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도심의 한적한 골목에는 건물 벽을 따라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푸른 들판 위를 뛰노는 동물, 토끼, 사슴, 고양이, 강아지 등등….
조각상은 그림 하나하나를 살피며 천천히 걷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물 동산에 어울리지 않는, 큼직한 문 하나. 갈색으로 대강 칠해진 이 나무 문 그림이 바로 예술가협회의 은신처로 들어가는 문이다.
조각상은 주변을 둘러보며 인적을 확인하더니, 성큼 그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변하는 세상.
미술관 느낌의 건물 내부.
“오셨습니까. 협상은 잘 됐나요?”
직원의 머리가 불쑥 데스크 위로 올라왔다. 뭘 만들고 있었는지 페인트가 잔뜩 묻은 직원은 조각상을 힐끗 보았다.
조각상의 어두운 기색.
“아니요. 헛걸음만 했습니다. 회사는 지우개를 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회사가 그렇죠, 뭐. 위대한 예술을 창고에 처박아두기만 하는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조각상이 작은 한숨을 흘렸다. 처음부터 접근 방법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조각상은 몸을 돌려, 공간예술실2로 향했다.
“너를 위한 노래 좀 쓰겠습니다.”
“예. 예술 활동이라며 멋대로 고쳐 만들지 마시고, 파괴가 예술이라며 부술 거면 당장 돌아가시고, 아무튼 유의사항 지켜주세요.”
성의 없이 설렁설렁 말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공간예술실2로 들어갔다. 이동 용도의 공간예술실1과 달리, 통신을 위한 것들을 모아둔 전시실.
편지지나 거울이나 텅 빈 캔버스, 점토 반죽 따위를 지나친 조각상은, 따스한 조명 아래 놓인 마이크를 쥐었다.
입술 앞에 댄 마이크를 향해 말하기 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그의 창조자. 입이 열렸다.
“주인님, 협상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강탈밖에 없습니다. 차후 방침을 정해주십시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마이크로 흘러 들어갔다. 그 목소리는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되어, 조각가의 귓가에서 울릴 것이다.
조각상은 잠시 그 상태로 기다렸다.
스슥, 깃펜으로 글을 쓰는 소리가 날 때까지.
편지지에 글자가 쓰이고 있다. 조각상은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편지지 앞에 서, 고개를 숙였다.
[나의 가장 사람다운 작품에게.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거대조각상을 만들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나.
지우개 관련 정보는 내가 친구들에게 부탁해 알아보겠네. 또한 기사와 전투용 조각상과 도둑질용 조각상을 보내주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움직이게.
조각가가.]
조각상의 시선이 마지막 글자까지 읽었다. 편지지의 글자들이 저절로 사라졌다.
조각상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었고, 쿵쿵,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공간예술실2를 나갔다. 전투를 준비할 시간이다.
***
그날은 어두운 밤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밤.
이연우는 쉘터의 방에서 숙면을 취하다가, 연신 울려대는 벨 소리를 듣고 깼다.
“뭐, 뭐야….”
힘겹게 눈을 뜬 이연우가 핸드폰을 보았다. 시간은 자정을 지났다. 그런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심상치 않은 상황.
이연우가 얼른 전화를 받기 무섭게,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이연우 조사원! 지우개를 강탈당했습니다!
“…그래서요?”
- 이연우 조사원은 그 멸망주의자도 죽이지 않았습니까! 얼른 출동해서 회수를 도와주십시오! 지우개에 대처할 만한 전력이 지금 당신 밖에-
“안 해요.”
이연우는 전화를 뚝 끊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돌아누웠다.
‘지우개를 내가 왜 상대해.’
다른 건 몰라도, 지우개는 진짜 아니다. 그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대성공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한 번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거기에 조각상 만들고 돌려준다는데.’
산맥이 생물이 되어 움직이면 위험하겠지만, 그 정도는 회사가 처리할 것이다.
이연우의 눈이 스륵 감겼다. 그러나 핸드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쉴 새 없이 울었다. 도무지 잠들 수 없게끔.
결국 이연우는 벌떡 일어나,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안 한다고요. 조사원 업무도 아니고, 억지로 업무로 던져도 특수조사원 권한으로 무시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 어디 소속입니까? 이상감사 한번 받고 싶어서 이럽니까?”
- 그러면 이거라도 알아두십시오.
“뭐요?”
짜증과 분노가 그득 담긴 목소리.
핸드폰 너머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이연우 조사원도 공격 목표입니다.
“…제가요? 왜?”
- 지우개를 든 멸망주의자를 죽였지 않습니까. 예술가협회 쪽에서 당신을 가장 큰 방해요인으로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쉘터에 붉은 등이 들어왔다. 웨엥 울리는 사이렌. 침입자를 감지했다는 뜻.
이연우가 벌떡 일어서며 상황실로 서둘러 달렸다. 흔들리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친다.
“지우개 탈취당한 정보를 보내주십시오!”
- 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회수작전에 합류하는 편이-
“늦었습니다. 이미 습격자가 왔습니다. 지원 요청합니다.”
쾅, 문을 열고 들어간 상황실.
이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CCTV 화면을 보았다. 비가 내리는 지상. 어두운 밤. 흐릿한 화면에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이연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적은 두 명. 하나는 협상하러 왔던 조각상입니다. 다른 한 명은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조각상이 철조망을 뜯어내고, 뻥 뚫린 구멍으로 두 명이 걸어들어왔다. 점점 집과 가까워진다.
생각이 빠르게 흘렀다.
