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극한의 위기 상황.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며, 생각이 마구잡이로 폭주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늘어지는 시간 감각.
이연우는 흙먼지 하나하나가 느릿하게 떨어지는 광경을, 멸망주의자의 맨들맨들한 머리에 핏줄이 돋아나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수한 생각을 폭죽처럼 터트렸다.
‘지우개. 주사위. 선공해야 해. 설득 뽑기권. 설득.’
설득을 돌려야 한다. 무슨 설득을?
살려달라고? 돌아가라고? 다른 멸망주의자를 처리해달라고? 안 된다. 결국 지금의 위기만 피하는 일이다.
살려준 뒤, 돌아간 뒤, 다른 멸망주의자를 죽인 뒤, 다시 이연우를 죽이러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죽여야 해.’
숨을 들이마실 시간도 없다.
멸망주의자의 손이, 그 손에 쥐어진 지우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 천천히 밀실의 벽부터 지운다. 점차 가까워지는 삭제.
이연우는 폐에 얼마 안 남은 공기를 모조리 쥐어짜,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 저한테 탈모약이 있는데, 선물로 드릴 테니 써보시죠?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날 겁니다.”
설득 판정, 확정 성공!
힘줄이 돋아난 손이 멈추며, 지우개도 멈췄다. 이연우의 바로 옆에서 멈춘 지우개의 궤적.
“…탈모약?”
멸망주의자가 멍하니 중얼거리며 빈손으로 두피를 쓰다듬었다.
이연우는 곧바로 에코백에서 물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비탈길로 향해, 멸망주의자에게 물총을 건넸다.
“저도 탈모로 고통받았었는데, 이 탈모약 덕분에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습니다. 선생님도 써보세요.”
“….”
멸망주의자는 물총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물총을 받았다.
“머리에 뿌리면 되나?”
“예. 듬뿍 뿌리십시오. 몸에 좋은 약입니다.”
“음.”
자기 머리를 겨누는 멸망주의자.
이연우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감추며 멸망주의자를 보았다.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멸망주의자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빗물이 쏘아지며, 멸망주의자의 머리를 흠뻑 적셨다.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쭉 흘러내리는 빗물.
멸망주의자는 눈을 감고 빗물을 음미하다가 피식 웃었다.
“흥미롭군.”
으득-
목이 조금씩 늘어난다. 이연우의 눈에 희망이 들어차는 그때.
멸망주의자는 느긋하게 지우개를 들어 올렸다. 모서리를 날카롭게 세운 지우개가 정수부터 조심스럽게 직선을 긋고 내려간다.
세심한 손길. 멸망주의자를 적신 빗물이, 체내로 흡수된 빗물이 지워졌다.
‘…이게 안 통해?’
이연우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멈출 수 없다. 곧장 도박을 하기 위해 주사위를 불렀다.
‘주사위! 심장마비!’
데구르르-
주사위가 구른다. 다섯 갈래의 가능성이 멸망주의자를 중심으로 어지럽게 흔들리는 순간.
멸망주의자가 이연우를 노려보며, 지우개를 까딱였다.
“주사위였나? 가능성? 확률? 그런 걸 조작하는 이상異常? 그러면 변동하는 가능성과 확률을 지우면 끝날 일이지.”
설득을 당하면서 이미 한 번 겪은 감각.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멈칫-
주사위가 멈췄다. 어떤 결과도 내지 못했다. 확률이 모두 지워졌다.
“….”
“….”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멸망주의자는 육감에 집중해 이연우가 주사위를 굴리면 바로 대응할 준비를 갖췄다. 주사위는 지우개만큼이나 위험했으니까.
말하자면 서로가 폭탄을 쥐고 있는 상황.
확실하게, 단번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그래서 폭탄이 터지면 같이 죽는다.
이연우는 다르게 생각했다.
‘…몸싸움밖에 방법이 없어. 지우개에 걸릴 거리를 주면 안 돼.’
