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이연우가 머리를 감싸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공포나 당황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살길을 찾아야 한다.
‘생각해. 지금 뭐가 우선이지?’
빠르게 휘도는 피가 뇌로 산소를 공급하고, 두뇌에서는 별빛이 점멸하는 듯하다. 폭죽처럼 터지는 생각이 스파크가 되어 번쩍였다.
공부를 할 때는 물론이고 시험을 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고도의 집중. 온 세상이 멀어지고, 오직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매몰되는 사고.
‘이상개체의 파악. 그것의 본질, 그것의 의도부터 알아야지.’
살의를 품은 이상개체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왜 죽이는가.
이연우의 눈앞으로 두 죽음이 생생하게 재생됐다. 녹화한 영상처럼 떠오르는 비둘기 조각상의 파괴와 건축가의 죽음.
‘공격과 도주.’
죽일 거면 진작에 죽일 수 있는데, 살려놨다가 굳이 저 때 죽였다.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를 찾던 이연우가 눈을 돌렸다. 시선이 쉘터 곳곳에 새겨진 문자로 향했다.
██하면 죽는 집.
‘까맣게 칠해져 숨겨진 조건.’
조건이 감춰졌다. 그것도 단서였다. 분명 개체의 성질과 연관이 있을 테고, 이연우는 금방 그 이유를 짐작했다.
알 수 없는 조건 때문에 불안에 떨다가, 끝내 피폐해지는 정신.
문득 이연우의 눈에 광채가 스쳤다.
머릿속에서 어렴풋한 형상이 그려졌다. 집의 탈을 쓴 괴물. 창문은 고양이 눈동자고, 현관문은 송곳니가 뾰족한 입인 그런 괴물 말이다.
‘살인이 목적이고, 영역에 들어온 사냥감은 놓치지 않고, 쉽게 죽이는 대신 괴롭히다가 죽이는 이상개체.’
예리하게 벼려진 직감과 생존 본능이 더해진 직관이 이게 답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저걸 상대로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순간 이연우의 눈에서 선뜩한 살기가 흘렀다. 허세 부리며 조각상을 협박할 때와 다르게 질척하게 응어리진 살기.
‘죽여야지. 파괴해야지.’
탈출은 답이 아니다. 기억하면 죽는 집으로 조건을 바꾼다면, 어디로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다. 무심결에 이 쉘터를 떠올리면 죽는다.
기억소거제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망각하면 죽는 집으로 변하면 죽는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주사위의 가능성만큼이나 무한에 가까운 죽음의 가능성. 결국 위험요소 없이 확실하게, 안전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것을 죽여야만 한다.
‘죽일 방법을 찾아야겠어.’
돌연 이연우가 옆에 놓인 물컵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죽이는 건 이 집의 취향이 아니다.
굳이 비둘기 조각상을 그들 앞에서 죽였다.
1km 안에 접근하면 죽는다는 조건으로 멀리서 죽일 수도 있는데, 코앞에서 죽여 조건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에 차오른 사람이 절망하며 죽게 만든 것이다.
‘괴롭히다가 죽이겠다고? 괴롭히는 건 참아도, 죽이는 건 못 참아.’
누가 누굴 죽일지, 최후에 생존하는 것이 누구일지는 모를 일이다.
이연우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당신도 죽기는 싫을 거 아닙니까.”
침착한 목소리에 조각상이 현관문으로 다가와 문고리를 잡았다.
- 좋습니다. 저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문 닫혀 있습니다. 열어주세요.
“열었습니다. 상황실로 오세요.”
두꺼운 현관문이 열리고, 조각상이 실내로 발을 들였다.
***
여러 칸으로 나뉜 CCTV 화면 안에서는 조각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고, 미로처럼 복잡한 쉘터 내부를 헤매면서.
그 넓은 모니터 앞에 앉은 이연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피고 졌다.
‘허점을 찾아야 해. 주사위 판정이랑 비슷해. 한 번에 하나. 그 사이의 딜레이. 괴롭히다가 죽이는 건 방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용할 방법이.’
직감이나 직관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어떤 증거나 논리 없이 실제적인 무언가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 순간 이연우의 직감과 직관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느낌에서 시작된 번개가 결론이라는 피뢰침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감각.
‘주사위로 집을 협박, 안 돼. 죽이는 게 존재의의인 이상개체야. 같이 죽으려 할 거야.’
‘조각상이 지우개를 들고, 나는 주사위를 굴리는 가불기? 안 돼. 존재하면 죽는 집으로 바뀌면 둘 다 죽어. 가불기를 걸 시간도 없어.’
‘미래의 나. 안 돼.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다고 했잖아. 그쪽에서 거절할 거야.’
‘대성공만 기대하며 굴리기. 대실패가 방금 떴는데 이게 뜰까?’
하지만 무수한 갈래로 뻗어나간 생각은, ‘내가 죽는다.’나 ‘나도 죽는다.’로 수렴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하나뿐인 조건이지만 그 가능성이 지나치게 많다. 어떻게 보면 주사위의 상위호환일 정도로. 아니, 주사위의 카운터로 보일 정도로.
사방이 꽉 막힌 밀실에서 점점 좁아져 오는 벽을 보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와 그림자를 드리운 공포.
“방법이. 방법이 없나? 없다고? 죽어야 한다고? 이렇게?”
