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이연우는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을 찾았죠. 이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게 문제고요.”
“그렇소. 내 생각에, 최대한 사람을 끌어모아야 하오.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딱- 딱- 딱-
이연우는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수많은 갈림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인맥을 이용하여 직접 명령하는 방법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연합을 결성하는 방법까지.
그중 가장 안전한 길.
딱-!
손짓이 멈췄다. 이연우는 회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인류보호회사 이름으로 세상에 뿌려버립시다.”
“뿌리겠다고? 인류보호회사 이름으로?”
회장은 당황한 얼굴로 이연우를 마주 봤다. 그는 이연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여러 의미로.
“좋은 방법 같지는 않소. 당신의 명예와 명성이 묻히는 것도 그렇고, 해결책을 공개한다고 사람들이 따를까 의심되기도 하오.”
“행동하는 사람은 분명 있습니다.”
학살회사나 관리회사 같이 행동력과 결단력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 그들은 의심하더라도 일단 확인 삼아 움직이긴 할 터.
움직인다면 의심은 사라질 테고, 이상목록을 확보하고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리라.
그리고 이상기후 해결책을 찾아낸 공로자로서의 유명세는….
“명예, 영광, 대가,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멀쩡한 지구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제 이름은 비밀로 지켜주십시오.”
회장이 우묵한 눈으로 이연우를 바라보았다. 이연우는 그 눈을 바라봤다. 진실한 감정을 담아서 절실하게.
‘독이야. 그런 유명세를 얻으면, 멸망주의자의 최우선 타겟이 될 거야.’
멸망할 지구를 회복시킨다? 멸망주의자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나무 인간이 보여준 미래가 선명하다. 최후의 쉘터를 지워버린 멸망주의자의 공격. 이연우는 그런 괴물의 목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연우는 아무도 모르게 길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이 그 길을 걷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회장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뱉었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하겠소.”
“연락처 하나 드리겠습니다. 관리회사 파벌의 1차대응과 과장인데, 그 사람한테 부탁해서 정보를 공개하세요.”
에코백에서 명함이 하나 나왔다. 일전 테러 사태 때 1차대응과 과장에게 직접 받은 명함.
명함이 책상을 가로질러 회장의 앞에 도착했다. 회장은 조심스럽게 명함을 챙겨, 지갑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 바로 연락하겠소. 보레아스와 헬리오스, 아니, 북풍과 태양은 우리가 설득해보겠소.”
그리고 그날.
정보가 공개되었다. 이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한테.
***
정보부가 전력을 다해 뿌린 해결책.
회사의 인트라넷을 통해 이상기후와 보존계획까지 곁들여져, 모든 회사원에게 메일로 보내졌고.
회사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연락망을 통해 모든 집단과 집단의 여러 구성원에게 연락하여, 정보는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이게 진짜일까요…?”
멸망이 오기 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예비 악마숭배자를 찾아 도시의 그림자를 떠도는, 왜소한 악마숭배자가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는 부조리의 악마가 배를 부여잡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새끼…. 칭찬! 예정된 멸망이 이렇게 부조리하게 막히다니!”
“악마님….”
“진짜 맞아.”
“그게 아니라. 맬서스의 악마…. 이 악마도 이름 바꾸지 않았나요?”
악마숭배자는 가만히 핸드폰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필연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종말을 관장하는 악마.
과거 토지와 식량 생산은 인구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론이 대두되었을 때는 맬서스의 악마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이상기후가 닥쳐오는 지금. 지구온난화의 악마였나, 이상기후의 악마로 이름을 바꿨다고 들은 듯하다.
부조리의 악마가 낄낄 웃었다.
“뭐가 중요해. 잡아서 회사에 넘기자고.”
“그래도 같은 악마인데….”
“그 새끼, 원래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의 악마숭배자를 무시하고, 부조리의 악마가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딱, 딱, 딱!
“재미없는 새끼 소환. 기절. 구속.”
부조리한 현실이 맬서스의 악마를 덮친다.
음울한 학자풍의 악마가 뜬금없이 소환되었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돌연 끊어진 전깃줄에 꽁꽁 묶여, 아스팔트 도로 위에 축 늘어졌다. 그 위로 부조리의 악마가 발을 올린다.
“낄낄낄.”
경박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악마숭배자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회사죠? 악마 신고하려고 하는데요…. 여기가 어디냐면….”
이와 같은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다.
바티칸의 어느 회의실.
그곳에 모인 성인들은 회사의 연락을 두고 대화를 나누다가, 탄식했다.
어떤 성인이 말했다.
“계시를 잘못 이해했나 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음성을 빌어 유혹했던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결국 순리대로 돌아가니, 이 또한 그분의 계획일 겁니다.”
어느 날, 그들은 기도하던 중 동시에 계시를 받았다.
