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지우개가 허공을 그었다. 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두운 밤, 지우개가 지나간 땅은 물론이고, 잡초 하나조차 멀쩡하다.
대신 지워진 것은 이연우에게 다가오던 공격. 조건을 충족하는 즉시 죽여버리는 이상異常의 효과를 지웠다.
멸망주의자가 존재와 소멸을 감지하듯, 미래의 이연우가 확률을 헤아리듯, 지금의 이연우는 극한까지 치달은 생존본능으로 위험을 포착해서 지운 것이다.
“됐다! 개 같은 이상 새끼! 날 죽이려고? 어림도 없지!”
앞으로 엎어져 쭉 뻗은 손으로 지우개를 쥔 이연우가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철조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각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조각상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모른다.
“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빨리 나오세요! 여기 싹 다 지워버릴 거니까!”
흥분해서 말하면서 지우개를 겨눴다. 부지부터 쉘터까지 모조리 지워버릴 것이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면, 저쪽도 죽어야지.
지우개가 휙휙 휘둘러졌다. 철조망이, 그 너머의 부지가, 지상의 집이 손짓 몇 번에 소리도 여파도 없이 사라졌다.
딜레이 없는 삭제의 남발.
조각상은 아슬아슬하게 스친 지우개의 궤적에 펄쩍 뛰며, 허겁지겁 외쳤다.
“문장만 지워도 해결될 겁니다! 아마 문장이 핵심 같습니다. 문장에서 몇 글자만 지워도-”
이런 집도 예술로 치는지 최대한 보존하려는 조각상의 모습에, 이연우는 흙바닥을 뻥 찼다.
“아니. 나를 이렇게 괴롭혔는데, 그냥은 못 넘어갑니다.”
이연우의 눈동자에 짜증과 분노가 용솟음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정말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지우개가 얼마나 위험한지 너도 느껴봐라!’
손짓 몇 번에 세상이 뻥 뚫렸다. 쉘터가 있던 부지가 깊은 구덩이로 변하고, 지하 쉘터의 구조가 드러났다.
넓은 구덩이를 가득 채우는 콘크리트 건물. 저것만 지우면 끝이다.
이연우가 웃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적으로 만났을 때는 그렇게 두려웠던 지우개가, 손에 들리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머리를 쓸 것도 없고,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냥 손가락 까딱하면 끝.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삭제하는 것보다 쉽다.
그 순간이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고, 끔찍한 위험이 느껴진다.
집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연우는 순식간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감각에 집중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도 무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잡아낸다.
까딱-
손가락이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운다. 한 번이 아니었다. 까딱, 까딱, 까딱, 이연우가 계속해서 지우개를 그었다.
‘조건을 계속 바꾸고 있어. 어떻게든 날 죽이려고? 안 되지.’
이상개체를 소유하면 죽는 집, 호흡하면 죽는 집, 심장이 박동하면 죽는 집, 집을 공격하면 죽는 집….
집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조건을 쏟아부어, 지우개를 묶었다. 이제 지우개는 방어하는 데만 써야 한다.
아마 이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죽는 사람은 이연우일 것이었다. 집은 밥도 물도 안 먹어도 되지만, 어쨌든 이연우는 사람이라 생명활동을 이어가야 하니까.
멸망주의자와 이연우의 싸움이 재현되는 양상.
하지만 이연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사위. 이상파괴, 아냐! 안 돼! 대실패했다가 지우개도 안 통하면 큰일 나.’
언제나 그렇듯 주사위를 불렀다가, 이연우는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당장 대실패의 결과물이 눈앞에 있는데.
지우개로 막아내고 주사위로 공격하면 완벽한데…. 대실패의 맛을 몸서리쳐질 정도로 겪은 이연우는 판정을 신중하게 골랐다.
물론, 조각상에게도 질문한다.
“쉘터, 파괴할 수 있습니까?”
“아뇨…. 제가 인간보다는 힘이 세도, 그런 건….”
조각상이 고개를 숙여 하얀 손을 내려봤다.
“알겠습니다. 주사위.”
이연우는 조심스럽게 주사위를 불렀다. 대실패해도 괜찮은 판정을 골랐다.
“감각상실, 이상제어, 활동정지.”
대실패해봤자, 저것의 감각이 인공위성 범위로 변하거나, 통제가 안 통해 날뛰거나, 절대 멈추지 않는 개체로 변하겠지.