끝내 이연우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지다 못해, 손톱이 두피를 긁어내린다.
그때 벌컥, 통제실의 문이 열렸다.
“구조가 복잡하군요. 어쨌든 이 집에서…. 괜찮으십니까?”
조각상이다. 조각상은 문가에 서서 흠칫 놀라더니 후다닥 이연우에게 다가왔다.
이연우는 그제야 부스스 손을 치웠다.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 잔뜩 충혈된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듯하고, 입술은 얼마나 짓씹었는지 흉한 상처와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힘없이 늘어뜨린 손에는 머리카락과 피, 살점 따위가 엉겨 붙었다.
이연우가 잔뜩 확장된 동공으로 조각상을 보자, 조각상이 뒷걸음질을 쳤다.
귀신이나 괴물이 생각나는 몰골과 협회의 정신 나간 이사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 조각상은 머리부터 숙였다.
“우선 일이 이렇게 된 건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멍청이가 일을….”
이연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초에 저쪽에서 오지만 않았으면-
‘쓸모없는 화풀이야. 내가 주사위를 함부로 쓰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딴 데 감정 소모할 시간이 있으면 살길을 찾아.’
이연우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살아나갈 방법만 생각하자고요.”
생각보다 멀쩡한 태도에, 조각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조건이 계속 바뀌는 모양입니다. 주사위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아까 당신 협박하는 걸 이 집이 들었습니다. 경계하고, 대비하고 있을 겁니다. 이상개체를 사용하면 죽는다거나, 그런 걸로. 그쪽은 생각한 방법 없습니까?”
희번득거리는 눈빛에 조각상은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잘못했다가는 이 집에 죽기 전에 이 사람 손에 죽을 기세다.
“하나 생각해봤는데, 가능할 것 같지가 않군요.”
“말이나 해보십쇼.”
“결국 집입니다. 집이 아니게 만들면….”
조각상은 슬며시 이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연우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불가능합니다. 여긴 자폭 시스템도 없어요. 주사위를 쓰자니, 실패할 확률도 높고, 성공하더라도 나는 죽을 겁니다.”
이 집은, ‘공격하면’이나 ‘이상개체를 사용하면’이나 ‘도주하면’ 같은 것을 기본 조건으로 걸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방법이 딱히 없군요. 조건이 만능이지 않습니까. 사람이든, 이상개체든 전부 죽일 수 있어서….”
“….”
그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각상은 계속 이연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세를 계속 고쳤고, 이연우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연우가 눈을 떴다. 이연우는 벌떡 일어서더니, 상황실 구석에 올려놓은 소주를 쥐었다.
조각상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연우는 소주를 병째로 몇 모금을 마셨다.
“그래. 집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어차피 편하게 살려면 죽였어야 했어.”
“저기. 방법을 찾았습니까?”
“당신 제안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하.”
피식피식 웃다가 돌변해 이를 벅벅 가는 이연우가 상황실 문을 열고 나간다.
조각상은 멍하니 있다가 황급하게 이연우를 쫓아 복잡한 복도를 달렸다. 이연우는 걸었고, 이연우의 혼잣말이 적막한 복도에 메아리쳤기에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이게 제일 생존 확률이 높아. 위험해도 해야 해. 망설이지 마.”
“방법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연우가 힐긋 조각상을 보았다.
“지우개를 쓸 겁니다.”
“예? 아니, 그런 짓했다가는 바로 죽-”
“안 해도 죽어. 그나마 이게 살길이야.”
이연우가 탕탕,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
깊은 밤이다.
비가 그친 부지는 짙은 풀냄새를 풍겼고, 물웅덩이가 곳곳에 고여 있었다. 또한 ██하면 죽는 집이란 문장이 잔뜩 새겨져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니, 못 하면 죽는다.”
이연우는 중얼거리며, 문장과 물웅덩이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걸었다. 슬리퍼 사이로 물이 들어가고,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젖는다.
중간에 멈춰선 조각상은 정신 나간 사람을 보듯 이연우의 뒤통수를 보았지만, 정작 이연우의 얼굴은 냉정했다.
‘성질 더러운 이상개체. 지우개가 코앞에 보일 때, 그때 죽이려 들겠지. 그래야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할 테니까.’
하지만 그 성질이, 조건을 바꾸는 딜레이가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비둘기 조각상과 지우개가 떨어진 지점이 가까워졌다. 조각상이 뜯어낸 철조망 울타리 조금 너머다.
이연우가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밤공기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온 감각이 곤두섰다. 솜털 하나하나가 더듬이가 된 듯하고, 생존본능이 극한까지 솟구치며 위험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못하면 죽는다.’
송곳으로 머리를 쑤시는 듯한, 위험한 감각이 전신을 찌른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지우개가 닿는 거리.
어두운 밤이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위험경보가 울려대고, 이연우가 온몸을 던졌으며, 집이 조건을 바꿨다.
‘실패하면 죽는다!’
조건이 바뀌는 찰나의 간격. 이연우의 손이 지우개에 먼저 닿았다.
이연우의 눈에 광채가 맺혔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육감과 직감의 세계. 극한까지 일어난 생존본능이 느끼는 위험. 다가오는 이상의 공격.
‘지워져라!’
까딱인 지우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궤적을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