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정보부의 한 밀실.
이연우가 가죽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문이 덜컥 열리며 1차대응과 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이연우!”
밤을 새웠는지 초췌한 안색의 그는,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내며 이연우의 손을 덥썩 잡았다.
“네 방법이 맞았다! 벌써 이상기후가 절반 이상 해결되었고, 남은 것들도 곧 처리가 끝날 거야!”
손목이 아플 정도로 마구 흔드는 손.
이연우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과장을 의자에 앉혔다. 과장은 잠도 부족한데 크게 흥분해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컵에 물을 따라 건넨 이연우는 질문했다.
“처리가 잘 됩니까?”
“아주 잘 되지! 그동안 우리가 손도 못 썼던 이유는 원인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야. 모를 만도 했어. 이렇게 많은 이상개체가 얽혔는데, 알 수가 없지.”
이상기후는 거대한 기계장치와 같았다. 크고 작은 이상개체와 인간의 활동이 맞물린 기계장치.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는 기계장치.
장대한 기계장치 앞에서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연우가 이상기후의 설계도를 공개한 것이다. 모든 부품이 낱낱이 분해된 설계도를.
“이상기후와 정면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어. 이상기후가 해체됐으니까. 구성품을 하나씩 따로 처리하면 끝이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지.”
과장은 목이 아픈지 켁켁 기침을 했다. 물을 몇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간다.
“특전대의 부대 하나가 이상異常 하나를 감당한다. 정보부도 비슷하고, 다른 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이연우는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이상현상이 겹친 이상기후는 누구도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개체 몇 개?
의심스러운 눈으로 쿡 찔러볼 수도 있고, 힘으로 부숴버릴 수도 있고, 다른 세상에 내다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가벼운 대응 하나하나가 모이면, 이상기후는 파괴된다.
“다행입니다.”
“다행?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이건-”
“그….”
이연우를 끌어안을 듯한 기세 앞에서, 이연우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정보부로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이상기후가 사라짐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를.
“그보다, 멸망주의자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요.”
“…그놈들.”
과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살기가 어린 눈으로 허공을 보다가, 천천히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1시간 전에 찍은 위성사진이다. 골수 멸망주의자가 집결했다고 하더군.”
이연우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어딘가의 섬인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다른 서류에는 그들의 신상명세가 쓰여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살벌한 수배자들이다.
특히 지우개란 단어가 눈에 박혔다. 이연우는 바짝 마른 입을 열었다.
“제가 목표는 아니겠죠…?”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연우가 떨리는 눈으로 과장을 보았다. 과장은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 해결책을 공개한 사람이 너라는 걸 알아냈어.”
“아니…. 비밀 지켜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과장한테 자기가 해결책을 찾은 사람이라고 밝혔다. 안전을 위해 보안 조치를 해달라고.
그런데 뭐? 벌써 알아냈다고?
과장은 눈을 피하며, 뒤에 놓인 서류 한 장을 이연우의 앞으로 밀었다.
“우리도 보안에 굉장히 신경 썼다. 본사에서 나서서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는데.”
서류에는 보안조치목록이 쓰여 있다. 이연우는 수많은 조치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크립티드 동호회 사람들은 자청하여 기억소거제를 마셨다. 정보부에서 통신망을 모두 조작하여 이연우와 관련된 정보를 모조리 삭제하고, 허위정보를 유포했다.
거기에 회사의 이상개체를 이용하여, 이상異常으로 몇 겹의 보안을 걸었는데….
이연우가 서류 모서리를 꽉 구겼다. 구겨진 종이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결국 다 뚫렸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과장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의 지우개란 단어와 몇몇 수배자를 쿡 찍었다.
회사가 전력을 다해 죽이려고 해도, 끝내 살아남은 수배자. 그 능력만은 부정하지 못한다.
“이상개체를 이용한 보안은 지워졌고, 우리가 다양한 방면으로 취한 보안도 뚫렸어.”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경호라도 붙습니까? 어지간한 경호로는 안 될 텐데요?”
끼익-
이연우가 탁자를 손톱으로 긁으며 묻자, 과장은 주변을 둘러봤다. 꽉 닫힌 밀실. 나름 보안조치가 취해진 방.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회사는 널 보호하기로 했다.”
“어떻게요?”
이연우의 억울한 눈을 마주 보며, 과장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최후의 쉘터. 이상기후조차 막아내는 최후의 쉘터로 널 초대하기로-”
“돌겠네.”
이연우가 이마를 탁 치고는, 의자 위로 축 흘러내렸다.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최후의 쉘터? 미래에 지우개로 지워진 거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진짜 안전한데…. 최후의 쉘터는-”
과장이 복잡한 용어를 사용해가며 쉘터의 안전성을 설명하지만, 한 문장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워진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뭔.
이연우는 한숨을 쉬며 짧게 말했다.
자기가 본 미래에, 그곳은 지워졌다고.
“….”
과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충혈된 눈동자를 깜박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거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는데.”
