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84)화 (84/194)

의뢰

생존본능이 꿈틀댄다.

미래의 자신이고 이상기후 해결법을 주었기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놓았지만, 한번 경계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다른 관계를 모두 배제하고 남는 것은, 위험레벨 6이나 7쯤 되는 이상개체다. 그게 자기 옆에서, 자신을 강제로 끌고 다니고 있다.

‘회사에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리고 우선 이 인간, 아니, 인간인가? 어쨌든 미래의 나를 분석부터-’

고속으로 회전하는 생각이 문득 멈췄다.

한순간 뒤바뀐 세상. 어딘지 모를 산맥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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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저물어가는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고, 얼룩처럼 흐린 구름이 어두운 하늘에 녹아들었다. 그 아래에는 산등성이로 위장하다 만 건물이 있다.

“여긴.”

장관에 말을 잃은 이연우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돌연 불어닥친 차가운 공기에 폐까지 얼어붙은 느낌.

거기에 핑, 시야가 이지러지고 두통이 머리를 쑤신다. 귓구멍으로 물이 들어간 듯 먹먹해지고, 주르륵, 코피가 흘러나왔다.

이연우는 손바닥으로 코피를 닦으며, 탁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몸이 왜. 독? 방사능? 뭡니까? 왜 나를 이딴 곳으로 데려왔습니까?”

선명한 위험을 느낀 이연우가 눈을 시퍼렇게 번뜩이며 노려보자, 미래의 이연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약해? 고산병도 못 버텨?”

고산병. 고지대로 갑자기 올라갔을 때 나타나는 증상.

“아니, 그걸 어떻게 버팁-”

이연우는 말을 하다 말았다. 빗물의 활력이 뿜어지며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고산병은 물론, 한기조차 밀어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붉은빛이 어린다.

“버틸만하네요.”

“이 정도 문제는 이겨내야지. 이런 사소한 것도 못 이겨내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잔소리 같은 말에 이연우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말을 돌렸다.

“저기가 최후의 쉘터입니까?”

크립티드연구동호회에서 나무인간이 보여줬던 미래와는 사뭇 다르다.

“어. 완공하지는 못했나 본데.”

미래 이연우가 보았던 멀쩡한 쉘터도 저렇게 엉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산맥에 존재하는 산등성이가 되어, 어딜 봐도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상기후 때문에 환경도 달랐고.

“이상기후를 빨리 물리쳐서 위장작업을 마무리하지 않았나.”

혼자 중얼거리는 미래의 이연우를, 이연우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보다, 저기 들어가기 전에 저부터 위장이나 해주십쇼. 당신 돌아가도 저는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건 안-”

미래 이연우는 단번에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연우의 불만 섞인 눈을 보고는 생각을 고쳤다.

‘…위험한데? 지금도 많이 몰아붙였어. 여기서 더 위험하게 만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위험한 일에 끌고 왔다. 거기에 피까지 봤다. 그게 코피에 불과해도, 생존본능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미래 이연우가 툭툭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안 되지만, 내가 다른 방법을 생각했어.”

“무슨 방법 말입니까?”

“내가 널 협박해서, 아니면 정신지배해서 끌고 다니는 모양새를 만들면 되잖아.”

동시에 미래의 이연우가 항상 쥐고 있던 가능성을 풀어놓았다. 잃어버린 절반의 육체가 인간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촤르륵-

인간의 형상이 무너진다. 확률과 가능성의 실타래가 단번에 풀려나며, 괴물과 같은 형상이 드러났다.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알겠습니다.”

이연우의 눈빛과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안 놀라네?”

“저번에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내가 보여줬다고?”

미래의 이연우는 실타래가 짙게 뭉친 절반의 얼굴을 갸웃거리는 듯하더니, 몸을 돌렸다.

‘주사위를 지녔는데 알아볼 수도 있지.’

척박한 산맥. 두 사람은 쉘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걷던 이연우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정신지배는 안 합니까?”

“누구? 너?”

“예. 그게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미래 이연우의 생각과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 던진 질문.

미래 이연우가 픽 웃는 소리를 내더니, 실타래들이 일렁인다.

“정신지배하면 주사위가 꾸준히 저항 굴릴걸. 주사위는 나도 못 건드려. 혹시 저항에 성공하면? 네가 가만히 있을까?”

“아뇨. 가만히 안 있죠.”

정신을 지배당했는데 얌전히 있을 리가.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목적이 나 자체고, 언제든 어디든 쫓아와 해를 끼치려는 적이라면.’

굳이 정신지배하지 않아도 도울 거라며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상대를 제거할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문제는, 그 속내를 서로가 너무 잘 알기에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너랑 싸우면?”

“당신이 이기겠죠. 전 죽고요.”

그리고, 이연우와 이연우가 싸우면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적의를 품은 이연우는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 어떤 위험을 어떻게 가져올지 모르니까.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상대가 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더욱더.

“네가 죽은 다음은?”

“그야 부활 판정…. 아.”

이연우도 어렴풋이 최선의 결말을 떠올렸다. 부활하면서 주사위와 한 몸이 되면, 미래 이연우도 상대할 수 있다.

미래 이연우는 최악의 가능성을 가정했을 뿐이었다.

“일이 잘못 풀리면, 너무 위험하지.”

