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04)화 (104/194)

도시

며칠이 지났다.

이연우는 너무 지쳐 휴가를 내고 쉬던 중이었는데, 여러 문제 때문에 호텔의 어느 방에서 마크 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우개로 쉘터를 전부 지웠습니다.”

“…쉘터를요? 아니, 어. 아니. 그거 만드는 데 든 돈이, 아니, 이상개체가.”

쉘터의 기기들은 물론이고, 톱니바퀴와 기적의 사과나무, 오라클 시스템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말.

마크 정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연우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지우개를 보았다. 임시로 이연우가 보관하고 있는 지우개. 꿈은 아닌데.

결국 한숨이 나왔다.

“진짜 그렇게 위험한 이상개체로 변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새로 집 구하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이연우가 마크 정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회사 자산의 손실이 아니었다.

“지금 살 곳이 없습니다.”

“이연우 씨, 저는 당신 매니저 같은 게…. 맞나?”

“비슷한 느낌 아닙니까? 본사에서 저를 담당하는 직원이지 않습니까?”

마크 정의 눈동자가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렸다. 쉘터 구해주고, 연락 담당하고, 쉘터 가구 바꿔주고. 대충 잡다한 일 대신 해주는 느낌이긴 한데.

마크 정이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예,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지금 어떤 집 드리고 싶은지.”

“아뇨. 쉘터는 아닐 거 같은데.”

쉘터를 이렇게 날려 먹었는데, 또 쉘터를 줄 것 같지는 않다. 이연우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 판단은 마크 정의 생각과 얼추 비슷했다.

“사람 없는 땅에 컨테이너 하나 던져드리고 싶습니다.”

“예?”

“보니까, 좋은 집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사고 터지고, 집도 터질 텐데. 그냥 싼 값에 쓰고 버릴 수 있는 거주지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원룸 건물은 문 앞의 남자 때문에 지우개로 지워졌고, 쉘터도 예술가의 습격 때문에 지우개로 지워졌다.

앞으로도 집이 남아나질 않을 느낌인데, 굳이 비싸고 좋은 집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이연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컨테이너는 좀….”

“일단 저도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당분간은 호텔에서 머무십, 아니. 호텔에서 사고 나면 사람들 많이 죽으니까, 조사반 사무실에서 머무십시오.”

무슨 폭탄 보듯이 사람을 취급한다. 하지만 이연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대신, 지우개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 지우개 말입니다.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완전히요?”

“대여나 보급 형식도 상관없습니다. 이번에 써보니까, 진짜 쓸만해서.”

마크 정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못 할 일도 아니다. 처음부터 이연우에게 보상으로 주려고 했던 물건이었으니까. 거기에 말을 들어보면 지우개의 힘을 그 멸망주의자보다 못한 수준까지 끌어낸 듯하다.

하지만 지우개쯤 되는 물건이면 물건 하나만 줄 수는 없었다.

“지우개를 가지면 그만큼 위험한 일에 투입될 텐데, 괜찮습니까?”

회사는 이상개체를 대응함에 있어, 전문화되고 특수화된 부대를 운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신지배 대응부대, 기억조작 대응부대, 전자전 대응부대 등등.

지우개처럼 모든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물건은, 그만큼 많은 일에 사용된다. 어떤 문제도 파괴할 수 있는 핵폭탄 같은 느낌으로.

“그건 좀….”

이연우는 컨테이너를 집으로 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지우개가 필요할 만큼 위험한 일에 투입된다는 말 아닙니까.”

“지우개를 놀릴 수는 없으니까요. …당분간은 이연우 씨가 지니고 있으니까, 그동안 경험해보고 말합시다.”

그렇게 대강 이연우의 용건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마크 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연우 씨 당분간 바쁠 모양입니다.”

“예? 무슨 일로 말입니까?”

“한국지사에서 이연우 씨를 무기로 쓰겠다는 느낌인데….”

이연우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며, 주먹이 꽉 쥐어진다. 저절로 지우개로 향하는 시선.

“누가요? 조사원을 왜요?”

“상황부터 들어보시죠. 다른 집단들이 손을 잡고 회사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한국지사에서 갤러리를 공격했는데….”