이연우는 그 정도 위험은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주사위가 굴렀다.
데구르르- 꽝!
데구르르- 실패!
데구르르- 성공!
집이 정지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정지할지는 모르겠지만, 연사하듯 쏘아진 조건이 멈췄고, 붉게 물든 세상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연우가 지우개를 휘둘렀다.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회사의 50인용 쉘터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쉘터가 변화한 이상개체 또한 흔적도 없이 제거됐다.
“하….”
깊은 한숨.
이연우가 풀썩,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달 치 체력을 뽑아 쓴 것처럼 온몸에 힘이 없다. 관절이 아프고, 열이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예민했던 감각도 사라지고, 쌩쌩 돌던 머리도 멈추다시피 느려졌다.
축축한 땅바닥인데, 눈만 감으면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연우는 어깨에 걸어놨던 에코백으로 얼굴을 덮었다.
‘끝났다…. 진짜, 아. 겨우 살아남았네.’
온갖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이번처럼 끝까지 몰린 적은 처음이었다.
‘주사위.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썼나 봐. 다시는 이런 실수하지 말아야지.’
탁해진 머릿속으로 두서없이 생각을 이어가는 때였다.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저기. 저는 이만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스윽, 이연우가 에코백을 치우자, 조각상이 보였다. 두 손을 몸 앞에 모으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얌전히 서 있다.
“어쨌든 저희로 인해 피해를 입으셨으니까, 보상을 준비-”
“아뇨, 그냥 가세요. 그냥 가서 다시는 엮이지 맙시다.”
이연우는 대충 손을 휘둘렀다. 진심이었다.
예술가랑은 진짜 다시는 엮이기 싫다. 그러다 이연우가 문득 지우개를 보았다.
이연우가 싫어하는 둘. 정신이 나간 예술가와 지우개를 든 멸망주의자. 이곳에 예술가와 지우개가 모두 모여 이런 끔찍한 사고가 난 건 아닐까?
“에이. 아니지. 시간이 안 맞는데.”
“예?”
“그냥 가세요. 그쪽 주인? 조각가한테도 경고하세요. 한 번만 더 나랑 엮일 일 만들면, 내가 못 참는다고. 이번 일도 애초에 그쪽에서 시작된 문제 아닙니까.”
조각상이 도망치듯, 길 너머로 달려갔다. 이연우가 가만히 보니, 무슨 문을 그려놓은 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고, 문은 페인트로 녹아서 사라졌다.
이연우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진짜 온몸이 아프다. 그래도 마무리할 일이 있다.
“집, 아. 쉘터 마음에 들었는데. 지우개는 일단 회사에 돌려줘야 하고. 지우개 가질 수 있나, 마크 정한테 어떻게 말해봐야겠어.”
이연우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회사에 연락을 돌렸다.
***
조각상은 일회용 문을 통해 갤러리로 돌아왔다. 데스크에 앉은 예술가가 뭔가 묻지만, 조각상은 곧바로 공간예술실1을 통해 공간을 넘어, 조각가에게 돌아갔다.
넓은 작업실.
유리 천장에서는 햇빛이 쏟아지고, 그 아래, 돌가루를 뒤집어쓴 노인이 대리석을 조금씩 깎아내고 있다.
땅땅 망치로 두들기고, 끌로 깎아내고. 스케치도 없이 손 가는 대로 깎아내는 형상은, 티라노사우루스였다.
조각가가 산맥으로 만들려는 조각.
조각상은 무릎부터 꿇었다.
“주인님. 지우개를 손에 넣는 데 실패했습니다.”
“음. 그래. 회사가 만만한 친구들은 아니지. 괜찮아. 다시 공격하면 돼.”
노인은 듣는 듯 마는듯하며, 대리석을 망치로 두드렸다. 큼직한 조각이 떨어져 나와, 데구르르 굴러, 조각상의 무릎 앞에 멈췄다.
조각상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인님. 아무래도 포기하는 편이-”
“안 돼!”
조각가가 벌떡 일어섰다. 조각상의 위로 조각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만세 하듯 쭉 편 두 손이 세상을 담으려고 했다.
“생각해보게. 크나큰 산맥을 깎아 만든 티라노사우루스! 이걸 참을 수 있나? 한걸음에 지축이 떨리고, 포효에 구름이 흩어지고,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는 공룡! 현대의 도시를 파괴하는 고대의 공룡! 포기할 수 없어!”
