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지우개로 외곽부터 집을 지우면 문제없이 해결하고 나갈 수 있다. 이연우의 합리적인 제안에, 조각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내가 이 자리에서 파괴되더라도, 지우개는 줄 수 없습니다. 주인님께 손해가 되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빨리 지우개 가져와!
- 당신이 저지른 짓 아닙니까. 책임지십시오.
-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라니까!
이제는 자기들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침입자 둘.
이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친다. 그중 쓸만한 아이디어.
‘나 때문에 폭주한 건 모르고 있어. 적당히 허세 부려서 협박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까맣게 칠해진 문자를 보고 혹시 몰라 주사위를 준비한 후, 차가운 목소리로 섬뜩한 살기를 드러냈다.
“내 집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수습도 안 하겠다고? 좋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협박을 하겠습니다.”
- 어떤 협박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를 조사했다고 말했었죠. 그럼 내가 무슨 이상개체를 지니고 있는지도 알 겁니다.”
주사위.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상황을 뒤바꿀 수 있는 최후의 한 수이자, 상대를 위협하거나 설득할 때 큰 힘을 발휘하는 근거.
문득 두 침입자가 다툼을 멈추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도 기본적인 정보는 알았다.
“조각가한테 그렇게 충성하는 모양인데. 당장 지우개 안 가져오면 조각가의 팔을 터트리겠습니다.”
- 상관없습니다. 그 정도는 복구할 수 있습니다.
조각상은 개의치 않았다.
예술가협회는 규모만 따지면 상당히 크다.
서로 협력하는 일이 드물고 때때로 자기들끼리 예술을 두고 싸우느라고 단합력은 없지만, 보유한 이상개체가 많았고, 이사는 제법 큰 영향력을 지녔다.
거기에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라 어지간한 피해는 쉽게 복구할 정도.
하지만 이연우는 주사위가 있었다.
“심장마비, 뇌출혈, 온갖 질병과 사고. 이것도 전부 회복할 수 있습니까?”
- 그 정도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술을 다시는 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면? 정신을 비틀거나, 감각을 빼앗거나, 조각을 증오하게 만들거나, 백치로 만들거나. 더해볼까요?”
- ….
“아, 이것도 복구한다고? 그런데 내가 한 번만 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끝도 없이 나오는 협박에 끝내 조각상의 입이 다물렸다. 지속적이고 다양한 위협. 조각상이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빠졌다.
‘주인님은 신경도 안 쓸 거야. 시련은 영감을 더해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하지만.’
위험이 너무 크다. 물론 그런 짓을 하다가 집의 조건을 충족해 이연우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방어할 가능성도 높다.
결국 조각상이 카메라를 보았다.
- 어쩔 수 없군요. 지우개를 가져오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일로 인한 원한은 잊어주십시오. 제가 목숨 걸고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협상이 이루어졌다.
조각상은 목숨을 걸고 건축가의 핸드폰을 빌려 연락을 돌렸고, 건축가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눈치를 봤으며, 이연우는 그들을 관찰하며 안전한 행동을 가늠했다.
***
지우개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연우는 ██하면 죽는 집이란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온 정신을 집중해, 인식에서 벗어난 ██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인식왜곡. 내 정신력으로는 못 뚫겠어.’
어떻게 조건을 알아낼 수 있을까, 시도해봤지만 안 된다. 보면 볼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결국 이연우는 한숨을 흘렸다. 생존본능이 꿈틀거리며 불길한 상상만 더했다.
알 수 없는 조건. 사람을 죽이는 트리거.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다. 물을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잠을 자면 죽을 수 있고, 심장이 십만 번 뛰었다고 죽을 수 있고, 문을 열었다고, 집을 나갔다고….
‘적당히 생각하자. 이대로면 미칠지도 몰라.’
생각하면 할수록 피폐해지는 정신. 주사위를 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스릴 때.
건축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으…. 폐가에 사는 선생님. 제가 잘못, 하지는 않았지만 실수가 있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이연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CCTV 화면을 보았다. 지금 놀리나?
카메라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건축가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각상에게 했던 협박을 듣고 제대로 겁을 먹은 표정.
- 제가 3번! 3번의 의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무료로요! 이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 아십니까?
“….”
이연우는 따로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욕을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인간들…. 진짜 예술가 쪽하고는 엮이지 말아야지.’
적으로 만나기는 당연히 싫고, 동료로 만나기도 싫다. 사고방식이며 행동양식이며 일반적이지가 않았다.
이연우는 신경을 끄고, 회사에서 보내온 영상을 보았다.
지우개를 강탈당할 당시의 영상.
- 돌진하라!
거대한 화폭에서 튀어나온 조각상의 군세가 어느 건물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사자, 기사, 말 탄 기사, 괴물 등등 그 숫자가 백은 넘는다. 두두두, 땅이 진동했다.
- 쏴!
건물 입구에 진을 친 보안직원들이 테이저 건이며 총을 쏘았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번개 뱀을 몸에 휘감은 채로 달려오고, 팔이며 다리가 부서져도 멈추지 않고 달린다. 끝내 좁혀진 거리.
