지유에게, 반장이 대충 손짓했다.
“그래. 시간 되면 퇴근하고, 나한테 연락 오면 감사 나갔다고 말하고. 그리고 청소해둬. 쓰레기 비우고, 저저 천장에 거미줄 치우고.”
“거미는 왜요? 벌레 잡아주잖아요.”
“어휴. 알아서 해라.”
차 키를 챙긴 반장이 사무실을 나서고, 무거운 에코백을 어깨에 걸친 이연우가 유지유에게 짧게 고개 숙인 후 반장을 따라 나갔다.
목적지는 크립티드연구동호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