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18)화 (118/194)

오염

분장하며 요원에게 정보를 들었다. 주의가 필요한 멸망주의자와 그들의 이상개체. 하지만 이런 정보는 없었다.

이 인간은 안경이 전부라고 들었는데.

“째깍째깍.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공룡 친구가 슬슬 올 텐데.”

이연우의 시선을 받으며, 안경 쓴 멸망주의자가 웃었다. 이미 상황은 그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곧 렙틸리언 보스가 올 것이고, 그때까지 시간을 끌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연우 또한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신, 상대가 누구든 무사히 도망칠 자신.

‘나름대로 수단은 준비해놨지.’

생존본능은 아직 경종을 울리지 않았고, 이연우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안경, 탐나네.”

정확히는 위험했다. 그를 탐지할 레이더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예?”

멸망주의자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인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상황이 그의 손바닥을 벗어나는 느낌.

번쩍, 안경이 빛나며 정보를 읽어 들였다. 이연우의 표정, 감정, 몸짓, 그로서 추측되는 심리.

‘진심이잖아. 겁도 안 먹었고, 불안해하지도 않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날 공격-’

벌떡!

멸망주의자가 일어나는 것과 이연우가 드릴을 작동하며 달려드는 것은 동시였다.

키이잉, 맹렬하게 회전하는 드릴이 직선으로 찔러 들어온다. 몸통을 노리는 드릴의 끝. 멸망주의자는 곧바로 손바닥을 방패 삼아 내밀었다.

푸욱, 드릴이 손바닥 정중앙을 꿰뚫었다. 멸망주의자는 침착하게 손을 비틀어, 드릴을 비껴냈다.

“미쳤습니까?”

끔찍한 고통이 두뇌까지 치닫지만, 애써 표정을 다스리고 입을 열었다.

“이럴 시간에 도망치는 게 낫습니다. 제가 그렇게 쉽게 당해주지는 않습니다. 지금만 해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괜찮아.”

“안 괜찮습니다. 어디 보자. 경비 서던 친구들, 돌아갔을 시간은 충분히 지났네요?”

그 말대로다. 시간이 되었다.

쾅쾅쾅, 육중한 발소리가 폭발적으로 가까워졌다. 공룡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공기를 찢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는가 싶더니, 길쭉한 발톱이 텐트를 갈기갈기 찢었다. 노란 파충류의 눈이 찢어진 틈새로 들이밀어졌다. 쉭쉭, 가느다란 혓바닥이 낼름 나왔다.

“안경. 무슨 일 있나?”

렙틸리언 전염병의 숙주. 감염자를 통제하는 보스가 왔다.

“아, 그럼요. 여기 앞-”

안경 쓴 멸망주의자가 활짝 웃으며 말하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이연우를 가리키는 순간.

이연우가 생각했다.

‘주사위. 오염 약화.’

오염의 정보를 들은 후부터 준비한 완벽한 판정. 성공하면 상대는 약해진다. 실패하면 오염이 진행되어 이성을 잃고 단순한 이상異常에 가까워진다.

리스크 없는 판정을 걸고 주사위가 굴렀고.

데구르르-

실패!

오염 약화가 실패했다. 오염도가 높아졌다.

순간 반 인간 반 공룡인 괴물의 눈이 희번득거렸다. 야성이 눈동자에 들어차고, 그르르,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났다.

몸 또한 변화했다. 더 파충류에, 공룡에 가깝게. 몸집이 커지고, 골격이 뒤틀린다.

안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오염이 왜.”

렙틸리언 전염병이 강화됐다. 전염병의 숙주인 보스는 조금 더 괴물에 가까워졌고, 통제를 잃었다.

섬 곳곳에서 감염자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늑대가 하울링하듯, 공룡의 울음이 메아리쳤다.

순간 안경이 고개를 훽 돌려 이연우를 보았다. 그가 무엇을 했다고 추측하고.

하지만 정작 이연우 역시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당황과 공포.

‘…아닌가?’

아니지 않다. 이연우가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위험이 피부로 와닿는다. 감당할 수 있는 오염이 아니다. 렙틸리언의 한계를 넘은 인간을, 그것도 섬에 잔뜩 퍼진 감염자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심지어 계속 감염이 퍼질 텐데.

‘차라리 이전으로 돌려놔야 해. 주사위 오염 약화, 아니, 강화.’

어쩐지 실패가 나올 것 같은 느낌에 판정을 반대로 바꿨고, 이연우의 잔머리는 실패했다.

데구르르-

성공!

오염 강화가 성공해 더 오염되었다.

우드득, 렙틸리언 보스의 골격이 계속해서 비틀렸다. 몸은 커졌고, 피부는 완전히 공룡의 그것으로 변해 우둘투둘 솟았으며, 얼굴의 윤곽도 꿈틀대며 인간의 흔적이 사라졌다.

뚝, 뚝, 침이 흐른다. 뾰족한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렙틸리언 보스는 이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눈을 번쩍이며, 입을 크게 벌려 포효했다.

“———!”

튀는 침을 피해 안경과 이연우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체액이 침투되거나, 물리거나, 할퀴어지면 감염된다.

“지금 폭주하면 안 되는데. 다른 인간들이 빨리 이 놈을 막아야 하는데.”

안경은 발을 떨며 초조하게 말했고.

‘주사위. 오염 약화, 약화, 약화, 약화, 계속 돌려!’

이연우는 다급하게 주사위를 굴렸다.

어쨌든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비슷할 테니, 계속 돌리면 평균값은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데구르르-

꽝, 실패, 실패, 성공, 꽝, 실패!

하지만 귀신같이, 결과값이 한쪽으로 쏠렸다. 오염도가 상승하는 쪽으로.