***

회사의 본격적인 전투는 출입통제부터 시작됐다. 인근의 군부대는 갑작스러운 시가지 전투 훈련이라며 끌려 나와, 갤러리 주변을 봉쇄했다.

짜증 가득한 병장이 짝다리를 짚으며, 경광봉을 휘휘 흔들었다.

“뭔 훈련을 말도 없이 시작해. 내일이면 전역인데 이게 뭔 고생이야.”

“그래도 내일 전역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더 짜증 나는 거지.”

후임과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데,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병장은 적당히 막아섰다.

“길 돌아가셔야 합니다. 훈련 때문에-”

“그런 안내 못 받았는데? 그리고 저기 뒤에 회사가 있는데, 잠깐만 지나갑시다.”

“아…. 그런데, 출입 막으라고 해서….”

“아니, 그럼 나는 뭐 어쩌라고? 점심 먹고 회사로 못 돌아가면, 그거 그쪽이 다 책임질 겁니까?”

진짜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길이 막힌 회사원은 붉은 국물이 튄 셔츠를 답답하다는 듯 끌어당겼다.

병사들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거렸다. 병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을 막았던 경광봉을 내린다.

“그러면 빨리-”

그때였다. 회사가 오직 예술가만을 상정한 전투부대가 도착했다.

병사는 물론이고, 불만에 가득 찬 회사원조차 입을 다물고 전투부대를 보았다.

척척척-

전신을 검은 슈트로 감싼 전투원은 살점 하나도 보이지 않아, 사람보다는 기계장치 같은 느낌을 줬다. 눈조차 보이지 않아 특히 더 그랬다.

카메라가 달린 헬멧이 어항 같이 완전히 얼굴을 감싸, 눈코입도 완전히 막혔다.

대신 증강현실 UI가 카메라에 비친 시야를 필터로 걸러 보여주고 있었고, 소리는 물론, 오감 전부를 인지필터로 조작했다. 이러면 어지간한 예술가의 공격은 막는다.

부대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헬멧에 장착된 소형 카메라가 돌아가며 병사와 회사원을 본다.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 출입통제 똑바로 하십시오. 실제로 사격할 거고,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걸로 끝.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부대는 천천히 나아갔다. 목숨을 건 전투가 코앞이다.

- 우리 목표는 테러다. 시간 길게 끌면 온갖 놈들 다 이동해 올 거야. 빠르게 치고 빠진다.

- 예.

- 갤러리에 있는 이상개체는 숙지했지? 적절하게 대응해.

- 예.

그렇게 사람 없는 도로를 지나 도착한 벽화.

전투원 몇이 재빠르게 나아가, 문 그림의 꼭짓점마다 기묘한 기계장치를 붙였다. 기계장치는 푸른빛으로 발광했고, 푸른빛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끼이익-

문이 열렸다. 문 그림이 물가에 비춘 것마냥 일렁인다.

- 돌입.

- 돌입!

쿵쿵쿵,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총기와 화염방사기 따위를 앞세운 전투원들의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도심의 도로에서, 미술관 같은 갤러리로.

- 홀부터 제압한 후, 관람실을 파괴한다!

짧은 복도를 후다닥 달리며, 방아쇠에 총을 걸고, 섬광탄을 손에 쥐고, 이상장비를 사용할 준비를 마친 순간.

그들의 걸음이 한순간에 멈췄다.

“오셨나요? 늦었네요.”

넓은 홀의 가운데에 있는 안내 데스크. 그 앞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빼입은 사내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전투원 중 누군가가 말했다.

- 골드버그 클럽? 네놈들이 왜?

“아. 그건 말이죠. 저희가 갤러리를 샀거든요. 안타깝게도, 이 갤러리도, 이상개체도 저희 소유가 됐습니다.”

사내가 손에 든 문서를 팔락였다.

전투원들의 카메라가 움직이며 문서의 문자를 읽어냈다. 골드버그 클럽이 갤러리를 소유했다는 문서.

부대장이 이를 아득 갈았다. 상황이 파악됐다. 계약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예술가들이 갤러리를 팔아치울 리가 있나.

