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바깥으로 나오자 전파가 잡힌다. 이연우는 곧바로 회사로 연락했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기획실 사람들이 바로 뛰어왔다.
산길을 올라오느라 지쳤을 텐데, 기획실 직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연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통화하면서 대강 상황을 들었다.
이연우를 파견한 이유를 아는 직원으로서, 그는 이번 일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골드버그 클럽의 고위회원 하나와 조 3개가 전멸하고, 그 물자도 고스란히 빼앗았다.
이상도시도 클럽이 눈치채기 전에 전부 빼돌릴 자신이 있었고, 이상도시의 가치도 굉장히 높았다. 죽음을 수확하는 악귀와 죽지 않는 사람들.
‘악귀는 봉인을 강화해서 죽음을 수확하는 이상개체로 만들고, 이걸 이용해서 불사부대를 창설해야겠어. 마을 사람들도 부서나 부대 하나로 편입하고.’
이거야말로 최소한의 투자와 최대한의 이익 아니겠나.
뿌듯한 눈으로 이연우를 보기를 잠시.
직원이 문득 말했다.
“클럽의 물자는 전부 이연우 님이 가지시면 됩니다. 전리품입니다.”
지우개를 미끼로 이연우를 통제하기에는 불안한 점이 많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다. 생존주의자의 선을 넘는 순간, 눈이 완전히 돌아가지 않았나. 사고를 일으키라고 보냈더니, 자기가 사고가 됐다.
회사가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그만큼 당근을 줘야 한다.
하지만 이연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지우개를 내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저기요. 지우개가 유명합니까? 아니, 다른 집단이 많이 탐내나요?”
“당연하죠. 이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상개체 중 하나일 겁니다. 그 멸망주의자가 사고를 한두 번 쳤어야죠.”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아.”
이연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주사위만 가지고 있을 때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았다. 굳이 이연우를 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우개를 가진 순간, 평온한 개천에서 험난한 바다로 던져진 기분이다. 여러 포식동물이 지우개를 노리는 바다로.
‘리스크가 너무 큰데.’
나약하고 자그마한 물고기에 불과한 이연우는 슬슬 위험을 느꼈다.
지우개는 무적이 아니다. 막말로 저격수 하나가 이연우를 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우개를 노리는 사람은 저격수보다 은밀하고 위험할 게 분명했다.
이연우는 돌과 형광조끼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축 내렸다.
‘잘못하면 미치겠어.’
길가의 돌이 지우개를 노리는 적일 수 있다. 문득 머리가 빠지는 비 같은 게 내릴 수도 있고, 친한 사람으로 변신해 그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트럭에 치일지도 모른다.
이상異常의 무한한 가능성만큼이나 무한한 위험.
그걸 하나하나 의심하고 살면….
“아…. 지우개….”
데굴데굴, 지우개를 손안에서 굴렸다. 그래도 포기하자니 아깝고, 가지자니 위험하고.
그 망설임을 똑똑히 본 직원은 속으로 기겁했다. 아니, 지우개를 포기하면 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데?
크흠, 헛기침을 뱉은 직원이 서둘러 말했다.
“주사위와 지우개. 이 두 개를 가지면 좋을 겁니다. 두 개까지는 인간이 장악할 수 있거든요.”
“장악이요? 한 몸 되는 거 말입니까?”
“예. 몇몇 이상개체는 오래 쓰다 보면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그 개체와 관련된 감각을 얻고, 한계를 넘어 사용하고. 멸망주의자와 정보부의 유령이 대표적인 예시죠.”
이연우가 솔깃한 표정으로 듣는다.
“물론 두 개는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개체 하나의 한계를 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두 개의 감각을 얻는 것이 하나의 융합보다는 쉽다. 그리고 감각 둘만 얻어도 그 시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연우는 빠르게 활용법을 떠올렸다.
‘실패 확률 지우기. 지우개의 대상 확장. 상대의 확률 지우기?’
이 정도면 위험을 감수….
‘아, 애매하네. 애매해.’
위험을 감수한다고? 그러다가 죽으면? 지우개의 감각을 얻기 전에 죽으면?
직원은 이연우를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았고, 이연우는 결심을 했다.
‘주사위한테 맡겨보자.’
두 선택지 모두 장단점이 있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 이연우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주사위. 판정 돌리는 건 아니야. 그냥 한 번 굴러줘. 성공이면 지우개를 가질 거고, 실패면 지우개를 버릴 거야.”
그동안 정신 한편에 고이 숨어 있던 주사위가 조심스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납게 뛰어오르며, 맹렬한 기세로 구르기 시작했다.
떼구르르르르!
대실패!
이연우가 이마를 탁 쳤다. 뭔가 주사위의 사심이 들어간 느낌인데.
그래도 어쨌든 결과는 결과다.
이연우는 수류탄을 넘기듯 직원에게 지우개를 쥐여줬다.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지우개를 다시 이연우에게 넘기려고 했다.
“이연우 씨가-”
“지우개로 어디를 가리키는 겁니까!”