주사위가 힘을 잃었다. 다른 수단을 쓴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감각.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과 눈동자. 물총을 건네주기 위해 가까워진 거리를 어림짐작한다.
스윽-
한 걸음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멸망주의자는 형이상학적 감각에 집중하느라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꽉!
지우개를 쥔 손목을 붙잡았다. 이연우는 그대로 손을 위로 틀어 올리며 멸망주의자와 바짝 붙었다. 지우개의 궤적에 닿지 않게끔.
“뭐?”
몸싸움이다.
멸망주의자가 당황했다. 주사위 같은 이상개체를 지니고서, 굳이 근접격투를? 왜?
그러면서도 손에 힘을 주어 이연우를 밀어내려 시도했지만, 이연우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달라붙었다.
떨쳐내려는 사람과 악착같이 붙는 사람.
춤추듯이 휘청휘청, 비틀비틀 제자리를 돌고 돈다. 아무렇게나 휘저어지는 지우개의 궤적을 따라 세상이 지워진다.
지우개가 하늘을 가로지르니 구름이 지워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산 정상을 스치면 비뚜름하게 정상이 깎이고, 빙글 돌아 내리치는 손짓에 따라 비탈길이 지워졌다.
태풍의 눈과 같은 두 사람만이 안전한, 파괴의 중심.
이연우는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힘이, 체력이 부족해!’
조금씩 밀리고 있다. 어떻게든 손목만은 붙잡았지만, 주먹질이나 발길질에서 밀린다.
뻐억-!
복부를 얻어맞은 이연우가 확 손을 치켜들었다. 지우개가 수직으로 올라가며, 정보부부터 산까지 절반으로 쪼갰다.
지우개가 다른 곳에 사용되는 순간. 지금이 기회였다.
주사위를 부른다. 지우개를 상대할, 미래 이연우를 부른다.
‘미래의 나를 불러!’
과거에서 미래로 갔는데, 미래에서 과거로 못 올 리가 없다. 분명 가능한 일이다. 성공만 한다면, 가장 확실한 돌파구다!
데구르르-
멸망주의자가 이를 갈며 확률을 향해 손짓하지만 늦었다. 결과가 나왔다.
대성공!
지극히 낮은 확률의 가능성이 극적으로 구현된다.
주변으로 여러 사람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이연우가 지나온 분기점에서 갈라진, 평행세계의 이연우가 넷.
특전대, 악마숭배자, 멸망주의자, 골드버그 클럽으로 들어간 이연우들….
“이게 뭔 일-”
“누가 날 소환-”
인상이 다른 이연우들은 상황부터 파악하다가, 다른 이연우들과 이 세상의 이연우와 지우개를 쥔 멸망주의자를 보았다.
네 명의 이연우는 동시에 판단을 마쳤다.
“복귀! 귀환! 빨리!”
“이동! 차원이동! 아니, 복귀!”
지우개? 저런 위험한 인간이 앞에 있다?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여럿이 있다? 사고가 터져도 크게 터졌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네 개의 주사위가 동시에 구르고.
멸망주의자가 반사적으로 지우개를 열심히 까딱였다.
지워진 가능성.
평행세계의 이연우들이 말을 잃고, 멸망주의자가 필사적으로 이연우를 두들겨 팰 때.
이연우는 힘겹게 입을 열고 외쳤다.
“이상기후 해결법 아십니까?! 모르면 알려줄 테니까, 이 인간 같이 죽입시다!”
미래 이연우는 무슨 일인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이렇게 많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
평행세계의 그들은 시계수리공이 아니었다. 해결책도 모른다. 시간이 정지했을 때 이상시간학 강연을 듣지 않았기에, 저절로 시간이 재생될 때까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고.
시계수리공이 아니기에 크립티드연구동호회에 방문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연우라 다른 루트로 이상기후를 알아냈지만, 살길을 찾기에 급급한 사람들.