‘맞설 준비를…. 아냐. 방해 안 한다고만 말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싸울 일은 피하는 게 낫다. 무슨 이상異常을 어떻게 쓸지 모르니까.
- 침입자 정보 파악하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예, 일단 이쪽에서 대응하겠습니다.”
이연우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는 서둘러 마이크를 잡았다. 스피커가 달린 집 앞까지 왔을 때, 대화로 풀면 된다.
CCTV를 돌려가며 침입자를 추적하던 이연우는, 마침내 지상의 집 앞에 도착한 침입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집의 정문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 끔찍해! 어떻게 집이 이럴 수가 있지? 이건 아니야!
- 그런 건 모르겠군요. 그 조사원이 당분간 못 나오게만 막아주십시오.
- 부탁하지 않아도 할 거야! 이건 도저히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
빗소리와 섞여 들려온다. 그쯤에서 이연우가 후후 마이크를 불었다.
“들리십니까?”
- ….
- ….
CCTV로 보이는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쪽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십시오. 지우개가 누구 손에 있든 나한테 휘두르지만 않으면 됩니다.”
- …확실히 당신 성격에 맞는 행동이긴 하군요. 좋습니-
- 안 돼! 이걸 본 이상 그냥 돌아갈 수 없어!
조각상이 당황한 몸짓으로 옆의 인간을 보았다. 깔끔한 인상의 중년 남자는 폐가에 가까운 집을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 건축도 예술이고, 인테리어도 예술이야! 이런 쓰레기로 둘 수 없어!
이연우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보아하니 건축 계통 예술가 같은데.
예술가란 인간들은 하나 같이 머리에 나사 몇 개가 빠졌다. 옛날에 마주쳤던 감독이나 지우개를 강탈하는 조각가나.
이연우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헛짓거리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습니다. 그쪽도 굳이 저랑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돈도 안 받아주지. 작은 인테리어 하나로 사는 재미를 더해줄게.
건축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순간 이연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내 쉘터에 뭔 짓을 하려고! 안 되지! 주사위!’
멀쩡하고 안전한 쉘터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 위험한 이상異常이 더해지게 놔둘 수 없다.
‘저 인간이 하는 짓 막아!’
주사위가 구른다.
데구-
한창 주사위가 구르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한 감각. 이연우의 동공이 잔뜩 확장되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끔찍한 불안이 정신을 옭아맸다.
‘뭔가 잘못됐어!’
본능이 경종을 울려댄다. 끔찍한 사고가 벌어질 거라고.
이연우는 늘어진 시간 속에서 주사위가 느릿하게 구르는 광경을 보았고, 끝내 운명처럼 찾아온 결과를 보았다.
대실패!
건축가가 만들던 이상이, 건축가의 손을 벗어나 폭주한다.
***
쉘터와 지상의 집과 부지 곳곳에 문자가 쓰였다.
██하면 죽는 집.
까맣게 칠해진 글자는 이상하게 인식을 벗어낫기 때문에, 조건이 하나인 건 알아도 몇 글자인지는 가늠도 되지 않는다.
이연우는 손을 벌벌 떨며 문자를 노려봤다. 지금 상황을 믿기 싫었지만, 경종을 울리는 생존본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침착해.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은 머리가 쌩쌩 돌아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심장 뛴다고 죽지 않았고, 살아있으면 죽는 것도 아니야. 호흡도, 생각도, 눈 깜빡임도 괜찮아.’
사소한 행동 하나가 죽음과 직결되는 상황.
이연우는 조각상이 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시야를 넓게 두어 정보를 얻을 뿐.
CCTV 화면은 계속해서 시야 안에 있었기에, 화면을 본다고 죽는 건 아니었다. 이연우는 바깥에 있는 침입자를 보았다.
- …좆됐다.
- 뭡니까? 뭘 했습니까?
집 표면과 부지 곳곳에 쓰인 문자.
건축가와 조각상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작게 대화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말해도 되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도 되고.’
이연우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들을 보며, 마이크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들에게 따지고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다.
‘마이크를 썼다고 죽을지도 몰라.’
미칠 것만 같다. 미친 인간이 등 뒤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언제 총을 쏠지 모르는 상황이다.
식은땀이 주르륵 손바닥에 맺혔다. 본능적인 신체 반응.
‘식은땀을 흘렸다고 죽지도 않고. 사소한 조건은 아닌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 몰라. 나는 죽음의 함정 몇 개만 설치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손을 벗어났어.
- 취소 못합니까? 덮어씌우거나.
- 못해. 그리고 그런 짓했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쯤에서 이연우는 문득 결론을 내렸다.
‘…생각보다 별일 아닌가?’
조건이 하나인 건 확실하다. 그러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주사위를 굴리거나 이상개체를 사용하는 게 조건이라면.’
무슨 행동을 해도 상관없다.
‘주사위와 이상개체가 조건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다가, 미리 준비해둔 주사위로 방어하면 된다.
‘주사위. 내가 조건을 어겨서 죽을 일이 생기면, 저항 굴려줘.’
물론 주사위만 믿을 수는 없다. 실패라도 뜨면. 지금처럼 대실패라도 뜨면….
일단은 자기 힘으로 조건을 찾아보려는 이연우는 조심스럽게 마이크 앞으로 입을 갖다 댔다.
‘생각해보면 마이크는 괜찮아. 저쪽 목소리가 마이크로 넘어오고 있잖아.’
이연우는 침착하게 말했다.
“듣고 있습니까? 지우개부터 이쪽으로 가져오십시오. 바깥에서부터 집을 지우면 우리 모두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