- 이런 작은 전투에 개입하겠다고?

골드버그 클럽에 포섭된 스파이들이 작전계획을 유출한 게 분명하다.

골드버그 클럽은 예술가협회와 손을 잡아 회사를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동맹이었고, 위협이다.

- 회사와 완전히 등을 돌릴 생각인가?

“그건 아닌데. 예술가가 당하면 다음은 누구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뭐 언제부터 사이가 좋았다고.”

사내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맨날 간섭하고, 규제하는데.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돈을 못 벌어요, 돈을.”

돈벌이를 막는 회사와 이상개체로 돈을 버는 클럽은 사사건건 부딪치는 편이었다.

극단까지 치닫지 않은 이유는 두 집단 모두 사회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적은 적이었다. 크고 작은 공작이 끊이지 않을 만큼.

- 빌어먹을 놈들. 오늘 일은 상부에 보고하겠다.

부대장은 작전을 포기했다.

예술가를 상대하기 위한 부대였다. 뜬금없이 나타난 골드버그 클럽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를 위한 장비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가 훠이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건물주로서 명하노니. 떠나십시오.”

계약서가 광채를 내뿜는다. 그 빛은 은은했으나, 현실에 기묘한 효과를 발휘했다.

홀에 발을 들인 전투원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들어왔던 벽화 앞으로 이동된 것이다.

상황이 종료되자, 데스크 안에서 예술가의 머리가 쑥 올라왔다.

“끝난 거 맞죠?”

“그럼요. 골드버그 클럽의 경호 서비스는 비싼 값을 합니다. 보십시오. 작품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과장된 손짓을 하며 광고를 잊지 않는 사내의 모습에, 예술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한 번으로 안 끝날 거 같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맺은 동맹 아닙니까. 집단 하나둘로는 회사를 못 상대하지만, 하하. 물론 총력전까지 가면 집단 몇 개로는 안 되겠지만, 거기까지 갈 리가 있습니까.”

회사는 총력전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전쟁이 벌어지면 지구가 남아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전투 몇 번이 이어진 후 협상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어쩌면 전투도 안 일어날 수 있고.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

어떤 의미에서 사내의 예상은 맞았으나, 회사의 대응은 그들의 예상 범주를 벗어났다.

1차장, 참모부장, 기획실장은 회의를 시작했다. 이미 집단 몇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모부장이 1차장에게 눈을 부라렸다.

“스파이 제대로 안 잡고 뭐 합니까?”

“감사과만으로 이렇게 많은 회사원을 어떻게 다 감사합니까. 예산을 더 주시면 가능한데….”

1차장의 시선을 느낀 기획실장이 헛기침을 했다.

“복구가 끝나면 해결될 일입니다. 어쨌든, 적들이 동맹을 맺은 이상, 전면전은 불가능합니다. 한국으로 범위를 제한해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그 피해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이렇게 넘어가자는 말입니까?”

참모부장이 짜증 섞인 말을 뱉자, 기획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전면전을 원하지는 않죠. 멸망주의자도 아니고. 한 발 물러나는 대가로 그들과 합작할 겁니다.”

양보하는 대가로 그들 사업에 숟가락을 얹겠다는 말.

“마침 골드버그 클럽이 이상도시를 발견해, 탐사할 예정이라는데. 거기에 관여할 생각입니다.”

“수익을 나누는 거면 나쁘진 않은 합작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억제력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습게 보이면 안 됩니다.”

1차장의 말에, 기획실장이 웃었다.

“그냥 숟가락이 아니면 어떨까요. 보시죠, 이연우 특수조사원을 보낼 겁니다.”

본사에서 특수조사원으로 스카우트한 이연우는 이미 한국지사의 상부에서도 눈여겨보는 인력이 되었다.

그 이력을 새삼 살핀 1차장과 참모부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고를 일으키지만, 그 자신은 살아서 돌아오는 조사원이라. 좋군요. 사보타주가 되겠습니다.”

“하하! 골드버그 클럽 놈들. 투자는 투자대로 하고 쪽박 차겠군!”

그들은 이연우가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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