특전대로 들어간 이연우가 바로 움직였다. 몸싸움에 합류한 것이다.
“비켜!”
교체하듯이 팔목을 붙잡고, 때리고 맞기를 반복한다.
“죽어라!”
입술이 터진 멸망주의자가 다리에 힘을 풀고 주저앉아, 체중을 아래로 실었다. 그에 따라 뚝 떨어지는 손과 지우개.
부들부들 떨리는 지우개가 특전대 이연우의 몸통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악마숭배자 이연우와 이 세계의 이연우가 주사위를 굴렸다.
“지우개 분실.”
“지우개 이동.”
“이, 빌어먹을 놈들이!”
데구르르-
두 개의 주사위가 동시에 구르며, 열 갈래의 가능성이 어지럽게 뒤얽힌다. 지우개의 목표가 바뀌었다.
손을 바쁘게 까딱이며 확률을 지우기 바쁘다. 결국 기껏 특전대 이연우의 몸을 스친 지우개는 허망하게 확률을 지우는 데 사용되었다.
그때 멸망주의자의 뒤에서 골드버그 클럽 이연우가 소리 없이 다가가, 멸망주의자의 주머니에 금괴를 찔러넣었다.
“금괴 받았으니, 일해야죠?”
“꺼져!”
붙잡힌 손목을 거칠게 꿈틀대며 금괴의 강제력을 지우는 순간, 주사위의 확률 조작이 다시 한번 덮쳐온다.
하나가 아니다. 네 개의 주사위가 구르며, 20갈래의 가능성이 어지럽게 꿈틀댔다.
멸망주의자는 이제 확률을 지우기 급급했다.
지우개를 쥔 손은 주사위를 방어하는 데 쓰고, 다른 손으로는 어떻게든 특전대 이연우와 싸우는 데 쓰지만, 서서히 우열이 드러났다.
“골절, 뇌출혈, 장기 파열-”
“혈전 생성, 수명 감소, 기억 상실-”
“지우개 강탈, 인간 지배, 지우개 봉인-”
끊임없이 구르는 주사위. 평행세계의 이연우가 다른 사건사고를 겪으며 체득한 사용법.
멸망주의자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지우개를 무기로 쓰지 못했다.
이때, 멸망주의자 이연우가 몇 발 물러나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계의 단델리온은 살아 있나?”
“어, 모르겠는데.”
“탈출할 때 같이 탈출하지 않았나?”
“아니. 나는 그 집에서 남았다가 주사위로 탈출했는데.”
“…살아있을지도 모르겠군.”
멸망주의자 이연우는 잠시 엉망이 된 현장을 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옷에 고리를 박고, 고리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 이상개체가 화려하다. 푸른 문을 여는 장난감 총부터 자동차를 조종하는 게임 컨트롤러, 뭔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
그중 총 한 자루를 쥔다. 그가 말했다.
“도와주지.”
“어….”
총탄 명중 판정.
탕-!
총성이 울리며, 총탄이 바닥을 때린다. 확률은 지우개로 지워졌지만, 총탄까지 막을 여유는 없다.
멸망주의자가 정신 나간 눈으로 총을 보고는, 악을 썼다.
“같이 죽자!”
답이 없다. 이곳이 죽을 자리다. 지우개 하나로는 다섯 개의 주사위를 감당하지 못한다. 지우개가 없으면 그도 일개 사람일 뿐이다.
그가 지우개를 폭주시켜 자신과 일대를 완전히 소멸키려고 마음먹는 순간. 주의가 다른 곳으로 향한 찰나.
뻐억-!
특전대 이연우의 주먹이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멸망주의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특전대 이연우는 흐르는 물처럼 몸을 움직여 그대로 멸망주의자의 목을 꺾었다.
우드득- 털썩-
시체를 내던진 그가 지우개를 멀리 걷어차고는, 말했다.
“이상기후 해결법. 말해주십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