으아악, 비명이 메아리쳤다. 사자 조각상에 깨물리고, 기사의 검에 목이 날아가고, 괴물에 밟혀 죽고.
그때 지우개를 든, 좋은세상만들기의 공장에서 보았던 요원이 손을 치켜들며 나섰다.
- 비키십쇼!
지우개가 그어진다. 그 궤적. 길가와 건물 입구를 가득 메운 조각상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연이어 휘두르는 손짓에 거리가 텅 비어갔다.
가로수가 지워지고, 아스팔트 도로가 벗겨지고, 몸통이 사라진 가로등이 뚝 떨어지고, 조각상 몇이 가까스로 피하고, 신체를 잃어버리고.
하지만 이연우는 탄식을 뱉었다.
‘경계를 저렇게 안 하면….’
지상의 조각상을 지우겠다고 숙인 고개와 아래를 향한 시선.
그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조각상.
푸드덕, 독수리 조각상이 헬멧 전면을 가리며 달라붙었고, 허공에서 툭툭 떨어지는 벌레 조각상들이 요원의 전투복을 파고든다.
순간 요원이 머뭇거렸다. 지우개를 잘못 휘두르면 자신까지 지워진다.
그 빈틈을 노리고 하늘에서 조각상 몇이 더 떨어졌고, 가위처럼 생긴 벌레 하나가 요원의 손목을 댕강 잘랐다.
지우개가 손과 함께 바닥을 구른다. 지우개는 곧 비둘기 조각상이 낚아채서 가져갔다. 진짜 비둘기처럼 채색한 조각상이 순식간에 화면 밖으로 벗어났다.
그걸로 영상은 끝이었다.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 멸망주의자였으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숙련도나 감각이나 여러모로 말이다. 단순하게 봐도, 벌레가 몸에 붙은 순간 벌레만 지웠을 것이다.
그때 조각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왔군요. 들어오지는 마세요. 거기 바깥에서부터 조금씩 지워주세요.
이연우가 CCTV 화면을 봤다. 바깥쪽을 가리키는 카메라.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을 지우개를 쥔 비둘기가 날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쉘터는 아깝지만, 어쨌든 해결됐어.’
비둘기가 작게 원을 그리며, 지우개를 쥔 발톱을 까딱이는 순간. 이연우와 침입자 둘이 기대의 시선을 반짝이는 순간.
쩌적-
돌연 비둘기의 몸통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대리석 파편.
“….”
- ….
비둘기가 죽었다. 집의 범위 밖에서.
이연우는 문득 주먹을 쥐었다. 대실패의 결과물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닐까? 사소한 행동을 해도 문제없다고 안심한 게 아닐까?
‘조건이…. 공격하면 죽는 집? 이러면 영향 범위가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지구 반대편에서 이 집을 향해 미사일을 쏘면, 미사일을 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상공격을 감행한 이상개체도.
이연우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어쨌든 조건은 알았잖아. 떠올리면 죽는 집, 보면 죽는 집, 이런 게 아닌 게 어디야.’
이 정도 조건이면 계속 쉘터에서 머물러도 되겠다며, 이연우가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안전해졌다.
집을 공격하는 습격자를 다 죽여줄 것 아닌가.
바깥에서는 건축가가 환호하며 펄쩍 뛰었다.
- 단순한 조건이잖아! 빨리 나가자고! 여기 조금이라도 더 있기 싫으니까! 폐가에 사는 선생님, 의뢰할 일 있으면 예술가협회로 연락하십시오!
건축가는 조각상은 내버려 두고, 혼자 비에 젖은 부지를 철퍽철퍽 달렸고.
- 컥!
다음 순간, 심장이 멎어 그대로 넘어졌다. 진흙에 얼굴을 박고, 조각상처럼 엎어졌다. 미동도 없는 사지.
이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죽, 죽었습니까?”
- …예.
“왜?”
조건은 공격이 아니었나? 혹시 심장마비라도 일어난 걸까? 아니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 지금, 가장 목숨이 위험한 경우.
‘…이게 살아있다면? 조건이 계속 바뀐다면?’
이연우가 흔들리는 눈으로 문자를 보았다.
██하면 죽는 집.
까맣게 칠해진 문자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악의를 가지고, 살의를 품고.
이연우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피부 위로 섬뜩한 감각이 와닿았다. 괴물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온 기분.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야.’
죽는 집. 사람을 죽이는 집. 대실패의 결과물. 주사위가 만든 최악의 적.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직 죽이기 위한 이상개체의 안에 있는 것이다. 부활의 가능성조차 없이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의 안에.
‘진짜 좆됐다.’
이것이 이연우를 죽이고, 부활하면 죽는 집으로 조건을 바꾼다면.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생명의 위험.
이연우가 떨리는 손을 깍지 끼며 입 앞으로 가져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끝없는 활력이 전신을 휘돌았고,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폭탄 목걸이를 찬 심정으로, 이연우는 필사적으로 살아나갈 방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