이연우가 허탈하게 결과를 보았다.

‘이러면 오염도가 얼마나 오르는 거지? 진짜 망했다.’

오염도가 급상승했다. 렙틸리언 보스는 이제는 공룡의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꿈틀꿈틀-

거대한 알. 가죽과 고깃덩이로 이루어진 알은 고개를 꺾어 보아야 할 만큼 거대하다.

알의 표면으로 익룡의 머리와 날개, 육식공룡의 입과 앞다리, 초식공룡의 목과 뿔, 어룡의 부리와 지느러미 따위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꿈틀거렸다.

동시에, 섬 곳곳에서 비명과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숙주의 영향을 받는 감염자의 울음소리.

“젠장.”

안경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집회는 망했다. 잘못하면 계획조차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으직, 으드득, 거대한 고깃덩이에서 길쭉한 목이 나왔다. 머리 없이 빨대처럼 목만 나온 그것은 허공을 휘적이다가, 돌연 피를 뿜기 시작했다.

푸화악-!

붉은 피가 세차게 솟구쳤다가 비가 되어 쏟아진다. 한 방울 한 방울에 병균이 들어있다.

이연우는 얼른 에코백을 활짝 펼쳐 얼굴을 가렸고, 안경은 핏물을 뒤집어썼다.

안경으로 예측하고 나름대로 피한다고 움직였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

피가 뚝뚝 흐른다. 머리가 흠뻑 젖어, 핏방울이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안경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손을 보았다.

전동 드릴에 뚫린 손을, 렙틸리언 보스의 피가 묻은 손을, 전염병이 활발하게 침투하는 상처를.

“아.”

감염됐다.

바로 피부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우둘투둘한 가죽이 점점 번져나갔다. 골격이 뒤틀렸다. 무릎이, 팔이 일그러지며 옷자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불쑥 솟구친 발톱이 운동화를 뚫고 나왔다.

빠각, 얼굴이 부풀고 길쭉해지며 안경이 부서졌다. 파충류의 동공이 드러났다.

“정신 차려. 정신….”

안경은 팔로, 아니, 앞다리로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몸만 변하지 않았다. 한계를 뚫고 진화한 전염병이 정신을 침식했다.

오직 전염병의 의지, 더 많은 감염자를 만들라는 그 의지만이 정신을 가득 채운다.

문득 안경을 썼던 멸망주의자가 앞다리를 내렸다. 노랗게 빛나는 파충류의 눈이 이연우를 본다.

이성이 없는, 흉포한 눈빛.

그쯤에서 이연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심장이 쿵쿵 뛰며 활력을 전신으로 전달하고, 머리가 쌩쌩 돌아갔다.

상황이 간단했다. 지독하게 위험해진 렙틸리언 보스와, 이성을 잃은 렙틸리언.

‘망했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확 몸을 돌리고는 바람이 되어 달려간다.

‘도망쳐!’

그 뒷모습을 감염된 멸망주의자가 보았다. 안경이 부서졌어도 향상된 인지 능력이 그를 사냥꾼으로 만들었다.

입을 벌려 포효하고는, 성큼, 뒷발을 내디뎌 안경의 잔해를 깨부수며 짐승처럼 쫓아갔다.

그 자리에 남은 거대한 고깃덩이의 알은 꿈틀대며 더 많은 감염자를 갈구했다.

***

섬은 난장판이 되었다.

집회에 모인 멸망주의자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렙틸리언.

숙주의 오염도가 상승하는 순간 보스 아래의 렙틸리언들도 영향을 받았고, 끝내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으아악! 왜, 왜 물어!”

“이 새끼들 미쳤다!”

"키아악!"

인간으로 변신해 있다가 본체를 드러낸 렙틸리언들이 사납게 날뛰며 주변 사람을 할퀴고 깨물었다.

공격당한 사람들은 비틀대다가 렙틸리언으로 변이해 다시 주변을 공격했다. 전염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멸망주의자들이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죽여!”

곳곳에서 이상개체가, 무기가 선명한 위력을 뽐냈다.

주먹밥이 날아가더니 수류탄이 되어 폭발했고, 총성이 울렸다. 그들이 약탈한 개체, 번개 뱀이며 나태의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림이 현실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염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 아수라장이다.

“뭐야?”

가장 안쪽에 모여 있던 우두머리급 멸망주의자들이 벌떡 일어섰다. 상황 파악은 빨랐다.

“렙틸리언들 왜 저래? 그 새끼 미쳤어?”

“완전히 먹힌 거 같은데.”

“아니, 와. 반은 넘게 죽겠는데?”

아수라장을 보기도 하고, 렙틸리언 보스가 변이한 방향을 노려보기도 하고, 낄낄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기를 잠시. 그들은 동시에 말했다.

“돌아가야겠다. 안녕!”

“더 있다가는 나도 위험할지도.”

수상함을 느끼고 찾아간 렙틸리언 보스가 저 꼴이 됐다. 이곳은 그들에게도 위험하다.

“사후세계 강하 작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상황에 무슨 작전이야. 사람이 모자라서 못하지. 늘 하던 대로 각자 알아서 하자고.”

그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사람은 녹색으로 빛나는 0과 1의 문자열로 변해 핸드폰 화면 속으로 들어갔고, 담배를 피던 사람은 검은 연기로 흩어졌으며, 술을 마시던 사람은 대놓고 인파를 가로지르며 푸른 문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흩어지며, 탈출할 길을 찾았다.

렙틸리언 전염병이 퍼지는 섬. 푸른 문을 제외하면 고립된 섬. 감염자와 사람 사이의 목숨 건 전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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