이연우는 위성 사진을 툭 쳤다.
“이 사람들, 위치 알면 폭격이나 미사일 못 날립니까?”
“예전에 해봤지. 안 통한다.”
“시간을 멈춘 뒤 암살이나, 이상개체를 이용한 습격도 안 통합니까?”
“그것도 다 해봤어.”
“그러면 제가 이주지로…. 아니, 아닙니다.”
기껏 지구를 살려놓고는, 멸망주의자를 피해 척박한 이주지로 갈 수는 없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과장은 피곤한 머리를 굴리며 대책을 찾았고, 이연우 역시 이것저것 생각하며 살아날 길을 찾았다.
그 끝에 이연우가 말했다.
“최후의 쉘터로 갑시다. 거기서 제대로 한 번 싸워봅시다.”
“전면전이라.”
“회사의 전력은 당연히 다 끌어오고, 멸망주의자 싫어하는 집단과도 연합합시다. 회사 이름으로 해결책을 공개했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 아닙-”
말을 이어갈 수 없다. 갑자기 밀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요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과장님! 지우개가 습격해왔습니다!”
과장과 이연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원 요청부터 해!”
“불가능합니다! 이곳만이 아니라, 여러 회사 부서와 집단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있답니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사라졌다.
지하에 위치한 정보부의 위로, 햇빛이 비친다. 가을의 서늘한 공기가 불어왔다.
***
조금 전, 멸망주의자가 집결한 섬.
그들은 회사가 발표한 이상기후 해결책을 보며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회사…. 지구 포기하지 않았나? 언제 이런 걸 다 조사했대? 아. 한 명이 알아냈다고 했나? 뭐 하는 인간이야.”
“그게 중요하냐. 기껏 찾아온 멸망이 미뤄진 게 문제지.”
“쯧. 회사 놈들. 지들 살겠다고 아주.”
자유분방하게 앉아 회사를 욕하는 멸망주의자들. 누군가 보드카를 들이켜며,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거 알아낸 놈부터 죽이자고?”
“일단은 그게 맞지 않나.”
그때 안경 쓴 멸망주의자가 목록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뭐?”
이상목록을 높이 치켜든다. 사방에 흩어져 혼자 놀던 멸망주의자가 목록을 보았다.
“이거. 우리가 빼앗죠? 저희가 확보해서 잘 지키면 이상기후도 돌아올 거 아닙니까. 못해도 기상조작무기로 활용할 수 있고요.”
“….”
멸망주의자들의 분위기가 변한다. 누군가는 턱을 쓰다듬고, 누군가는 눈을 빛내고, 누군가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탈취자가 장난감 총을 쥐었다. 푸른 문을 여는 총.
“가자. 문 열어.”
“알겠습니다.”
탈취자가 저장된 위치를 바꿔가며 방아쇠를 당긴다. 그때마다 각국의 수도와 통하는 푸른 문이 열렸다.
멸망주의자는 따로 말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나라를 골라 넘어갔다. 각자 지닌 이상異常을 무기처럼 쥔 테러리스트가 사라진 자리.
지우개를 쥔 남자 또한 한국으로 통하는 포탈로 걸어갔다.
“한국지사 정보부는 내가 가겠다. 여유가 되면 해결책을 발견한 놈도 처리하고.”
“다른 부서는 저희가 가겠습니다.”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가는 몇몇 멸망주의자까지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탈취자는 장난감 총을 매만지며 하늘을 올려봤다.
***
그리하여 현재.
서울의 어떤 산.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산자락에 위치한 정보부의 본부.
지우개가 가볍게 지나가, 거대한 우물처럼 동그란 구멍이 깊이 뚫렸다. 구멍의 바닥, 정보부 위로 햇빛이 내리쬤다.
지하의 탁한 공기가 산자락의 맑은 공기와 뒤섞인다. 맑고도 서늘한 공기.
이연우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온기가 빠져나가 차가운 손. 떨림을 주체할 수 없다.
‘지우개…!’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일단 정체부터 숨기자는 생각.
한편 멸망주의자는 절벽처럼 깎아지른 구멍 근처에서 서서, 가볍게 손짓했다. 흙더미와 대지가 대각선으로 지워지며, 가파른 비탈길이 형성되었다.
그는 비탈길 아래까지 내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가 확보한 이상개체의 위치를 말해라. 말한다면 너희를 지우지는 않겠-”
말이 멈춘다.
지하의 정보부 요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탈. 모든 정보부 요원이 다급하게 무장을 꺼내는 그때, 유일하게 하얀 종이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하나.
이상하게 눈에 밟히는 사람을 확인한 멸망주의자가 작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윽-
이연우의 얼굴을 가린 서류가 비스듬하게 지워진다. 이연우는 서류 쪼가리를 꽉 구기며, 비탈길을 올려봤다.
“….”
“….”
서로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는 거리.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챘다. 지우개를 지닌 멸망주의자와 해결책을 공개한 이연우의 시선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