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
호텔의 어떤 방.
마크 정은 이연우와의 통신을 마치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직속상관인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단조로운 통화연결음이 이어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 여럿이 소리치는 소리를 뚫고, 피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무슨 일인가?
“이사님, 이연우에게 임무를 전달했습니다.”
- 알았네.
곧바로 끊어지려는 통화. 마크 정이 핸드폰을 입에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이연우가 방주의 자리를 원하고, 또 방주에 방문하기를 요청했습니다. 불청객의 소식에 겁을 먹고 살 방법을 마련하는 듯한데. 어떻게 할까요?”
- …방주?
이사가 중얼거린다. 아리송한 목소리.
- 방주는 나도 모르는데. 어쩌면 알았지만,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르고. 애초에 멸종방어장치는 관계자 말고는 존재조차 모르는 게 정상이야.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 …이연우의 자리는 내가 제안을 넣어보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방문은 불가능하다고 전하게.
마크 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며, 한 손으로 이연우에게 보낼 메시지를 치기 시작했다. 한 글자씩 천천히 만들어지는 메시지. 방문 불가.
입으로는 다른 사소한 사항을 보고했다.
“아, 그리고 한국지사가 좋은세상만들기라는 단체를 해체하고, 그곳의 이상개체를 회수-”
- 이름이 뭐라고?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 마크 정은 바로 답했다.
“좋은세상만들기라고, 이상개체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 하하. 웃기는군.
“예?”
피로에 찌든 이사의 목소리에 활기와 재미가 차오른다. 마크 정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도, 이사는 혼자 웃기 시작했다.
- 이상개체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니. 진짜 좋은 세상은 이상異常이 없는 세상인데.
이사의 웃음소리만 맴돈다.
이상異常은 셀 수 없이 많고, 그 특성도 서로 다르다. 그걸 하나하나 대응하기란 힘들 수밖에 없고, 결국 어디선가는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회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세상은-
돌연 핸드폰 너머에서 흥분이 가득한 고함이 들려왔다.
- 됐다! 뚫었다! 그렇지! 사람인 이상 반응속도랑 처리용량에는 한계가 있어야지!
- 이게 사람인가? 이 정도 숫자를 동원하고도 대부분 막혔다고?
“이사님? 무슨 일입니까? 아, 제가 알면 안 되는 사항이면-”
- 큰 비밀은 아니야. 불청객의 탐색에 일부 성공했어.
서로 다른 온갖 탐색수단 하나하나마다 대응하던 불청객과 수를 주고받으며 얻은 데이터.
그리고 이연우가 지우개를 상대했던 방식과 같이, 숫자로 밀어붙여 상대의 처리능력을 뛰어넘는 방법.
그리하여 얻어낸 처리능력의 한계와 불청객의 정보.
이사가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 이제 더 바빠지겠어. 이 많은 탐색수단을 막은 능력이…. 자네도 고생하게.
끊어진 통화. 마크 정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일…. 쉘터에 가구를 바꿔야 하는데.”
이연우에게 방주를 방문하기는 힘들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마크 정은 이불과 침대 따위의 이상개체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그의 일이었으니까.
***
어느 햄버거집.
직원을 ‘설득’해 햄버거를 받아낸 미래의 이연우는 구석자리에 가 앉아,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공장의, 문명의 맛.
“이거지.”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단번에 햄버거 세 개를 해치운 그는, 콜라를 마시며 핸드폰을 툭툭 두들겼다.
회사의 정보망에 접속한 핸드폰.
그는 우선 이상기후를 어떻게 해결하고,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따위를 보다가, 순간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지우개가 이렇게 죽었다고? 이걸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때 괜히 거부했어.”
평행세계의 이연우들에게 당했다는 보고서를 한참 보던 그는 문득 눈을 감았다.
‘지우개….’
지우개는 그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를 한 번 죽였으니까.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때의 기억은 깊은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 되었다.
이상기후로 멸망한 세계를 헤매다가, 간신히 찾아간 쉘터. 어찌어찌 관리자를 설득해 입주하자마자, 천장이 날아간 쉘터.
-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모두 죽어야지.
미친 소리와 함께 크게 내리그어진 지우개와 그 궤적에 걸린 자신의 몸뚱어리.
더듬더듬
문득 이연우가 머리와 가슴팍을 매만졌다. 온기가 느껴지는 인간의 피부지만, 가능성을 끌어올렸을 뿐, 실상은 확률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졌다.
“…살아있으면 됐지.”
죽은 뒤 살아나서, 몸의 절반이 이상異常으로 대체되어, 주사위와 한 몸이 되고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을 얻었다.
그렇게 미래의 이연우는 확률을 쏟아붓고, 지우개는 확률을 지우는 싸움이 일어났고, 끝내 더 높은 출력으로 이겨내지 않았나.
‘순수한 인간의 몸보다는 이게 생존에 도움이 되잖아. 나쁘지만은 않은 죽음이었어.’
미래 이연우는 포장한 햄버거 봉투를 주워 든 후,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남은 콜라와 종이 쓰레기 따위를 분리수거 통에 쏟아붓던 중이었다.
“….”
그가 문득 멈췄다. 그는 콜라를 쏟다 말고 자신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
“못 막았네.”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능성을 툭툭 튕겨내던 중, 한순간, 파도 같은 가능성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언뜻 느낀 것만 해도 원격 초상화, 황금만능주의, 맵 핵, 리모트 뷰잉, 오라클 시스템, 추적자, 빅 브라더의 악마 등등….