- 인간의 타락이 하늘에 닿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으니, 홍수로 지구를 정화하고, 신인류를 어린양으로 삼아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 허나 너희를 가엾게 여겨 구원의 문을 열어두니.
- 세상에 13가지 재앙이 닥쳐오는 날, 나의 아들을 찾아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죽은 자는 나의 나라에서 살아나고, 산 자는 하늘에 올라 나를 만날 것이다.
“하긴…. 신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계시였죠.”
“그러면 구원 계획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롱기누스의 창도 다시 성유물보관소에 넣겠습니다.”
대홍수의 발단이 되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비인간으로 변하는 기독교적 재앙이 계획 단계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하나둘 이상개체가 처리된다.
오두막의 어느 마법사.
“스승님. 이것 좀 보세요.”
“뭐냐.”
젊은 제자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고는, 손발을 휘저어가며 설명했다. 이상기후와 이상목록. 그중 스승이 가진 수르트의 검.
백발이 성성한 마법사는 가만히 이상목록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저게 문제라고?”
대충 구석에 박혀 먼지만 먹고 있는 붉은 검. 한때 무스펠하임을 탐색하다 얻은 수르트의 검.
“예. 그래서 말인데, 스승님한테 중요한 물건도 아니잖아요.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오냐.”
늙은 마법사가 주섬주섬 손을 움직였다. 그는 형형색색의 가루와 염료 따위로 마법진을 그렸다.
이차원과 상호작용하는 방법. 마법.
늙은 마법사는 대충 수르트의 검을 들어 올린 후, 마법진에 집어 던졌다. 마법진이 빛나더니 수르트의 검이 사라졌다.
제자가 호기심에 차 질문했다.
“어디로 옮기셨어요?”
“아스가르드에 버렸다. 이 기회에 쓰레기나 정리하자꾸나.”
늙은 마법사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제자를 시켜 쓸모없는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마법진에 던져넣었다.
골드버그 클럽도 행동했다.
도심의 빌딩 최상층.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얼굴 조각상 앞에서, 예술가에게 맞춤 제작한 명품을 전신에 둘둘 두른 남자가 금괴를 들어 올렸다.
금괴가 조각상의 입에 들어갔다. 꿀꺽 소리와 함께 사라진 금괴.
남자가 말했다.
“이 해결책은 진실입니까?”
- 그렇다.
“이상기후는 사라집니까?”
- 그렇다.
질문 하나에 금괴 하나씩.
질답을 마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비서를 불러 명령했다. 비축한 황금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또한 이상목록 중 골드버그 클럽이 회사에 생색을 낼 만한 개체목록을 정리해 가져오라고.
그는 고가의 시계를 매만졌다.
“돈을 벌고 잘 살려면 이상기후는 죽어야지.”
과거 이상기후를 알아차리자마자 효율적으로 질문했을 때, 골드버그 클럽의 역량으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지하도시 건설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행동도 달라진다.
드르륵-
황금이 끝도 없이 들어왔다. 남자는 황금을 모조리 조각상의 입에 넣으며, 정리된 명단을 하나하나 읽었다.
날갯짓으로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 위치를 찾기 힘든 이상개체.
“나비효과를 죽여주십시오.”
- 죽였다.
“좋습니다. 다음은.”
황금을 대가로 소망을 이뤄주는 황금만능주의가, 이상개체를 하나하나 처리한다.
회사의 활동 역시 최고점을 찍었다.
파벌과 파벌, 밤과 낮,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특전대, 정보부 요원, 조사원이 협력하여 이상개체를 확보하고, 이용하고, 파괴한다.
그때마다 조금씩 물러나는 이상기후.
기온의 급격한 상승이 멈추었다. 극단으로 치닫던 날씨가 서서히 돌아오고, 극심한 자연재해가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
그리고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어느 섬.
이연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폭풍은 지구를 뒤덮었고, 이 섬 또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
건장한 체격의 대머리 남자가 절벽에 서서 바다를 보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바다.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면 안 된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그림처럼, 지우개가 한 번 지나간 소묘화처럼, 흐릿하고 뿌옇게 보여야 한다.
남자는 손아귀에 쥔 지우개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멸망이 사라진다고?”
최고위급 멸망주의자. 지우개를 소유한, 지우개로 수많은 테러를 일으킨 수배자.
지우개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 반쯤 지우개와 한 몸이 된, 그래서 멸망의 감각을 손에 넣은 그는 이상기후가 사라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그는 휙 몸을 돌려 그가 머무는 자그마한 저택을 노려보다가, 가볍게 손을 그었다.
허공을 긋고 지나가는 지우개. 그 궤적에 걸린 저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멸망주의자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이상기후가 사라진 원인을 찾기 위해, 그리하여 그 원인을 지워버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