“하지만 주인님. 상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조각상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조각상이 생각하기에, 지우개는 건드릴 수 없다. 지우개를 전문으로 대응하는 그 조사원이 위험했다.
하지만 조각가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다시 대리석 앞으로 돌아가 망치를 쥔다.
“삶은 예술이지. 회사에서 오래도록 직무를 수행한 자들은 명작이고. 사람이 아니라 작품으로 봐야지.”
예술가들은 이상異常을 작품이라 불렀다. 세상을 감동시켜, 세계의 사랑을 받는 작품.
그런데, 예술만 세계를 감동시킬까? 하다못해 예술에 예술가가 만든 작품만 포함될까?
예술가들은 세상 만물도,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도 세계를 감동시켜 세계의 사랑을 받으면 특별한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쉽다고 생각한 적 없네.”
“상대는 이사급입니다.”
높이 치켜들었던 망치가 멈췄다. 조각가는 슬며시 망치를 내렸다.
“확실한가?”
조각상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끔찍한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조리 실토했다.
조각가가 감탄했다.
“훌륭하군! 지우개로 집의 공격을 지운 거야! 지우개라는 작품을 단번에 이해한 거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네가 뭘 아나? 행위예술로 세상을 감동시키겠다면서, 아직 그럴듯한 공연 한 번 못 했잖나.”
조각상은 억울한 얼굴로 조각가를 올려보았다.
임무 실패로 질책받으면 몰라도, 갑자기 자기 예술은 왜 건드리나.
“주인님. 제가 만들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예술에 집중할 시간도, 주인님 대신 돌아다니면서-”
“어허, 변명만 하면 예술을 할 수 없는 법이야. 어쨌든 지우개는 포기하지.”
어떤 작품을 잡아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인간이면 건드리기 어렵다고, 조각가가 망치를 쾅쾅 내리쳤다.
윤곽을 드러내던 티라노사우루스가 와장창 깨져나가며, 박살이 났다. 그러자 다리 달린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튀어나와 붕붕 움직이며 잔해를 치웠다.
***
그 시각.
한국지사에서는 화상 회의가 한창이었다. 이연우가 지우개를 회수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도,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정보부 1차장, 특전대 작전참모부장, 한국지사 기획실 기획실장이 모여, 보고서를 보고 있다.
단순히 지우개를 강탈한 조각상만이 아니라, 그동안 툭툭 일어난 습격들. 근래 들어 습격빈도가 급격히 올랐다.
참모부장은 보고서를 대충 내리쳤다.
“이 사고뭉치 자식들. 선 넘네. 이대로 넘어갈 겁니까?”
“한번 움직이기는 해야 합니다. 이상기후가 사라지고, 집단들 동향이 심상치 않아요.”
1차장은 볼펜으로 책상을 딱딱 쳤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보존계획이 끝나고 복구하는 이때를 노리고 큰 피해를 한 번 줄 생각 같은데.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기획실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반대합니다.”
기획실장은 머리를 주물렀다.
“아직 복구 중 아닙니까. 보존계획에 투입된 역량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거기에….”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말을 꺼낸다.
“얼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사가 경계태세에 들어갔었어요. 무슨 불청객 어쩌고 하던데, 그때 복구작업이 모조리 멈춰서, 복구가 지연됐습니다.”
“그러면 더 공격해야지!”
참모부장이 쾅쾅, 책상을 두드렸다.
“다른 집단도 이상기후에 대비했던 역량을 회복하는 중일 텐데, 우리만 지연된 겁니다!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그리고 그건 본사가 나서야 가능한 일인데.”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기획실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을 끌면서 역량부터 회복하고 싶지만, 조짐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경고와 위협의 의미로, 예술가협회의 피그말리온 파벌만 공격합시다.”
“불가능합니다.”
참모부장과 기획실장의 시선이 1차장에게 향했다. 1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피그말리온은 파벌이 따로 없습니다. 친구만 몇 있고, 조각상 몇만 데리고 있습니다. 차라리 은신처 몇 개만 타격합시다.”
1차장이 보고서 몇 개를 보낸다.
그동안 그들이 파악한 갤러리의 위치.
가만히 놔두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큰 사고는 안 치는 예술가들이라 파악만 해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세 명은 잠시 침묵하다가, 동의했다.
“그렇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