이연우는 기겁한 얼굴을 하며 옆으로 펄쩍 뛰었다. 순간이지만 지우개의 끝이 이연우에게 향했다. 휘둘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이연우가 직원을 살벌하게 노려보자, 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지우개를 조심스럽게 말아쥔다.
“그, 이연우 특수조사원님. 지우개를 지니면 위험하겠지만, 회사가 그만큼 지원할 겁니다. 적대집단의 동향이나 움직임을-”
“됐습니다.”
당장 그 요원만 해도 조각가한테 공격받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미 마음을 먹었다. 지우개를 포기하기로.
직원은 손을 떨었다.
“아니. 진짜 두 개 가지는 게 좋습니다.”
“이상개체 이미 두 개 넘습니다.”
어떻게든 설득하겠다고 던진 말에 이연우의 결심은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미 충분히 많다. 주사위, 에코백.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것들. 빗물까지 더하면 세 개일지도 모르고.
그 순간 이연우가 눈을 부릅떴다. 세 개? 세 개라고? 저 직원은 두 개까지만 장악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거, 세 개 가지면 무슨 문제 있습니까? 몸이 못 버티고 터지거나?”
“그런 건 아니고. 감각 하나 얻기도 힘들어집니다. 감각의 과부하가 일어나서요. 노래도 동시에 여러 곡을 재생하면 소음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아.”
그러면 차라리 주사위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다. 괜히 눈에 띄어서 공격받지 않고, 완전히 한 몸이 되면 지우개와 같은 삭제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한 몸 관련한 정보도 좀 구해봐야겠어. 회사에 자료가 있을 거야.’
이연우는 그대로 떠났다.
***
조사반 사무실로 나가는 길.
도로를 걷는 이연우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우개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
‘지우개를 가지면 정말 위험할까?’
지우개가 너무 위험하니까 오히려 안 덤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상대가 지우개를 노리더라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약 지우개를 노린다면, 아니, 그걸 내가 왜 노려. 차라리 지우개를 가진 상대가 날 공격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걸 알았고, 미리 적을 처리할 계획이라고. 수단에 제한도 없다고.’
이연우는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보았다.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주제로.
‘암살.’
우선 지우개는 너무 위험하다. 지우개를 휘두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인식 왜곡 장비로 무장한 뒤 사격.’
다른 집단이라면 투명화할 수도 있고, 멀리서 저격할지도 모른다.
이연우는 문득 도심에 늘어선 건물들의 창문을 보았다. 그 하나하나를 의심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공격이 올지 모른다.
시선은 길가의 차로 향했다.
‘교통사고.’
언젠가 보았던 멸망주의자 꼬맹이는 이동수단을 조종하는 컨트롤러를 지녔다고 들었다.
이연우에게 그게 있다면, 적이 지우개를 들었다면, 차를 움직여 칠 것이다. 자고 있는 건물에 비행기를 떨어뜨릴 것이다.
이연우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아침을 먹기 위해 햄버거집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것도 노릴 수 있지.’
데이터를 빼내 소비 습관을 분석한 뒤, 자주 가는 식당이나 자주 배달하는 식당을 이용할 수도 있다.
잠입이든, 인식 왜곡이든, 몰래 음식에 독을 타는 일은 정말 쉽다.
“씁.”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이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저 멀리 조사반 사무실이 보인다.
‘고정된 장소.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
이 또한 노리기 쉬운 허점이다. 폭탄 설치는 간단하고, 반장이나 유지유를 납치하고 변신하여 접근할 수도 있다.
‘반장님은 안 당할 것 같긴 한데.’
하다못해 키보드에 독을 묻히거나, 컴퓨터에 보면 죽는 그림이라도 설치해두면 그냥 당하는 거다.
‘여기에 주사위처럼 원격에서 저주할 수 있는 개체까지 동원하면.’
이연우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도 춥지만 스스로 생각한 수단들에 오한이 들었다. 암살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자신이 생각한 것만 이 정도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의심하고 살아야 한다고?
“버리길 잘했지.”
포기했다는 생각은 골칫거리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지우개를 들고 있다가는 정신이 망가질 뻔했다.
미련을 완전히 버린 이연우는 가뿐한 걸음으로 조사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일찍 출근한 반장은 멍하니 이연우를 보다가 다급하게 총을 쥐었다.
“너, 너. 탐사 갔잖아. 왜 여기 있어?”
혹시 적대집단이 변장하여 침투한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다. 반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슬그머니 권총으로 이연우를 겨눴다.
총구 앞에서도 이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탐사 터졌습니다. 제가 지우개 가지고 갔잖아요. 클럽이 그거 노리더라고요.”
“어?”
반장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듯한데? 생각해보면 이연우가 갔는데 탐사가 멀쩡하게 진행될 리가 없다.
“안 다쳤고? 어떻게 빠져나왔냐?”
“어떻게 된 일이냐면-”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
하마터면 총에 맞거나 그 도시에 갇힐 뻔했다는 말로 설명을 마무리한 이연우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반장은 그제야 이연우가 이연우임을 믿고는 혀를 끌끌 찼다.
‘왜 가만히 있는 조사원을 건드려서 일을 만들어.’
생존에 특화되었다고 도망만 치는 게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