저벅저벅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걷기만 했다. 이연우는 고개를 살짝 낮췄다. 생각에 잠긴 눈.

‘그래도 수단 몇 개 정도는 마련해둬야 하는데. 자살하고 부활 판정 굴리겠다고 협박하면 통할까? …안 통하지.’

자신도 못 믿을 위협. 이연우는 부활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최후의 쉘터 입구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미래 이연우가 실타래 몇 개를 건져 올리더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들어가자. 최하층까지 갈 거야.”

***

최후의 쉘터.

이상기후로 인한 멸망을 대비하여 1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게끔 건설했지만, 이상기후가 물러난 후에는 쉘터 관리 인원 몇만 남아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회사의 가장 최신식 건물답게 미래적이고 화려한 건축물은 쉘터다운 답답하고 밀폐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왔는데도, 도리어 호화로운 미술관에 들어온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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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는 자신의 상황도 잊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최후의 쉘터를 구경하다가, 간신히 감탄 섞인 탄성을 뱉었다.

“이게 쉘터라고요?”

“말이 쉘터지. 사실상 도시로 봐야지.”

최후의 쉘터 내부를 돌아다니는 회사원은 ‘설득’하여 지나치면서, 그들은 최하층의 컨트롤 룸을 향해 나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기도 하고, 구석에 주차된 차를 몰고 달려 나가기도 하고.

지나치는 장소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기능적이다. 이연우는 눈을 반짝이며 최후의 쉘터를 둘러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놀러 온 게 아닌데, 뭘 하고 있는 거야.’

미래 이연우를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래 이연우는 너무 위험하니 안 건드리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혹시 방주를 못 찾는다면. 그래서 미래 이연우가 미치지는 않더라도 화풀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미래 이연우가 이연우를 성가신 폭탄으로 보듯, 이연우도 그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으로 보았다.

“…그건 뭐 하는 겁니까?”

장소가 바뀔 때마다 미래의 이연우가 실타래를 툭툭 건드린다. 몇 가닥의 실타래는 한 손에 쥐고 있고, 손을 휘둘러 무언가를 멀리 쳐내는 시늉을 한다.

미래 이연우는 실뭉치 같은 머리를 까딱였다.

“보안 시스템 속이고, 통과하고, 그런 거. 날 탐색하는 뭔가도 막아내고 있고.”

매우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에, 이연우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미래 이연우를 관찰하였다. 오직 자신의 힘만을, 주사위의 힘만을 사용하는 모습을.

***

SF영화의 우주선에서나 볼 법한, 검은색의 광택을 내뿜는 문.

“이 문만 지나면 상황실이야.”

미래 이연우는 조금 긴장했는지, 너울거리던 확률의 실타래가 직선으로 꼿꼿하게 섰다. 마치 고슴도치 같은 모양새.

그 긴장은 이연우에게도 전염되어,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위험합니까?”

“감당할만한 위험인데.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어서.”

“…그러면 당신 먼저 들어가서 안쪽 정리하시죠. 안전해지면 들어가겠습니다.”

괜히 위험에 휘말릴 생각은 없다. 다른 의도도 있고.

미래 이연우도 이제는 이연우를 조심스럽게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짤막한 한숨만 쉬었다.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다.

“어휴.”

스르륵-

풀려나간 실타래가 문을 뚫고 지나가더니, 미래 이연우가 문 너머로 사라진다.

‘갔나?’

이연우는 황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두두두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관총처럼 화면을 난타하는 손가락.

- 불처객에 납치. 의도 파악. 방중 정보 언함. 자기 세상 방주를ㄹ 찾아 깨우 재건하겟.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안전하게, 평화적으로 지금 상황을 풀어가기 위한 메시지.

다급하게 두드리느라 오타가 난무한 메시지가 회사 정보망을 통해 마크 정에게 전송됐다.

그때, 단단하게 닫힌 문이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너머에는 미래의 이연우가 인간 같지 않은 형상을 하고 있다.

“끝났어. 들어와. …핸드폰은 왜 들고 있어?”

“연락 온 거 확인하고, 시간도 보려고요. 저 밥 먹을 시간인데 그 햄버거 좀 먹으면 안 됩니까?”

미래 이연우가 포장해온 햄버거를 슬쩍 가리키며, 이연우는 핸드폰을 자연스럽게 넣는다.

미래 이연우의 얼굴 부분이 얼른 좌우로 움직였다.

“이건 내 거야. 배고픈 건 조금만 참아. 얼마 안 걸려. 돌아볼 곳이 얼마 없어.”

“그 햄버거 먹고 싶은데요.”

“네 돈으로 네가 사 먹어.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미래 이연우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렸고, 이연우는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눈동자에는 빛을 품었다.

‘둔해.’

옆에서 보면서 느끼고 확신했다. 압도적인 강자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일까. 생존본능이 자신보다 둔하다.

굳이 위험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건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서라고 쳐도 그렇다.

‘주사위의 힘 하나만 믿고 움직인다고? 확률과 가능성만 신경 쓴다고?’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 그와 반대로, 미래 이연우는 만능에 가까운 힘을 쥐었기에 필사적으로 살아남는 본능이 무뎌졌다.

‘이러면 상대할 만하지.’

이연우가 속내를 숨기며 미래 이연우를 쫓아 상황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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