서로 다른 의도를 품은 데다 전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이었기에, 단번에 쳐내지 못했다.
몇 가닥의 가능성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현실로 이루어졌다.
“저기요. 다 치우셨으면 비켜주실래요?”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재촉한다. 미래의 이연우는 그를 힐끗 보며 손가락을 튕기려다가, 생각을 바꿔 얼른 뒷정리를 마쳤다.
곧바로 햄버거집을 떠나는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멀쩡한 세상은 위험해.”
뭐가 상대든 1대1로 맞붙는다면 살아남을 자신이 있지만, 멀쩡한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사든 집단이든 최소 두 명씩은 뭉쳐 다니는 이유가 있다.
방심을 한다면, 허점을 찔린다면, 기습을 당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개체도 당할 수밖에.
“정신 차려. 방심하지 마. 멀쩡한 세상의 저력은 잘 알잖아.”
꽉, 주먹을 쥐기 무섭게 그가 사라진다.
***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상황실에 앉아 있는 이연우는 생각을 정리했다. 미래 이연우를 알릴지 말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마침 방주에 방문하기는 힘들다는 메시지까지 받았다. 하루밖에 안 지났지만, 중간보고 겸 호출할 만하다.
고개를 들며, 주사위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이연우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미래의 이연우가 햄버거 봉투를 들고 서 있다. 이연우의 입에서 당혹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도 채 안 지났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회사에서 어느 정도 내 정보를 알아냈어.”
“아니, 어느 정도나요?”
이연우가 몸을 바짝 당겼다. 정보가 이상하게 노출되면, 지금의 자신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이 향할지 모른다.
생김새나 능력 자체가 똑 닮았지 않나. 어쩌면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여겨질지도 모르고.
미래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그거 알아보려고 들어가는 순간, 더 많은 정보를 들킬걸.”
이상異常을 활용한 정보전이다. 미래 이연우가 탐색에 나서 방어가 헐거워진 순간, 온갖 이상개체가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다.
이연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방주 찾기는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연우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협조를 구하는 게 어떻습니까?”
“안 돼.”
단호한 대답.
미래 이연우가 눈을 살짝 피했다.
“난 밀입국자야. 그래, 사고 치지 말자, 이렇게 넘어가지 않아. 조사받을 거야.”
“조사받으면-”
“안 돼. 회사가 얼마나 철저한데. 이상異常이 작용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어느 정도나 진실인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온갖 장비로 도배한 뒤 조사해. 질문은 또 얼마나 많은데.”
확실히, 꺼려지기는 한다. 하지만 무조건 피할 만한 조건도 아니다.
이연우가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미래의 이연우가 더는 말하기 싫다며 손을 내저었다.
“밝히기 힘든 과거가 있어. 피난선만 봐도 그래. 내가 대실패 띄워서 모조리 망했잖아. 내가 살겠다고 못된 짓도 조금 했고. 그보다, 조사는 좀 됐나?”
서둘러 말을 돌리는 미래 이연우의 모습에, 함부로 파고들기 싫은 이연우가 대답했다.
“방주 방문 요청은 거절당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흐린 말끝처럼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고장 난 시계를 다루는 연구소장에 물어봐도, 멸종방어장치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미래 이연우는 턱을 쓰다듬다가, 지나가듯 가볍게 말했다.
“안 되겠다. 시간이 없어. 속전속결로 치고 나가자.”
“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더 시간 끌면 위험해.”
온갖 벌레가 꼬일 것이다.
다른 세계의 멸망을 보고 배우려는 멸망주의자, 보기 힘든 소재에서 영감을 얻으려는 예술가, 인류를 지키려는 회사, 재미를 느낀 악마, 사회유지를 위한 혹은 돈벌이를 위한 골드버그클럽.
하나를 상대하면 둘이, 둘을 상대하면 넷이, 넷을 상대하면…. 끝없이 증가하는 위험.
더는 생각하기도 싫어진 미래의 이연우가 진저리를 치다가, 덥썩 이연우의 목을 붙잡았다.
회사가 정보전 따위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이 안전한 기회다. 목적은 방주의 정체와 위치를 확인하여, 인식하는 것뿐이니까.
“가자. 최후의 쉘터부터 털어보자고.”
“저는 갈 필요 없지 않습니까?”
반면 이연우에게는 나쁜 상황이었다. 정말 가기 싫어, 절실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회사를 공격하는 일에 함께하면, 앞으로 어쩌라는 말인지.
“능력도 안 되고, 그냥, 저는-”
“너는 토템이야. 너한테는 방주를 찾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너를 데리고 다른 확률 높은 것들을 찾아가면 단서는 찾을 수 있겠지.”
“아니, 이러면 나는 어쩌라고-”
이연우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주먹을 꽌 쥔다. 한순간에 바뀌는 세상 속에서, 울상을 지은 이연우는 문득 의문을 품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살았지 않나? 회사의 조사과정을 어떻게 저렇게 상세하게 알지? 그리고, 방주를 찾아 방문한 세계가 여기 하나뿐일까?’
섬뜩한 위험이 느껴진다.
이렇게 끌려가 회사에 해를 끼치는 현장에 함께하는 것도. 미래의 이연우가 조사를 피하는 이유도.
‘이러면 나도 마냥 협조하지는 못하지.’
이연우의 눈이 가라앉고 살길을 찾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